목차
1화 함께 기대어
비가 그친 뒤, 노을지는 하늘이 은빛과 연분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빈센트 씨의 서장은 피가로가 가져갔다. 아서에게 전해놓겠다고 말하면서.
오즈를 신경쓰면서 클로에는 한숨을 계속해서 내쉬었다. 빨갛게 부은 눈꺼풀은 서글프고, 석양에 물들어 예뻤다.
클로에: ……라스티카, 괜찮겠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빈센트 씨를 저주하지는 않겠지?
그 질문은 세 번째다. 라스티카는 매번 정중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라스티카: 괜찮아. 클로에는 아무것도 저주하지 않아. 걱정할 것 없어.
클로에: ……하지만……. 나는 라스티카가 생각하는 것보다 착한 아이가 아니니까…….
라스티카: 클로에는 착한 아이야. 지금도 너는 친구와 친구의 숙부를 걱정하고 있잖아.
클로에: ……그런 건 그냥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누구에게도 책망받고 싶지 않을 뿐이야…….
클로에는 약하게 눈동자를 일그러뜨리고 고개를 숙였다. 미덥지 못한 등을 라스티카가 쓰다듬는다.
라스티카: 그래도 걱정하는 마음은 상냥해.
클로에의 불안감이 전해져 온다. 그래도 바짝 다가선 클로에와 라스티카의 그림자는 따뜻한 희망처럼 비쳤다. 나는 빈센트 씨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법사는 공생할 수 없다. 이렇게 다정하게, 그들은 붙어있는데도.
눈썹을 치켜세우는 나를 라스티카가 알아차렸다. 클로에를 쓰다듬으며 살짝 미소짓는다.
라스티카: 현자님, 봐주세요. 마치 거울처럼 웅덩이에 아름다운 노을 하늘이 비치고 있습니다.
라스티카의 말대로 땅에 떨어진 연보라 하늘이 꿈의 세계처럼 반짝이고 있다. 미간의 주름을 풀고 나는 웃었다.
예쁘네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라스티카: 천만에요. 현자님이 분명 좋아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웃고 계셨으면 해서.
라스티카에게 들켜서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상냥한 눈빛은 나를 솔직하게 해줬다.
빈센트 씨의 말은 사실일까요? 마법사는 함께 있을 수 없다는…….
라스티카: 현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 세계를 여행해 온 저와 클로에를 보면서.
라스티카의 장난스러운 눈빛에 나는 눈이 떠진 기분이었다. 맞아. 그들은 계속 함께였어.
그렇죠……. 역시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라스티카: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라스티카의 말에 클로에도 기쁜 듯이 웃고 있었다.
라스티카: 하지만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악기가 늘어날수록 곡을 연주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건 사실입니다.
하긴, 삼중주보다 많은 악기가 동시에 소리를 내는 교향곡이 더 어려워 보인다. 라스티카와 클로에도 둘이서 여행을 했다. 그들이 백 명이었다면 어땠을까?
갑자기 라스티카가 툭 중얼거렸다.
라스티카: 중앙이면 카인, 동쪽이면 파우스트고. 남쪽이면 피가로 선생님, 북쪽이면 브래들리인가.
에……?
되묻으려고 할 때 클로에가 벌떡 숨을 삼켰다. 그의 시선 너머에는 오즈가 있었다.
오즈. 아서는…….
오즈: 그랑벨 성으로 돌아갔다.
오즈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거처를 빼앗기고 방황하는 노인처럼 그는 초조하고 지쳐있다. 노을 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니 빗자루를 타고 마법관에서 날아오르는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클로에: 오즈 님,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아서가…….
슬픔에 보라색 눈동자를 촉촉하게 하는 클로에에게 오즈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즈: 말은 제대로 하도록. 너의 잘못이 아니다.
클로에: ……하지만…….
오즈: 언젠가 그것을 후회한다고 해도, 너에게 잘못은 없어.
클로에는 당황한 듯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옆에서 라스티카도 인사한다. 오즈는 나를 곁눈질하며 한마디 했다.
오즈: ……할 이야기가 있다.
저 말인가요? 알겠습니다. 그럼…….
2화 별의 운명
'어느 방에서 얘기할까요?' 그렇게 제안하기 전에 나는 오즈의 방에 있었다.
……빨라서 도움이 되네요.
오즈: 앉도록.
오즈는 의자에 걸터앉아 나에게 침대에 앉으라고 했다. 난로가 저절로 불을 밝힌다. 탁탁 터지는 불길 소리를 들으며 오즈는 고개를 숙였다. 넓은 등을 구부리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동정했다.
(……마음고생이 심하겠지……. 아서가 약속을…….)
아무리 오즈가 부정해도 아서에게 정이 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탁탁 하고 장작이 튀고 불통이 튄다. 희미하게 숯 냄새가 풍겼다. 내가 위로의 말을 찾기도 전에 그 고백은 당돌하게 시작됐다.
