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화 교차하는 비밀
스노우: 에바는 가버렸나.
화이트: 떠나면서 뭐라고 말했었지. 시끄러운 것이 서쪽 나라에서 깨어났다던가.
브래들리: 아아…….
스노우: 세계 각지에서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 어느 땅에서 어떤 마물이 되살아나도 이상하지는 않지만. 그 에바가 충고할 정도니까 마음에는 담아두도록 하지.
브래들리: 그렇네.
화이트: 왜 그러나, 브래들리.
브래들리: 뭐가.
화이트: 마음이 조급해져 있어. 에바와 무슨 일 있었나?
화이트에게 지적받아서 나는 뿌리치듯 고개를 흔들었다. 네로에 대한 제재. 언젠가는 생각해야 할 일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이 녀석들 앞에서 망설임이나 빈틈을 보이는 것은 상책이 아니었ㄷ. 적당히 속이려고 생각했다. 그때 아는 기척을 느꼈다. 미스라다.
미스라: '아르시무'
미스라의 목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우리 눈앞에 공간의 문이 나타난다. 살기가 들었다.
브래들리: ……!
문이 열리기 전에 나는 마도구를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기분이 언짢은 표정을 지은 미스라가 옅은 빛을 띤 마도구를 치켜올렸다.
미스라: 뭐예요, 갑자기.
브래들리: 너야말로 의욕이 넘치잖아.
스노우: 훌륭하구먼, 미스라. 임무를 위해 달려왔나.
화이트: 하지만 유감! 이미 해결해 버렸다.
미스라: 임무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이 남자가 방해하는 바람에 최악의 기분이거든요.
미스라의 대사에 아까 그 광경이 떠올랐다. 남쪽의 어린 형제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며 울리던 무적의 북쪽의 마법사 미스라. 나는 지긋지긋하게 입을 구부렸다.
브래들리: 최악은 이쪽의 대사다. 북쪽의 미스라가 꼴사나운 짓이나 하고.
미스라: 죽일 거예요.
미스라가 이마에 핏대를 띄웠다. 초록빛 눈동자가 분노를 보이고 선명하게 빛난다. 이게 나야. 팽팽하게 긴장감이 오고 무의식적으로 미소가 떠오른다. 그런 우리들 사이에 쌍둥이가 들어왔다.
스노우: 정말이지, 안 돼!
화이트: 싸우지 마! 미스라는 왜 화를 내고 있는 건가.
미스라: …….
미스라는 굉장히 침울한 얼굴을 하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넓은 등을 힘없이 구부리고 있다. 드문 모습에 나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브래들리: 왜 그래, 형제.
미스라: 당신에게 말해도 모를 거예요. 제멋대로인 당신은 누군가를 돌본 적이 없잖아요.
브래들리: 아? 도적단의 우두머리였는데?
제멋대로인 것에 있어서는 북쪽 나라에서 가장 변덕스러운 미스라에게 불평을 들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말하기 전에 미스라는 말을 이어갔다.
미스라: 도적단이라면 강할 것 같잖아요. 저 같은 경우는 약해요. 약한 데다가 바보라고요, 그 형.
브래들리: 누구 이야기야. 플로레스 형제? 네 녀석이 돌봐주는 건가.
미스라: …….
미스라: 맞다. 스노우, 화이트.
미스라는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플로레스 형제를 자신의 약점으로 여기는 것이 싫을 것이다. 그 마음은 잘 알아. 정의 관계는 나를 섬뜩하게 한다. 언 땅을 파헤치고 몰래 뼈를 묻는 짐승처럼 남의 눈을 피해 천하게 감추고 싶다.
스노우: 뭔가, 미스라.
미스라: 아서는 오즈의 제자죠.
스노우 / 화이트: 으음…….
이쪽도 숨기고 싶어해.
브래들리: (쌍둥이의 이 쓰라린 얼굴……. 오즈는 정말 그 왕자를 제자로 삼은 건가.)
미스라: 숨기지 마세요.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오즈는 아서에게 마나석을 먹였냐는 거예요.
스노우: 뭐, 돌 정도는…….
화이트: 먹이겠지.
미스라: 그렇죠!? 보통 그러잖아요!?
미스라: 또 한 가지 물어볼게요. 당신들, 질 좋은 마나석을 손에 넣으면 어떻게 생각하나요?
스노우: 기쁘지.
화이트: 기쁘지.
브래들리: 기쁘지.
미스라: 그렇죠!? 역시 그 사람은 바보예요. 아무것도 몰라!
미스라는 머리를 쥐어뜯고 낮은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아까 그 광경을 떠올렸다. 호통치는 미스라 앞에서 얼굴이 파래진 플로레스 형제.
브래들리: (미스라는 루틸에게 마나석을 먹이려고 했던 건가. 울 정도로 싫어할 일인지…….)
착잡한 마음이 북받쳤다. 미스라와 쌍둥이의 담론은 계속되고 있었다.
2화 그 마법사의 제자
미스라: 오즈는 어떻게 먹였나요? 아서는 저항하지 않았나요?
스노우: 모르겠네. 다음에 오즈에게 물어보게나. 그것을 계기로 친목을 다져서…….
미스라: 피가로는? 피가로에게 제자는 없나요?