오즈: 아서가 중앙의 성으로 귀환하고 북쪽 끝이 눈보다로 뒤덮여 있을 무렵, 쌍둥이가 예언했다. 아서는 현자의 마법사로 뽑혀 '거대한 재앙' 과의 싸움 끝에 목숨을 잃는다고.
펑 하고 세차게 창문이 흔들린다. 정신을 차려보니 돌풍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무들은 삐걱거리고 새들은 도망간다. 소용돌이치는 먹구름 아래 노을이 타오르고 있다.
(지금, 오즈는 뭐라고……? 예언……? 아서가 죽어……?)
오즈는 씁쓸하게 창문을 노려보았다. 콱 움켜잡은 손끝이 떨린다.
오즈: ……벌써 성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나?
에……?
오즈: 아서 말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요?
오즈: ……저것이 성에 도착할 때까지는 폭풍을 부르고 싶지 않다.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오즈는 자신의 감정으로 정령들을 가득해 세계의 날씨를 휘둘러버린다고.
오즈: 아서가 도착할 무렵, 너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겠다. 조금만 기다려주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노우 / 화이트: ……'노스콤니아'
오즈: …….
스노우: 오즈.
화이트: 오즈여.
오즈: ……무슨 용건이지.
스노우: 음울한 목소리구먼. 묘지를 기어다니는 이름 없는 망령조차도 그런 침울한 목소리는 내지 않는다.
화이트: 마음이 없는 이 성도 어둡고 거무스름하며 무거운 어둠에 잠겨 있군.
오즈: …….
화이트: ……아서가 있었을 때가 꿈만 같네.
오즈: 나가.
화이트: 귀엽지 않구먼, 화풀이를 할 정도면 아서를 데리러 가면 될 것을.
스노우: 오즈가 귀엽지 않은 건 옛날부터지 않은가. 하지만 아서를 주워 키우면서 뭔가 달라진 것 처럼 보였다. 그것도 기분 탓이었던 건가, 오즈여.
오즈: …….
화이트: 오즈여. 갑작스러운 총알만큼 슬프고 딱딱한 것도 없다. 끝나기 전까지는 구원이라고 생각하게 되네.
오즈: ……무슨 이야기지.
스노우 / 화이트: 우리들이 예언의 꿈을 꾸었다.
오즈: 빗나가는 일이 없는 북쪽 쌍둥이의 예언인가.
스노우: 맞네, 맞아. 우리는 미래를 예견하지.
화이트: 모든 것은 별의 운명. 오는 날들이 변이하는 일은 없다.
오즈: ……아무래도 좋다. 나에게는 관계없는 일이야……. 꽃이 싹트기를 기다리는 아이도, 내일의 날씨를 걱정하는 아ㅣ도, 여기에는 이제 없어. 어떤 운명이 찾아오든 일절 관심 없다.
스노우: 불쌍하게도……. 그 정도로 마음이 찢어진건가.
오즈: …….
스노우: 운명에 관심이 없는 그대도 우리는 잘 알고 있네. 그대는 자신을 생각하지도, 무엇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화이트: 자신으로부터 세상을 멀리하고 사랑도 미움도 모르는 것은 필시 홀가분했겠지. 마음에 재산이 없으면 마음이 위협받을 일도 없으니까.
3화 내려진 예견
스노우: 오즈여. 우리가 예견한 미래는 그대의 운명의 길이 아니다.
화이트: 아서의 운명이다. 그나마 인정으로 고하러 왔네.
스노우: 더 이상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그대의 본뜻이 아니라면 우리는 입을 다물고 돌아가겠다.
화이트: 이 성에서 자란 아이는 잊어버려라.
오즈: ……아서의 무엇을 예견했지? 전도에 불길한 그림잘도 있나?
스노우: 아서는 중앙 나라의 현자의 마법사로 뽑히게 될 것이다.
화이트: 그리고 '거대한 재앙' 과의 싸움에서 죽고 돌이 된다.
오즈: ……아서가……. 돌이 돼……?
스노우: 그렇네.
화이트: 그렇구먼.
오즈: ……믿을 수 없어. 너희들의 말 따위는 믿지 않는다. '거대한 재앙' 과의 싸움은 그저 의식일 뿐이다. 목숨을 빼앗기는 일은 없어. 예전에 그렇게 말했던 것은 너희들이다!
스노우: 하지만 그렇게 예견 되었다. 예견된 미래는 바뀌지 않아.
화이트: 남은 시간은 적네. 후회 없이 지내는게 좋다.
오즈: ……아서가 죽어……? 아서가, 달에……. ……끌려간다고…….
스노우 / 화이트: 우리의 예견은 어긋나지 않는다.
오즈: ……인정할까 보냐……!
아서: ……응? 누군가가 부른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인가…….
아서: 오늘은 좋은 날이었네. 언젠가 숙부님과 진심 어린 교류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얻을 수 있는 신용도 있구나.
아서: ……오즈 님께는 꾸중을 듣고 말았지만……. 그 잔소리조차 그리웠어.
오즈: …….