화이트: 피가로는 제자와 여러 가지 있었으니까…….
미스라: 그건 그렇고, 그 사람 루틸들 곁에 있었다면 확실히 가르쳐 달라고요.
스노우: 그건 치렛타의 역할이다. 죽기 전에 알려줬어야 했어.
미스라: 정말이요. 나한테는 가르쳐 줬으면서…….
브래들리: (피가로에게 제자가 있었다니.)
흘려보낸 대화 내용에 나는 내심 놀랐다. 피가로에게 제자가 있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거만하고 도도한 그 녀석에게 제자가 있었다면 분명 데리고 다녔을 거야. 반대로 데리고 다니는 게 부끄러운 마법사였다면 절대 제자로 삼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없는 줄 알았어.
하지만 만약 있다면 이건 쓸 수 있는 소재다. 만일 네로의 정체가 드러났을 때 거래로 쓸 수 있어. 스노우와 화이트 쌍둥이는 냉혹하고 용서가 없다. 오즈도 그랬다. 지성이나 도덕, 정에 호소해도 거래가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피가로와는 거래가 가능하다. 우리는 서로 그런 냄새를 맡고 있었다. 그러니까 피가로는 감옥 안에서 나를 무릎 꿇게 하고 약속을 시킬 수 있었던 거야.
브래들리: (알고 싶네.)
피가로에게 제자가 있다면 북쪽 마법사겠지. 남쪽 마법사가 되었다 하더라도 약한 마법사를 계승자로 선택할 것 같지는 않아. 내가 아는 마법사일 가능성이 있어. 몰라도 쌍둥이를 흔들어보면. 어지럽게 머리를 굴린 것은 불과 몇 초의 일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브래들리: 피가로 말이지. 제자인 그 녀석에게는 확실히 예의를 차리잖아.
스노우: 뭐야? 알고 있었나?
화이트: 어디서 들은 겐가?
브래들리: (어디? 역시 피가로의 제자는 나와 안면이 있는 녀석인가?)
브래들리: 당연하잖아. 피가로가 나한테 말할 리가 없으니까.
스노우: 그럼 그 녀석이 이야기 한 건가? 그대들, 의외로 친하군.
화이트: 뭐, 현자의 마법사로서 짧지 않은 교제였으니까.
브래들리: (현자의 마법사? 현자의 마법사라고? 그러면 마법관에 있는 녀석인가? 지난 번 싸움에서 돌이 된 녀석인가? 자존심 강한 피가로가 제자라고 인정할 정도의 실력을 지녔으며 그를 숭배하는 마법사……. ……아니, 자신을 숭배하지 않아도 자존심과 명예가 충족되면 제자로 뽑을지도…….)
브래들리: (그렇다면 가능성은 한 사람……. 무르다.)
스노우: 파우스트 쨩, 스승에 대해서 뭐라고 했나?
브래들리: 파? 에? 무……. 파?
스노우: 왜 그러는겐가. 끓는 주전자처럼.
브래들리: ……미안. 재채기가 나올 뻔해서.
스노우: 아 그래?
브래들리: 그래서 저주상이 뭐라고?
스노우: 피가로 쨩에 대해서, 또 뭐라고 했어?
화이트: 뭔가 칭찬을 말했으면 전해주려고. 요즘 기운이 없어 보여서.
브래들리: (무르가 아니라 파우스트였나……. 이건 의외인데……. 그 녀석, 제자에게 그만큼 제멋대로 말하게 하고 하하하 웃어넘기는 건가……. 남의 말은 못하지만 한심해. 동족 혐오다…….)
스노우 / 화이트: 브래들리 쨩?
브래들리: 아아, 뭐, 칭찬했어. 완전 칭찬했지.
스노우 / 화이트: 정말로!?
브래들리: 칭찬…… 하는 것 같고, 깎아내리면서 칭찬하더라. ……그렇구나. 저주상…….
브래들리: (뭐 좋아. 여차하면 교섭 재료로 만들어주지. 하지만…… 화내겠네, 네로 녀석…….)
미스라: 하아……. 짜증나네요……. 뭔가 풀고 싶은데. 임무 하러 가고 싶어요. 가고 싶어요.
화이트: 지금 막 끝난 참인데…….
미스라: 자, 그럼 브래들리…….
브래들리: 그럼이 아니야. 나랑 싸우는 걸 하는 김에 해야지 처럼 말하지 말라고.
브래들리: ……한바탕 날뛰고 싶은 거지. 따라와, 미스라. 즐겁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몰라.
3화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
질: 믿고 있겠다, 코르테제……. 변경이라고는 하지만 역사가 있는 도시여…….
장교: 버넷 장군, 보고드립니다.
질: 어땠나.
장교: 원하시는 신작은 아직 입고되지 않았습니다.
질: ……이럴 수가……!
장교: 역시 도시 지역에 비해 서적을 포함한 모든 물품의 입고는 늦어지고 있다고 해서…….
질: 그렇군. 고맙네. 이런 줄 알았으면 출발하기 전에 왕도에서 입수할 걸…….
장교: 왕도로 곧 돌아갈 예정이 아니었습니까?
질: 변경되었다. 릴리아나 님께서는 오늘 코르테제 성에서 하룻밤을 보낸다고 하시더군.
장교: 그런가요? 무리도 아니죠. 왕도 생활이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릴리아나 님께는 애착이 가는 친정이니까요.
질: 그런 셈이지. 코르테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제1 왕위 계승자를 보호하기 위해 적합한 경호를…….
릴리아나: 질.
질: 릴리아나 님. 이런 곳에…….
릴리아나: 다른 사람들을 물러서게 하라.
질: 알겠습니다. 너희들, 물러서있어.
장교: 네.
질: 무슨 일이시죠?
릴리아나: 무르랑 샤일록이 무서워.
질: 솜씨 좋은 마법사니까요. 마음은 압니다.
릴리아나: 쫓아내.
질: 현자의 마법사로서 환영한 이상 그들만 멀리하기는 어렵습니다. 핑계가 없다면.
릴리아나: 핑계를 못 대?
질: 상대는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는 괴물. 수 세기동안 접객을 계속하고 있는 점주와 심리학 연구가의 일면을 가진 천재. 서투른 움직임은 의심을 불러일으킵니다.
릴리아나: 마찬가지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도 머지않아 의심을 불러 일으키지. 질. 너의 힘으로 저 둘을 돌로 만드는 건?
질: 가능하겠지요. 박사님에게 사용 허가가 난다면. 하지만 당신도 아시지 않습니까. 무르도 샤일록도 돌로 하기에는 아까운 인물입니다. 그들은 서쪽 나라에 필요합니다. 당신의 나라에.
릴리아나: ……후후……. 나의 나라라니 황송하군. 아직 국왕 폐하께서는 존명하시는데도.
질: 이거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릴리아나: ……질. 부탁이야. 아주 잠깐이면 돼. 무르와 샤일록을 멀리해줘. 그들이 무서워서 쳐다볼 수도 없어.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만나는 것은 오랜만인데…….
질: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아까 코르테제 성자와 이야기했더니 어떤 상담을 받았습니다. 근교 왕립 식물원에서 몇 가지 기묘한 이변에 대해서 보고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가요. 현자님과 함께 그쪽으로 가시는 건.
릴리아나: 명안이다. 미안해, 질.
질: 아뇨. 저도 즐겁습니다. 저는 소설을 좋아합니다만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당신의 이야기가 자극적이고 재미있어. 결말까지 지켜보겠습니다.
릴리아나: 말투를 모르는 남자 같으니……. 하지만 지금은 용서해 주겠습니다.
질: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어떻게 하죠?
릴리아나: 한 명 더? ……아아, 그 아이……. 그 아이도 데리고 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추억은 충분히 만들어줬지. 나 대신에. 지금은 내가 있으니까 필요 없어.
질: 잘 알았습니다.
릴리아나 공주에게 허락을 받은 우리는 코르테제 성에 들어가게 되었다. 객실이 갖춰질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달라고 성이 잘 보이는 테라스로 안내된다.
그레고리: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현자님. 원래대로라면 지붕이 있는 곳으로 모셔야 하는데……. 이 테라스는 코르테제 성의 자랑스러운 휴식처입니다. 기분 나빠하지 말아주세요.
그레고리는 어떤 하인보다도 우리를 척척 대접해 주었다. 지금도 날개를 펴고 날아다니며 차 준비를 지시하고 있다.
그레고리: 이쪽 자리로 세팅해줘. 컵은 따뜻하게 데웠나? 어이, 손잡이를 거꾸로 두지 마.
하인: 뭐지, 이 새……. 새인데도 재잘재잘 말하고 있고 그레고리 씨처럼 제대로 지적하고 있어. 하지만 조언해주니 편리하네. 티스푼은 어떻게 놔뒀더라?
그레고리: 컵에 곁들여 드려. 그리고 사실 나는 새가 아니라…….
하인: 그레고리 씨, 불쌍하지. 모처럼의 옥가마였는데 공주님이 왕위 계승자로 뽑혀버려서. 그 사람, 의외로 소심해서 내가 먼저 약혼했어. 내가 남편이야. 라는 말도 못한 채 행방불명이라니…….
그레고리: 소심하지 않아. 주제를 파악하고 있는 거다.
하인: 아, 새 씨. 그레고리 씨는 실연당한 이 성의 젊은 근시야.
그레고리: 인물 소개는 안해도 돼. 내가 그레고리다.
하인: 에, 새로 보이는데.
그레고리: 마음은 알아. 뭔가 잊고 있는 것을 눈치챘나?
하인: 그레고리 씨가 내 상사라는 거야?
그레고리: 그것도 그렇지만. 찻주전자에 워머를 씌워.
떠들썪한 대화는 쾌활한 서쪽 사람들 다웠다. 긴장되는 마음을 안심시켜 준다.
(아까는 깜짝 놀랐어……. 서쪽 마벗바들과 서쪽의 장군…… 질이 싸우는 줄 알았어. 싸우면 도대체 누가 이겼을까……. 마법 과학 무기를 다루는 장군과 마법사들…….)
그때, 코르테제 성의 사람 같은 흰 머리의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황송한 듯 어깨를 움츠리면서 흥미로운 분위기로 우리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한다.
코르테제 성의 집사: 저……. 현자님과 마법사님…….
네. 뭔가요?