번개가 어둠을 치고 벽난로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오즈의 말을 듣고 나는 망연자실했다. 그러고 보니 오즈는 내가 마법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불길한 예언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게 아서였다니…….)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이 따라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상냥한 왕자의 웃는 얼굴은 세상의 어떤 생물보다도 죽음으로부터 멀다고 생각헀다. 활짝 웃으며 하늘을 날아가는 소년. 만나기 전부터 나는 아서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쌍둥이에게서 그의 인품을 듣고, 이전 현자님의 현자의 서를 통해 그를 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스노우와 화이트의 예견이라고 해도 아서가 죽는 미래라니 절대 믿고 싶지 않다.
……오즈. 예언이라고 해도, 틀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즈: 쌍둥이의 예언은 어긋나지 않는다. 운명은 미리 별의 행로에 의해 가려져 있어.
……그런……. 하지만…….
오즈: 나도 운명에 항거하려고 했다. 이치도 모른 채 세계를 장악하는 힘에 개입했다.
오즈는 다시 숨을 깊이 내쉬고 떼어내듯 손가락을 벌린다.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중얼거린다.
오즈: ……시도는 성공했을 것이다. 나는 중앙의 마법사로 뽑혔고, 문장도 몸에 새겨졌다. 아서의 운명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현자는 아서를 소환했지.
그게…….
오즈: 너다, 아키라. 운명은 바뀌지 않았다.
할 말은 잃은 채 나는 언젠가 본 광경을 떠올리고 있었다. 예전에 북쪽 나라로 오즈를 데리러 갔을 때, 아서의 손에 떠오른 문장을 보고 오즈가 중얼거렸던 말, 어째서.
……대신이 되었다는 건가요? 아서 대신 중앙의 마법사로?
맞다. 미스라도 말했었다. 오즈는 타고난 북쪽 마법사. 중앙 마법사로 소환되는 건 이상하다고.
오즈: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 나도 '거대한 재앙' 에게 해를 입을 줄은 몰랐다. 나는 한 번 운명을 뒤집었다. 하지만 네가 운명을 돌려놨어.
4화 운명에 항거하는 자
……제가……. 제가 아서를 소환했다고요……?
오즈: 네가 고의로 무슨 힘을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이 세상에 대해 무지하니까. 그러나 현자는 마법사를 인도하는 자. 만약 너에게 아서를 무사히 인도할 방법이 있다면…….
오즈: 부디 돌로 만들지 말아줘. 그 아이는 아직 20년도 살지 않았다……. 그토록 알고 싶어하는 이 세상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몰라.
간절한 오즈의 눈빛에 가슴이 떨렸다. 오즈와 아서는 특히 기묘한 만남을 가졌다. 아서에게는 친부모가 있고, 오즈는 아서가 스승이 아니라고 한다.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여기저기 너무 고르지 않다. 그래도 그들은 둘도 없는 시간을 공유해 왔다.
……이야기해줘서 고마워요, 오즈……. 저도 절대 아서를 잃고 싶지 않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약속해요.
오즈: …….
하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 일을 지금까지 누군가와 상의한 적이 있나요?
오즈: 아니……. 아키라가 처음이다.
초조감과 사명감을 안고 나는 몸을 내밀었다.
다른 분과 상의해도 괜찮을까요? 당신이 싫어하는 상대에게는 전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뭔가 단서를 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들……. 각국의 선생님들이라면 어떤가요?
잠시 침묵한 뒤에야 오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즈: ……현자가 그렇게 말한다면.
다음 날, 선생님 회의를 열었다. 오즈의 말을 들은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파우스트: 아서가, 그런…….
파우스트는 눈을 부릅뜨고 아서의 죽음에 대한 예언에 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에게 아서는 복잡한 마음이 깃든 인물의 후손이다. 그럼에도 눈빛에는 아서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예언에 항거하려는 의사가 보였다.
샤일록: 오즈 님……. 잘 말해주셨습니다. 괴로운 내용이었을텐데…….
샤일록은 예언에 놀라기 보다는 오즈의 심정에 기대려 했다. 진심으로 오즈를 동정하면서 이제 괜찮다고 안심시키는 조용한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에서는 신뢰를 향한 것을 자부하는 자부심도 느껴졌다.
스노우: ……개입…….
화이트: 개입이라니 뭐야…….
예언한 당사자인 쌍둥이들은 오즈의 마력의 무시무시함에 질려 당기고 있었다. '거대한 재앙' 이 가진 힘에 개입하여 아서에게 부여되어야 할 운명을 빼앗았다. 그런 짓을 저지른 오즈에게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스노우: 중앙의 마법사로 선택된 것에 무언가 이유가 있다고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빼앗을 줄은…….
화이트: '거대한 재앙' 의 힘이 불어난 것은 그대가 개입한 탓이 아닌가?
스노우: 숙명은 변하지 않는 법. 그걸 억지로 바꾸려다가 막대한 피해를 낳았네.
화이트: 결과, 숙명은 바꾸지 못하고 아서는 현자의 마법사로 뽑혔다. 그렇지, 오즈.
그들의 목소리에는 따지는 듯한 울림이 있었다. 말없이 오즈를 감싸준 것은 피가로였다.