코르테제 성의 집사: 수고하셨을텐데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다급한 부탁이 있어서…….
클로에: 부탁?
4화 왕립 식물원의 이변
코르테제 성의 집사: 사실 코르테제 성내에 있는 유명한 왕립 식물원에서 기묘한 이변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서……. 예전보다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요. 영주님께도 상담하고 있었습니다만, 좀처럼 대응하지를 못해…….
샤일록: 알고 있었나요? 그레고리.
그레고리: 이야기는 듣고 있었다. 왕립 식물원에서 묘한 일이 있으면 왕실의 명예에도 관여되기 때문에 신중하게 움직였던 걸지도 모르겠지. 원래 왕립 식물원에는 특이한 녀석이 살고 있고…….
클로에: 특이한 거?
그레고리: 마법사다. 왕립 식물원에 숨어 살면서 연구자나 내원객들을 위협하는 거지. 도둑질을 하거나 식물에 나쁜 짓을 하는 건 아니지만 이상한 노래를 부르거나 해서 곤란해.
라스티카: 이상한 노래라는 건?
그레고리: 서쪽 왕실을 우습게 보거나 식물이나 식물에 대한 연구를 우습게 여기는 노래다.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와도 그런 노래를 듣다 보면 기분이 좋지 않잖아?
확실히. 가끔은 재미있는 노래라도 즐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모처럼 식물원에 있을 때는 식물들이 칭찬받는 노래를 듣고 싶지.
코르테제 성의 집사: 그렇기 때문에 현자님 일행에게는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왕립 식물원의 상태를 봐주실 수 있을까요?
그레고리: 잠깐만 기다려줘. 그 전에 현자님은 릴리아나 님을 만나주셨으면 해. 그래서 이 테라스에서 객실의 준비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객실 준비는 끝났나?
코르테제 성의 집사: 뭐야 이 새. 그레고리처럼 시끄럽군.
그레고리: 그레고리다. 객실 준비는 누가 하고 있지?
코르테제 성의 집사: 객실 준비? 으음, 아마 누군가가…….
그레고리: 정신 차려! 현자님을 모시고 있는 건데!
날개를 흩뿌리며 필사적으로 호소하는 그레고리에게 집사 할아버지는 목을 움츠렸다. 나는 그레고리를 달랬다.
자자, 그레고리. 깜빡하는 건 저도 자주 그러고요. 누구에게나 있는 일이니까요.
그레고리: 상냥하신 현자님…….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방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릴리아나 공주는 만날 수 없는 거죠? 그렇다면 먼저 식물원에 다녀와서 릴리아나 공주와 이야기하는 것은 어떨까요?
서쪽 마법사들을 돌아본다. 무르가 둥둥 공중에 떠서 거꾸로 떴다.
무르: 좋아! 왕립 식물원에 가고 싶어~!
샤일록: 현자님만 괜찮으시다면.
클로에: 나도 가보고 싶어!
라스티카: 그러면 릴리아나 공주를 만나기 전에 왕립 식물원의 불가사의를 들여다보도록 할까요.
코르테제 성의 집사: 아…….
라스티카가 미소짓자 갑자기 집사 할아버지가 소리를 냈다. 모두가 일제히 뒤를 돌아본다. 할아버지는 라스티카의 눈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코르테제 성의 집사: 라스티카 님은 남아 주시겠습니까?
라스티카: 에?
클로에: 라스티카만? 어째서?
눈을 깜빡이는 라스티카보다 클로에가 놀란 듯 일어섰다. 집사 할아버지는 난처한 듯이 자꾸만 손을 비비며 대답했다.
코르테제 성의 집사: 음, 그게, 유명한 음악가 라스티카 님께서 봐주셨으면 하는 악기가 있어서…….
라스티카: 봐줬으면 하는? 소리가 울리지 않는 걸까?
코르테제 성의 집사: 그런 건 아니지만 봐주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라스티카: 누가 그랬니?
코르테제 성의 집사: 누…… 누가 시킨 건 아닙니다. 저의 부탁입니다. 부디…….
어떻게 하겠나요? 라스티카.
라스티카: 저는 상관 없습니다.
그레고리: 죄송합니다. 수고를 끼쳐 드려……. 우리 성에 그런 거창한 악기가 있었나?
클로에: 그러면 나도 남을까……? 처음 온 성이고, 혼자 있으면 불안하지 않아?
라스티카: 괜찮아. 클로에는 식물원을 보고 와. 전에 꽃이 많이 피는 곳에 갔을 때 좋아했었지? 옷 디자인에 참고가 된다면서.
클로에: 그렇긴 하지만…….
라스티카: 분명 이번에도 멋진 아이디어가 생길 거야. 즐기고 와.
클로에: 응……. 알았어. 고마워, 라스티카. 다녀 올게.
라스티카: 잘 다녀와. 현자님, 무르, 샤일록. 클로에를 잘 부탁드립니다.
알겠어요.
샤일록: 그러면 갈까요.
무르: 와이! 출발!
클로에: 식물원, 어떤 곳일까!
서쪽 마법사들이 마법의 주문을 외우고 빗자루를 꺼낸다. 떠날 준비를 하면서 문득 시선을 들어보니 코르테제 성의 창가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저건…… 릴리아나 공주……?)
그녀는 가만히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멀리 있어서 표정은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강한 바람일 불어서 드레스 소매가 떨려도 그녀는 창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라스티카: 아…….
클로에: 왜 그래!?
라스티카: 이 홍차, 너무 맛있어.
클로에: 깜짝아!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어.
라스티카: 아무것도 없어. 행복했을 뿐이야.
기쁜 듯이 미소짓는 라스티카가 무심코 성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 순간 도망치듯이 창가의 인적은 실내에 숨었다. 그 몸짓이 유난히 인상에 남았다. 강한 바람에 날린 드레스 소매가 지는 꽃처럼 심하게 흔들려도 창가에 서있던 그녀. 쑥스럽게 숨은 그림자. 평범하게 생각하면 거절이나 거부를 의미하는 몸짓일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반대로 보였다. 집착으로.
릴리아나: ……라스티카 님…….
5화 식물원에 사는 자
클로에: 괜찮을까, 라스티카. 공주님이나 장군 앞에서 덜렁거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라스티카라면 괜찮을 거예요. 코르테제 성의 모두도 자상하신 분들이니까요.
그레고리: 소중히 대접하고 말고요! 현자의 마법사 여러분은 저희의 소중한 손님이니까요.
클로에: 다행이다! 그 말을 들어서 안심했어! 현자님은 식물원에 가봤어? 어떤 식물을 좋아해?
지역의 작은 식물원이라면 가봤어요. 어떤 식물……. 모두 좋아하지만 고양이 풀 같은?
클로에: 고양이 풀? 재밌는 이름이다! 어떤 식물이야?
클로에의 빗자루에 앉아 수다를 즐기면서 식물원으로 나아간다. 그 뒤에서 무르와 샤일록이 사이좋게 빗자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잘 들리지 않는다.
무르: 경계 당하고 있네!
샤일록: 경계 당하고 있네요. 그 집사는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하는 눈치였어요. 불쌍하게도 긴장하면서.
무르: 불쌍해! 객실의 준비도 남에게 맡긴 화창한 코르테제 성인데!
샤일록: 노집사의 평온한 생활에 긴장을 강요하는 것은…….
무르: 밖에서 온 권력! 장군인가?
샤일록: 서쪽 나라의 장군이 어째서 라스티카만 성에 남기고 싶어했을까요?
무르: 모르겠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 그렇지, 샤일록! 나와 너, 어느 쪽이 성으로 되돌아오면 장군이 더 역겨운 표정을 지을 것 같아?
샤일록: 글쎄. 어느 쪽이 돌아가도 환영해 주셨으면 하네요.
무르: 나는 샤일록을 환영해!
샤일록: 저도 무르를 환영해요.
무르: 마음이 맞네!
샤일록: 마음이 맞네요. 가끔은 이런 날도 좋군요.
무르: 와아이. 오늘은 기념일! 내가 돌아갈게! 현자님과 클로에를 잘 부탁해!
샤일록: 알겠습니다. 라스티카를 부탁할게요.
클로에: 그래서 말이야, 현자님. ……어라!? 무르!?
무슨 일인가요?
클로에: 봐! 무르가 되돌아갔어. 무슨 일이지!
그레고리: 진짜다! 대신 샤일록이 속도를 내면서 이쪽으로 오고 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샤일록, 무슨 일이에요?
샤일록: 현자님, 죄송합니다. 무르가 신경쓰이는 것이 있다고 해서. 식물원은 저희끼리 가달라고 하더군요.
그랬군요.
클로에: 무르는 여러가지에 관심이 많으니까. 하지만 혼자서는 미아가 되지 않을까?
샤일록: 괜찮을 거예요. 그도 마법사니까요.
알겠어요. 그러면 무르와는 따로 행동하도록 해요 라스티카도 무르도 없으니까 만약 힘들 것 같은 임무라면 무리는 하지 말고 일단은 성으로 돌아가죠. 모두의 안전을 우선시하고, 다시 합류하고 나서 또 오면 되니까요.
클로에: 응! 알았어!
샤일록: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슬슬 왕립 식물원에 도착합니다. 현자님도 부디 조심해 주세요.
네!
???: 라라라~. 임금님도 비도 국민도 머릿속은 텅 비었어~. 라라라~. 모두는 잊어버렸어. 비극의 귀공자도, 비극의 신부도.
???: 라라라~. 모두들 우스갯 소리야~.
???: ……응? 이런……. 누가 온 것 같네. 후후, 연구원 놈들이군. 또 위협해 주마!
빗자루를 타고 우리는 왕립 식물원에 도착했다. 식물원은 광랄한 부지와 다양한 식물들이 가득한 재미있는 장소였다.
처음 보는 식물들 앞에는 내가 읽을 수 없는 글자로 쓰여진 이름표 같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초록으로 반짝이는 빛이 아름답다. 식물이 많아서 그런지 왠지 모르게 공기가 찌고 있다. 우리를 안내해준 것은 왕립식물원 연구원 할아버지였다. 몸집이 작고, 장발에 짧은 수염을 기르고 있다. 계속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에 화난 줄 알았는데 그게 원래의 표정인 것 같아.
연구원 할아버지: 어서오세요. 환영합니다, 현자님. 그쪽은 남쪽 나라에만 자라는 거대한 가시가 돋는 식물로…….