피가로: 지난 일을 이러쿵저러쿵 해도 어쩔 수 없죠. 그게 진실인지도 아직 모르고.
쌍둥이를 달래며 피가로는 오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아버지나 형처럼 온화했다.
피가로: 오즈. 스노우 님들의 말대로 숙명은 변하지 않아. 나는 두 분의 예언이 벗어난 걸 본 적이 없어. 2000년이나 살면서 한 번도. 그래도 너는 아서를 살리고 싶구나?
의외일 정도로 피가로는 부드러웠다. 평소에는 오즈의 행동에 신랄한 비아냥을 던질 때가 많지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한다. 사려 깊은 눈동자에는 연민도, 엄격함도, 실의도 닮은 자애도 떠올라 있었다.
5화 남겨진 시간
오즈는 씁쓸한 듯 손바닥을 노려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즈: ……아아.
피가로는 한숨을 내쉬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피가로: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자.
오즈는 고개를 들고 피가로를 보았다.
피가로: 숙명은 변하지 않더라도 연장하는 것은 가능할지도 몰라. 예언의 성취는 3000년 후일지도 모르지.
스노우: 그리 먼 훗날의 이야기는 아니다.
고개를 흔드는 스노우에 피가로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피가로: 조금만 더 신경 써주세요. 오즈가 저 상태잖아요. 어제는 하루종일 날씨가 이상했고.
화이트: 쉬라고 하면 뭐가 되나? 예언은 변하지 않네.
피가로: 오즈라면 모르죠. 현자님도 협조해 주시고.
샤일록: 저도 피가로 님께 찬성입니다. 아서 님의 몸을 수호하고 있다면 화도 쉽게 다가오지는 않겠죠.
피가로: 맞아. 우리끼리 아서를 지키자. 전선에서 빼도록 궁리하기도 하고. 서쪽 나라나 마법사 노바에 대해서…….
문득 피가로가 말을 멈췄다. 옆에 있던 파우스트가 피가로의 팔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소연하듯 피가로를 바라보고 있다. 결코 책망하는 눈빛이 아니라, 당혹감과 초조함을 느끼며 절박했다. 마치 경고를 보내는 것 같은……. 피가로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
피가로: 왜?
파우스트: …….
파우스트는 입을 벌리고 말하기 어려운 듯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 때 피가로는 뭔가 짐작한 듯했다. 달래는 듯한 미소로 바뀐다. 파우스트의 팔을 잡고 일어선다.
피가로: 잠깐 괜찮아? 가자.
파우스트: 기다려, 여기서……. ……이야기하는 편이 좋아.
피가로: 됐어. 이리 와. 가자.
샤일록: 비밀 이야기인가요?
파우스트: 아니.
피가로: 맞아.
그것은 신기한 광경이었다. 평소에는 반대의 입장인데. 유무를 가릴 수 없는 미소의 피가로에 파우스트가 허둥대고 있다. 두 사람은 방을 나갔다.
피가로: ……여기면 됐나. 안 돼, 파우스트. 너, 말할 생각이었지.
파우스트: ……너도 이야기해야 돼.
피가로: 뭐라고?
파우스트: 뭐라고라니? ……너의 수명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면 정말 거짓말이었나?
피가로: 거짓말 아니야.
파우스트: 그렇다면 더더욱……. 목숨이 위태로운 건 아서 뿐만이 아니야. 적어도 쌍둥이나 오즈에게는…….
피가로: 말할 생각은 없어.
파우스트: 왜!?
피가로: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하는 건 미안하니까.
파우스트: ……뭐…….
피가로: 아는 마녀가 예전에 나에게 말했어. 아마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을 거라고. 루틸이랑 미틸의 어머니 이야기야. 그리고 계속, 그녀가 웃어도 행복해 보여도 불쌍해 보였어.
피가로: 연민은 경멸이야. 나는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아. 특히 그들에게는.
파우스트: ……경멸이라니……. 그건 그냥 정이야. 가족같은 사람들이잖아?
피가로: 아니야.
파우스트: '괜찮아. 아서를 도와주자.' 라고 말했던 것처럼, 오즈들도 그렇게 해줄 거야. '괜찮아. 피가로를 도와주자.' 그렇게 말해줄 거라고. 뭐가 안되는데!?
피가로: 그들은 지킬 수 없어. 나는 아마 노쇠할 거야. 육체가 약해지기 시작했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일이야. 시작이 있는 한 끝이 있어. 그게 왔을 뿐이지. 하지만 나는 아직 내가 끝나는 걸 아무한테도 알려주고 싶지 않아.
파우스트: 그러면 왜 나한테 이야기한 건데!?
6화 구할 수 있다면
피가로: ……글쎄. 왜일까…….
파우스트: 하아!?
피가로: 네가 생각해. 만약 안다면 나에게 가르쳐주지 않을래?
파우스트: 무슨 말을 하는…….
피가로: 쉬잇……. 목소리가 커. 이제 방으로 돌아가자.
파우스트: …….
피가로: 오즈들한테는 이야기하지 마. 답은?
파우스트: 싫다고 한다면?
피가로: 너의 기억을 빼앗을 거야. 그런 짓은 하게 하지 말아줘.
파우스트: …….
피가로: 아아, 그런 얼굴 하지 마. 아직 당장은 죽지 않아. 괜찮으니까.
샤일록: 어떤 비밀 이야기를 하는 건지……. 두 분이 들어오기 전에 새로운 음료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스노우: 호호호. 우리도 도와주지.
화이트: 과일 조각을 받을지도 몰라.
샤일록들이 자리를 비우고 그 자리에는 나와 오즈만이 남았다.
다행이네요. 피가로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모두들, 협력적이고…….
오즈: ……아아…….
말을 계속하려다가 문득 미스라엑 들은 피가로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피가로의 마력이 약해지고 있다고.
그러고 보니 오즈……. 피가로의 마력이 약하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오즈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미스라가 그런 말을 해서…….
오즈: 나도 예전에 따졌었다. 남쪽 나라에서 살기 좋게 하려고 의태하는 것 같더군.
의태……. 아, 그렇구나. 북쪽 출신이라고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오즈의 대답에 나는 안심했다. 맞아. 피가로는 남쪽 나라 주민들에게 숨기고 있지. 그러기 위한 단순한 세공이다.
오즈: ……피가로는 아마 과거를 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 과거 속에는 나도 있지.
무슨 뜻인지 묻기 전에 피가로와 파우스트가 돌아왔다. 피가로는 조금 전보다 상냥했고, 파우스트는 쓴 약을 억지로 먹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피가로: 미안해, 기다리게 해서.
괜찮나요? 대화는…….
피가로: 됐어. 그렇지, 파우스트.
파우스트: ……나는…….
그 때,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퍼뜩 고개를 들자 샤일록이 웅크리고 있다. 그의 가슴에는 불길이 켜져 있었다.
'거대한 재앙' 의 상처……!
스노우: 피가로. 현자여!
화이트: 어서 이리 오게나!
네!
나는 바로 샤일록에게 달려갔다.
샤일록: ……으, 우윽…….
샤일록의 가슴팍에서 활활 붉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는 그를 파우스트가 걱정스럽게 들여다본다.
파우스트: 괜찮나, 샤일록! 오즈, 너의 마법으로…….
오즈: 예전에 시도했지만 지울 수가 없었다.
피가로: 네가 할 수 없는 건 나도 할 수 없어. 하지만, 오늘은 현자님이 있지.
피가로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피가로: 현자님은 '거대한 재앙' 의 상처를 무효화할 수 있지? 도와줘.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을 콱 움켜쥐고 있는 샤일록의 손을 잡는다. 이마에 땀을 글썽이며 샤일록은 억지로 웃었다.
샤일록: 죄송합니다, 현자님…….
억지로 말하지 말아주세요.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해볼게요!
마법을 쓰지 못하는 오즈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미스라도 손을 잡으면 도울 수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보고만 있어도 아픈 샤일록을 구할 수만 있다면. 하지만 환상적으로 보였던 불꽃의 혀가 샤일록의 하얀 피부 밑에서 배어나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심장이 타고 있어. 그 순간 나는 경직했다.
(이런 건 절대로 고통스러울 거야. 꼭 도와줘야 돼. 하지만, 내가 할 수 있을까? 못하면 샤일록이…….)
피가로: 현자님, 진정해.
……네……!
나는 샤일록의 손가락 끝을 힘껏 움켜쥐었다.
7화 고통에 접하여
샤일록: ……큭, 으윽…….
불길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초조해져서 오즈와 피가로를 쳐다봤다. 그들도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샤일록의 손바닥에 땀이 밴다. 견디기 힘든 고통에 그의 손가락 끝이 나의 손등을 파고든다. 하지만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그는 정신을 차릴 때마다 힘을 뺐다. 나는 공황에 빠졌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평소에는 되는데…….
피가로: 괜찮아, 현자님. 진정하고 천천히 숨을 쉬자. 파우스트, 여기에 앉아. 칸막이가 돼서 현자님에게 샤일록을 보여주지 마.
파우스트: 알았어. 현자, 내 눈을 봐. 같이 10초를 세자.
파우스트의 몸이 내 시야를 가린다. 샤일록의 손가락을 잡은 채 나는 파우스트를 보았다.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분주하게 그 자리를 오간다.
피가로: 샤일록, 내가 제안 하나 할게. 너의 통각을 차단할 수 있어. 하지만 아픔은 경고이기도 해. 일시적으로 너의 힘을 빼앗을 수도 있지. 어떻게 할래? 나를 믿을 수 있어?
샤일록: ……쾌락도, 고통도 저의 것입니다……. 뺏지 말아주세요…….
피가로: 하하……. 너의 그런 점이 좋아.
샤일록: ……후후……. 참는 놀이도 즐거운 법. ……현자님,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고통을 감추고 웃는 소리에 나는 울고 싶어졌다. 샤일록의 손가락 끝을 꽉 잡는다.