클로에: 아, 이 가시 돋친 거. 남쪽 나라에서 본 적이 있어!
연구원 할아버지: 세상에. 실물을 보시다니. 남쪽 나라 출신이신가요?
클로에: 으응. 서쪽 나라의, 그…… 마법사지만 임무 때문에 세계 각지에 나가고 있어.
연구원 할아버지: 부럽군요. 다음에 보이는 게 주로 중앙 나라의 동부와 동쪽 나라에 자라는 덩굴을 가진 그늘을 좋아하는 식물로…….
그레고리: 실례. 큰 도움이 되는 이야기입니다만, 이변의 내용을 먼저 알 수 있을까요.
연구원 할아버지: 새가 말했다.
그레고리: 그 이외의 이변에 대해서. 현자님도 바쁘시니까요.
연구원 할아버지: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만 열이 들어가 버려서…….
아니에요. 국왕이나 식물을 욕하는 노래가 들린다고 하던데…….
연구원 할아버지: 아아, 켈빈입니다.
켈빈?
연구원 할아버지: 몇 년 전부터 식물원에 정착한 마법사죠. 저희나 손님을 놀리면서 놀고 있습니다.
클로에: 서쪽의 마법사는 인간을 놀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꽤 있으니까…….
그러면 식물원에 일어나고 있는 이변이란?
연구원 할아버지: 한밤 중에 연구 일지에 추가되는 메모입니다. 아무도 쓴 기억이 없는 글자가 마구 쓰여져 있습니다. 그것도 날카로운 관찰안으로 정확하게 사상을 지적하고 있죠. 저희도 혀를 내두르기만 합니다. 게다가 어디선가 본 듯한 글씨체로. 죽은 연구원의 것인 줄 알았는데 과거 기록과 비교해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그 일지를 보여주시겠나요?
연구원 할아버지: 네. 이쪽으로.
연구원 할아버지는 나에게 큰 연구 일지를 건넸다. 페이지를 넘기고 어떤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준다. 확실히 다른 곳과는 필적이 다르다. 휘갈겨 써져 있었다. 멈추지 않는 흐르는 물과 같은, 그러면서도 신경질적인 가는 글자…….
샤일록: …….
샤일록이 입을 다물었다. 동요를 삼키듯이 한숨을 쉰다.
샤일록: 이변은 언제부터 일어났죠?
6화 필적에 미소 짓고
연구원 할아버지: 그렇네요. 너무 가까이 다가온 '거대한 재앙' 이 떠나갈 무렵부터일까요. 식물원에서 망령을 봤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다 무서워해서.
클로에: 할아버지는 귀신이 무섭지 않은 거야?
연구원 할아버지: 네. 물 주기를 잘못해도 시들지 않는 것은 두렵지 않네요.
클로에: 식물이 더 무섭다는 거야? 후후, 왠지 재밌네!
샤일록, 무슨 일인가요?
나는 샤일록에게 물었다. 그는 나에게 시선을 맞췄다. 흔들리는 그의 붉은 눈동자는 빛을 더했꼬, 곤란한 것 같기도 하며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샤일록: 현자님, 이 메모를 쓴 인물에게 짚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짚이는 부분?
샤일록: 네. 그립고…… 잘 아는 글씨체예요.
아……. 설마…….
샤일록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샤일록: 무르의 필적입니다.
클로에: 무르!? 혹시 영혼의 조각의…….
나는 다시 한 번 연구 일지를 들여다보았다. 지금의 무르가 가끔 쓰는 글씨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연구원 할아버지: 그 위대한 천재 학자 무르!? 이게 무슨 일인지! 글씨체를 본 적이 있어! 하트 박사의 망령이 이 식물원에 방문했다니,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분명 우리의 꾸준한 연구를 칭찬해주고 계시는 거겠지! 아아, 한 번 만나뵙고 싶어……!
놀라는 우리 옆에서 연구원 할아버지가 일지를 안고 빙글빙글 회전했다. 수수께끼의 글에 키스까지 할 기세였다. 옛날의 무르의 인기에 감탄한다.
클로에: 자, 그럼 이변이라고 하는 것은 이 식물원에 있는 무르의 영혼 조각이 실체화했다는 건가…….
그런 거라면 다 같이 나눠서 무르의 영혼 조각을 찾아봐요. 다행이네요, 샤일록. 또 하나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샤일록은 친구인 무르의 영혼을 되돌리기 위해 흩날린 영혼의 조각을 찾고 있다. 그는 우아하게 인사해 보였다.
샤일록: 감사합니다, 현자님.
연구원 분들도 괜찮으시다면 협력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연구원 할아버지: 하트 박사님을 만나뵐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클로에: 으음……. 이 정도 크기의 예쁜 보라색 조각을 찾아줬으면 좋겠어. 아니면 보라색 머리의 성인 남성.
연구원 할아버지: 보라색 조각이나 성인 남성…….
클로에: 맞아 맞아. 꼬옥 웃는 느낌의. 야옹이라고 하는 분은 진짜야.
연구원 할아버지: 진짜가 야옹.
그때, 커다란 나뭇가지가 웅성거렸다. 우리 머리 위에 있는 초록잎 그늘. 그 위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 사람 그림자는 날개를 펴고 있었다.