할 수 있어요! 오즈나 미스라에게 했던 것처럼, 내가…….
파우스트: 아키라, 알고 있어. 너는 항상 우리를 도와줬지.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파우스트가 내 등을 문지른다. 상냥한 온기에 나는 정말로 울어버렸다. 울고 싶은 건 샤일록일 텐데.
(왜? 어째서? 지금 제일 도움이 되고 싶은데…….)
스노우: 불꽃을 만져보는 건 어떤가?
화이트: 지울 수 있을지도 모르네.
쌍둥이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순간 샤일록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불길은 꺼질 기미가 없었다. 갑자기 불꽃이 커지고 손가락이 타는 듯한 강한 열이 느껴졌다. 화상을 입기 직전, 파우스트가 내 손을 잡았다.
파우스트: 아키라……!
오즈: '복스노크'
오즈가 주문을 외운다. 머리를 푹 숙이고 샤일록은 의식을 잃었다. 의식이 없는 몸 위에서 불길 만이 활활 타오르고 있따. 피가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오즈를 쳐다보았다.
피가로: 너, 못 들었어? 샤일록은 감각도 자아도 놓치기 싫어했다고.
오즈: 그래서 뭐지. 샤일록은 고통 받지 않고 현자도 비명을 지르지 않아도 된다.
피가로: 네가 보기 싫은 것에 뚜껑을 덮었을 뿐이야. 남의 긍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피가로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즈는 불쾌하다는 듯이 그를 노려본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파우스트의 손을 잡았다.
파우스트, 미안해요! 저 때문에…….
파우스트: 괜찮아. 화상은 익숙하니까.
피가로: ……그거 웃으라고 한 얘기?
스노우: 미안하군, 현자여.
화이트: 제정신이 아닌 그대에게 말할 말이 아니었네.
스노우: 하지만 우리들, 감격했다.
화이트: 그렇게까지 우리들 마법사를 걱정해주다니.
쌍둥이는 기쁜 듯이 웃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샤일록을 파우스트가 정중하게 소파에 눕혔다. 그러는 사이 조용히 불길이 꺼졌고 파우스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즈와 피가로는 험악한 분위기였다. 나는 도대체 어떤 감정이 되어야할지 몰랐다.
(샤일록을 돕지 못했어……. 이런 상태라면, 아서마저도…….)
8화 흔적을 더듬기 위해
피가로: 현자님, 너무 기죽지 마. 샤일록은 이제 괜찮으니까. 그리고 너도 힘들었겠지. 마법사 노바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할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울고 의지할 수 없는 약한 인간이라고 생각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에요…….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들려주세요.
피가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법을 써서 서류를 불러들였다. 푹신푹신한 새처럼 종이 조각들이 그의 수중에 모인다. 아서가 약속한 날 빈센트 씨가 건네준 서류다.
피가로: 샤일록에게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단서를 두 가지로 좁혔어. 하나는 서쪽 나라 장교의 클럽. 니콜라스가 드나들던 곳이야. 흰머리의 여자가 목격되고 있어.
그게 노바……?
피가로: 확증은 없지만 살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해. 아담스 섬 출신이라고 자칭하면서 섬의 정보도 모으고 있었던 것 같아.
아담스 섬……. 무르가 말했던 샤일록에게 빠져 가라앉은 섬…….
피가로는 아연실색하며 샤일록을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피가로: 그에게 푹 빠지면 섬 하나가 가라앉는 건가……. 대단한 남자네.
스노우: 그대도 모르는 건가?
화이트: 정보통이면서.
피가로: 서쪽 제도 근처는 잘 몰라요. 오즈나 파우스트도 마찬가지잖아?
파우스트: 아아.
오즈: …….
피가로: 파우스트는 착하네. 너도 답이라도 해.
오즈: 모른다.
피가로: 아담스 섬 인근의 보르다 섬에서 의식의 흔적이 발견됏어. 노바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이곳을 조사해줬으면 해. 가능하면 중앙의 마법사와 서쪽의 마법사로.
파우스트: 그렇군. 니콜라스의 관계자로 장교 클럽에 들어갈 거면 카인이 있는 것이 좋은가.
피가로: 역효과일 수도 있어. 니콜라스랑은 사이가 안 좋았던 것 같으니까.
피가로: 또 하나는 동쪽 나라에 한때 존재했던 마법사 길드다. 길드의 규칙으로 만들어진 '공영의 룰북' 의 저자 중 노바라는 이름이 있었다고 해.
파우스트: '공영의 룰북'? 마법사 길드를 만든 것이 노바라는 건가?
피가로: 몰라. 비오는 거리의 도서관리소에 기술이 남아있었다고 해. 동쪽의 나라, 비오는 거리, 마법사 길드. '공영의 룰북' 제작. 저자 J 페이지 H 루루 Q 노바.
오즈: ……동명이인일 가능성은?
피가로: 그럴 가능성도 있어. 조사하면 그것이 확증으로 바뀌겠지. 이건 동쪽 마법사에게 부탁해도 될까?
파우스트: 비오는 거리라면 자주 간다. 조사해보지. 그 책은 어디서 구할 수 있지?
피가로: 안타깝게도 환상의 책이야. 출판 기록만 남아 있어. 소문에 의하면 마법사가 함께 번창하기 위한 규칙이 적혀 있었다고 해.
파우스트: 흥……. 도움이 안될 것 같군. 그 길드는 이제 없는 거잖아?
피가로: 아마도. 아마도라는 것은 언제 사라졌다는지 모른다는 거야.
파우스트: 수상하군……. 길드에 대해서도 알아보지.
스노우: 북쪽 나라 마법사와 남쪽 나라 마법사는?
피가로: 남쪽 나라 마법사는 얼마 전 빈센트에게 들은 대로 중앙 나라의 수도에서 사람들과의 교류를 할 겁니다. 인간들의 편을 늘리면 무슨 일이 있을 때 반드시 우리의 희망으로 이어지겠죠. 북쪽 마법사는 특별히 부탁할 건 없어요. 말하기 힘드니까.
스노우: 그렇지 않은걸!
화이트: 우리도 도움이 되는걸!
피가로: 그러면 노바와의 싸움에 대비해 주세요. 미스라 조차도 이기지 못했다면서요. 오즈 빼고 전멸할 거예요.
스노우: ……이름 없는 마법사에게 넘어질 우리가 아닐세.
화이트: 그대에게도, 노바에게도 한 눈에 보여주지.
피가로: 믿음직스럽네. 현자님, 내 말은 이걸로 끝이야. 결정권은 너에게 있어. 나의 방식을 따라도 되고, 회의를 해서 처음부터 결정해도 되고, 너의 안이 있다면 그걸 따라도 돼.
피가로: 어떻게 하고 싶어?
9화 여기서도 누군가가
'거대한 재앙' 을 소환하려 한 마법사 노바. 그마법사를 만나면 '거대한 재앙'이 예년보다 더 강해진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대한 재앙' 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나 노바의 목적도. 손바닥을 움켜쥐고 나는 피가로를 올려다보았다.
노바를 찾고 싶어요. 서쪽 나라와 동쪽 나라에서…….
피가로: 알았어. 내일 당장 준비하도록 할게. 샤일록은 내가 옮겨놓을테니 현자님은 푹 쉬어.
…….
피가로: 왜 그래?
저…… 도움이 전혀 안되어서……. 어떻게 해야 현자의 힘을 통제할 수 있을까요.
우울한 학생을 격려하듯 피가로가 눈썹을 숙인다. 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스노우와 화이트가 말을 꺼냈다.
스노우: 됐네 됐어, 현자여. 현자의 힘은 고대보다도 더 미지의 기술이다.
화이트: 조종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그대는 잘하고 있네.
정말인가요……?
스노우: 그럼, 그럼.
화이트: 그대는 착한 아이구먼.
스노우와 화이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눈물이 핑 돌 듯 입술을 다물었다. 어린 손바닥에 머리와 등이 쓰다듬어져 안도한다.
그때, 이상한 걸 봤다. 피가로가 썩소를 지으며 쌍둥이를 쳐다보았다. 조소와는 다른 분위기다. 모멸과 분노, 상심이 섞인……. 그래. 의심의 눈초리다. 여기서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의심하고 있다.
루틸: …….
레녹스: 왜 그래, 루틸.
루틸: 잠이 안 와서……. 레노 씨는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레녹스: 나도 출출해서…….
네로: 야식 만드는 중이야. 아주 조금의 맛있는 것과, 아주 조금의 단 술.
루틸: 맛있겠다! 저도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이지.
루틸: 레노 씨, 네로 씨. 빈센트 님께서 말씀하셨던 것, 기억나시나요?
레녹스: 응?
루틸: 마법사는 함께 있을 수 없다고……. 사실일까요?
레녹스: 글쎄……. 일률적으로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어. 남쪽 나라는 잘 되고 있어. 하지만 그것은 개척의 도중이기 때문이라고 피가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지. 생활이 안정되고 각자 재산을 손에 쥐면 주위를 의심하기 시작해. 그럴 때 도둑이 나면 가장 먼저 의심받는 것은 마법사야.
루틸: 저희도 함께 있을 수 없게 될 것 같나요?
레녹스: 글쎄……. 네로는 어떻게 생각해?
네로: 나는…… 모르겠어. 나는 혼자가 더 익숙하니까.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은 그것을 위해 모양을 바꾸는 것. 있는 그대로의 영혼일 수는 없어. 계속 옆에 있으려고…… 자신의 모양을 왜곡하거나 다른 사람의 모양을 왜곡하려고 하지. 나는 그런 건 사양이야. 그러니까 나는 공생하지 않아.
루틸: 있는 그대로의 네로 씨와 있는 그대로의 누군가가 함께 있을 수도 있는데.
네로: 어떠려나. 나는 운이 안 좋아서.
레녹스: 마법사는 혼자서 살 수 있어. 강한 마법사일수록 다른 마법사에게 맞출 필요는 없고. 마법으로 자연을 조종하여 세상을 자신에게 맞게 살 수 있으니까.