……저건……!?
???: 아하하하! 무슨 진품을 찾고 있다고? 어리석은 인간들!
날개를 가진 인물은 크게 웃었다. 날개 달린 인간은 처음 봐. 마법사? 마물인가?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곁눈질하며 연구원 할아버지가 어깨를 움츠린다.
연구원 할아버지: 저 녀석이 켈빈입니다. 날개는 그냥 가장이에요. 저 녀석은 이상한 모습을 해서 놀래킵니다. 저번 달에는 하반신이 구렁이가 되어 있었어요.
클로에: 카인이 보면 졸도할 것 같네…….
켈빈: 아하하하! 어리석은 것들!
연구원 할아버지: 켈빈, 그만두게나. 현자님과 서쪽의 마법사들이다. 마법사는 너의 동료잖아?
켈빈: 서쪽의 마법사……?
연구원 할아버지: 그렇다. 여기 내려와서 얘기를 하는 게?
나무 위의 사람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바람이 불고 잎이 흔들린다. 계속 올려다본 목이 조금 피곤하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나뭇잎을 흩뿌리고 사람의 그림자가 눈앞에 내려왔다.
……!
사크리피키움: ……!
그레고리: 갑자기 뭐야! 위협하지 마!
샤일록: 현자님!
괘, 괜찮아요!
눈앞에 나타난 것은 커다란 날개를 가지고 있는 소년이었다. 갈색 곱슬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하고 있다. 목에는 이상한 모양의 팜플루트를 매달고 있었다.
켈빈: 현자님이라고?
켈빈이라 불리는 소년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눈꼬리에 주름을 잡고 나에게 웃었다. 그렇게 웃으면 그는 조심성이 많은 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갑자기 클로에가 소리를 냈다.
클로에: ……아…….
입가에 손을 얹고 크로에는 뒷걸음질쳤다. 켈빈을 응시하는 동색 눈동자가 충격에 휘둥그레진다. 켈빈도 클로에를 바라보고 숨을 삼켰다. 둘 다 두려워하면서 외친다.
클로에: 라스티카의……!
켈빈: 라스티카의……!
(라스티카?)
켈빈은 당황해서 큰 나무를 뛰어오르듯 도망쳤다. 날개를 펴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클로에: 잠깐……!
그레고리: 맡겨줘! 쫓아간다!
화악하며 극채색 날개를 펴고 그레고리가 하늘을 날아간다. 샤일록이 클로에에게 달려와 그의 등에 닿았다.
샤일록: 왜 그러나요? 클로에. 그와 아는 사이인가요?
클로에: ……아……. 으, 응…….
클로에의 목이 멘다. 배려하는 듯이 샤일록은 눈을 내려깔았다.
샤일록: 말하기 싫다면 이야기 하지 않아도 돼요.
클로에: ……아니야! 괜찮아……. 놀라버려서…….
연구원 할아버지: 북새통이 터지겠네요. 저는 먼저 연구실로 돌아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식물들의 설명, 또 자세히 들려주세요.
연구원 할아버지: 부디. 현자님.
연구원 할아버지는 연구일지를 소중히 안고 떠나갔다.
7화 듣지 못한 물음
클로에는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누른 채 나를 쳐다보았다.
클로에: 현자님……. 현자님에게는 전에 이야기했었지. 라스티카가 찾고 있는 신부에 대해서.
……아…….
골똘히 생각한 클로에의 눈빛에 나는 지난 날의 일이 생각났다. 클로에나 라스티카와 함께 지내며 친애를 거듭해 갈 무렵에…… 클로에가 털어놓은 라스티카의 신부에 대한 비밀. 샤일록을 돌아보며 클로에는 똑바로 전했다.
클로에: 샤일록. 라스티카에는 말하지 말아줘. 라스티카와 여행을 하다가 어느 거리에서 아까의 마법사…… 켈빈을 만난 적이 있어. 그때 켈빈에서 라스티카의 신부에 대해 조금 이야기를 들은 거야.
샤일록: 라스티카의 신부에 대해서…….
클로에: ……응…….
어느새 하늘에 붉은 빛이 더해가고 있었다. 무수한 초록잎과 형형색색의 꽃들과 햇살이 부드럽게 감싸안는다.
클로에: 라스티카의 여행의 목적은 헤어진 신부를 찾는 것. 나와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 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많이 있었어. 어째서 열심히 찾는 신부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어째서 신부라고 착각한 상대를 껴안거나 하는 것이 아닌…… 새로 변신시켜서 새장에 넣으려고 하는 걸까?
클로에: 하지만 물어볼 수 없었어……. 이상한 걸 물어봐서 라스티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어. ……아니……. ……그건 거짓말이야……. 그것 뿐만이 아니야…….
클로에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애틋하게 눈썹을 숙이고 힘없이 웃는다. 그 미소는 눈물보다 슬펐다.
클로에: 내 행복을 끝내고 싶지 않았어. 나는 라스티카가 상냥한 채로 변하지 않아주는 것이 제일 좋았어……. 신부에 대해서는 뭐든 좋았어. 라스티카와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면 못 찾아도 돼. 친구같은 얼굴로…… 라스티카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신부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어. 너무하지, 나…….