루틸: 세계를 자신에게 맞추어 산다……. 강렬한 말이네요.
레녹스: ……그렇지……. 생각한 대로의 세계에 자신이 거기에 있다면…… 누군가와 있는 것보다 혼자 사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몰라.
네로: 뭐…… 그렇게 답답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우리가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동안 이렇게 조용한 밤에 수다나 떨면 돼.
루틸: 그렇네요……. 건배.
레녹스: 건배.
네로: 건배.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법관 안뜰을 산책하고 있었다. 밤바람은 차갑고 부드러웠따. 달을 올려다보다가 사람의 그림자를 알아챈다. 라스티카였다.
라스티카: 안녕하세요, 현자님. ……피곤해 보이시네요.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아요. 고마워, 라스티카…….
라스티카: 천만에요. 현자님의 마음이 편안해지도록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죠.
음악. 주문을 외우려는 라스티카에게 나는 문득 떠올렸다.
……그렇지……. 교향곡 얘기가 중간이었네요. 악기가 늘어나면 곡이 어려워진다고. 오즈가 와서 중단되어 버렸는데, 그때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계시나요?
라스티카: 네. 악기는 마법사와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였죠.
10화 누구 하나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요?
라스티카: 아니었나요? 악기는 전부 개성적인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만으로도 소리를 낼 수 있죠. 그리고 다른 악기와 소리를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마치 마법사 같죠?
듣고보니 그렇다. 강한 개성, 격렬한 소리, 양보할 수 없는 음색……. 최악의 경우, 그거면 된다. 나도 집단행동에 익숙하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엄청난 강대한 적과 싸울 때…… 누구 하나 잃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교향곡을 잘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라스티카는 온화하게 미소지었다. 평온하고 흔들리지 않는 그의 눈빛은 운명의 예연자같았다.
라스티카: 요소는 몇 가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휘자죠.
……지휘자…….
라스티카: 맞습니다. 뛰어난 지휘자는 각각의 소리를 존중하면서 때로는 억누르고, 때로는 끌어내어…… 조화롭게 이끌어가죠. 지휘자는 모든 악기의 장점과 단점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개개의 소리를 겹겹이 겹쳐, 풍부한 음악으로 만들기 위해서…….
라스티카: 모든 소리에 관욕적이고 냉혹한 것이 필요합니다. 쉬잇, 조용히……. 자, 크게!
어디선가 쟝!! 하고 심벌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나의 심장은 튀어나올 뻔했다.
라스티카: 실례. 놀라게 해버렸군요.
아, 아니에요…….
라스티카: 누군가를 위해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고 모두를 위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지휘자의 일입니다.
깜짝 놀란 것 뿐만이 아니라, 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 지휘자의 소질이야말로 현자라고 불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지금의 나는 무리라고 해도, 견본이 되어 줄 수 있는 뛰어난 지휘자가 있으면……. 공생할 수 없는 마법사들이 한시라도 공생할 수 있다.
라스티카,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될까요?
라스티카: 무엇이든지.
마법사의 모두가 악기에 대해 잘 안다고 가정하면…… 지휘자에게 적합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라스티카: 중앙 나라라면 카인, 동쪽이라면 파우스트. 남쪽이라면 피가로 선생님, 북쪽이라면 브래들리입니다.
저번에 중얼거렸던 말이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내 앞에서 라스티카는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스티카: ……이런? 전에 말씀 드렸던가요?
라스티카, 서쪽은요? 서쪽 나라의 지휘자는 누가 적합하나요?
그는 조금 생각하더니 미소지었다.
라스티카: 저겠지요.
……그렇군요……. 저기, 실례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샤일록은 아닌가요?
라스티카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 자부심은 그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친구를 향한 것이었다.
라스티카: 샤일록. 그 고결한 친구는 각각의 멋진 것을 하나로 묶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는 뿔뿔이 흩어져 있고, 필요한 것에서 아름다움과 풍요를 찾을 수 있죠. 있는 그대로의 자유로운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
라스티카: 완성이나 승리, 달성……. 누구나 기뻐하고 안심하는 것을 샤일록은 가게 선반에 장식하지 않습니다. 미완성이나 패배, 미답……. 있는 그대로였기 때문에 보상받지 못한 모든 아름다운 것들. 그것들을 진심으로 자애하고 경애하는 것이 샤일록입니다.
라스티카: 아마도 그는 남들보다도 더 능숙하게 지휘봉을 흔들 수 있겠죠. 하지만 그 자신이 상처를 받고 말 것입니다. 그는 정답의 소리를 정하고 다듬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하니까요.
라스티카는 그것을 잘하나요?
라스티카는 나를 보며 웃었다. 조금은 거드름을 피우는, 하지만 믿음직스러운 귀공자의 몸짓. 별똥별처럼 매력적인 미소를 번뜩이며 라스티카는 한쪽 눈을 감았다.
라스티카: 음악가니까요.
그날 밤, 나는…… 다섯 권 분량의 현자의 서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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