약하게 일그러진 클로에의 뺨을 온화하고 부드러운 석양이 장밋빛으로 물들인다. 눈물을 참아 촉촉해진 눈동자가 작게 빛을 반사한다. 죄인처럼 참회하는 그는 애처롭고 아름다웠다.
클로에: 아까 켈빈, 라스티카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라스티카를 아는 사람 같았어. 처음 만난 것처럼 라스티카에게 인사하고……. 라스티카가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나를 불러서 말한 거야.
클로에: 아직도 신부를 찾고 있나? 그 사람의 신부는 이미 죽었다고.
라스티카: …….
코르테제 성의 집사: 어떤가요?
라스티카: 응. 이쪽도 문제 없습니다.
코르테제 성의 집사: 아아, 다행입니다.
라스티카: 깊이 있는 깨끗한 소리군요. 이처럼 아름다운 노을의 한 때에 제격이다. 잠깐 연주해도 될까요?
코르테제 성의 집사: 네, 그럼요.
라스티카: 감사합니다. 그러면 듣고 있어줘, 클로에.
라스티카: 클로에? ……아아, 맞다. 왕립 식물원에 갔지. 그러면 고즈넉한 밤을 맞이하는 이 시간에, 누군가의 곁에 편안한 음악이 닿기를…….
릴리아나: …….
질: 옆에 계시는데 말은 걸지 않으실 건가요?
릴리아나: ……됐어.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릴리아나: ……라스티카 님…….
릴리아나: 아…….
무르: 라스티카!
라스티카: 무르.
무르: 저녁 음색이 들렸어~!
라스티카: 저녁 음색인 줄 알았니? 나도 그럴 생각으로 연주하고 있었어.
무르: 들렸어!
라스티카: 기뻐! 그런데 왕립 식물원에 간 거 아니었니?
무르: 라스티카가 보고 싶어서 돌아왔어!
라스티카: 몰랐네. 무르가 그렇게 나를 생각해주다니……. ……! 혹시, 나의 신부…….
무르: '에아뉴 랑블!'
라스티카: 와아, 불꽃놀이다.
무르: 불꽃놀이 좋아~!
라스티카: 예쁘네.
무르: 예뻐!
릴리아나: ……잘도 방해를…….
질: 릴리아나 님.
릴리아나: ……질.
질: 네.
릴리아나: 전의 그것은 오즈도…… 돌로 만들 수 있나?
질: 네. 계산상 가능하다고 박사님이.
릴리아나: 그래…….
릴리아나: ……그렇다면 나도 각오를 해야겠군. 전부 손에 넣어보이겠어. 북쪽 나라도, 중앙 나라도, 동쪽 나라도. 현자도, 현자의 마법사도.
릴리아나: 이 속죄를 위해서.
켈빈: ……하아……. 하아……!
그레고리: 기다려……!
켈빈: …….아……! 팜플루트가……!
그레고리: 이런……! 내가 생각해도대단하군! 발로 잡았어!
켈빈: ……!
그레고리: 어이, 이 녀석! 도망가지 마! 이 팜플루트를 남기고 가는 거냐!? 어이……!
그레고리: ……가버렸다…….
샤일록: 라스티카가 찾고 있던 신부는 이미 사망했다…….
클로에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 나, 라스티카에게 말하지 못했어. 그 사람도 라스티카에게 말하지 못해서 나에게 이야기한 것 같아.
클로에: 아아, 나……. 그 사람을 제일 먼저 쫓아갔어야 했어! 라스티카에 대해 알기 위해서. 나, 라스티카에 대해 뭐든지 아는 척만 하고 아무것도 몰라……. 라스티카는 금방 잊어버려. 신부 뿐만이 아니라 나와의 일도…….
클로에: 잊지 않았으면 하는데, 어째서 금방 잊어버리는지도 라스티카에게 물어볼 수 없어…….
약하게 어깨를 밀며 클로에는 손등으로 코끝을 눌렀다.
8화 제비꽃빛 결의
클로에: ……그것이 상냥함이라고 생각했어. 함께 있기 위한 배려라고……. 라스티카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은 절대 물어보지 않아. 착하게 있을 테니까 옆에 있어줬으면 해. 하지만 지금은 상냥한 건지 잘 모르겠어. 교활함일지도 몰라. 왜냐하면…… 계속 라스티카 옆에 있었던 건 누구도 아닌 나니까.
클로에: 라스티카를 좋아하고 라스티카를 돕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설령 미움을 받더라도 내가 움직였어야 했어……. 그레고리보다 먼저 내가 쫓아갔어야 했는데. ……할 수 없었어……. 사실을 아는 것이 무서워서……. 겁이 많고 자기 일만 하고 교활하고 즐거운 것 이외에는 마주보는 것을 피하기만 하고…….
목구멍을 떨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클로에는 눈을 부릅떴다. 울어버리는 것조차 치사한 짓이라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 기분이 든 적이, 나도 있다. 그에게 어떤 말을 전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샤일록이 앞으로 나섰다. 부드럽게 클로에를 껴안는다. 클로에는 봇물 터지듯 샤일록에 매달려서 오열에 등을 떨었다.
클로에: ……윽, 샤일록…….
샤일록: 이 세계에 있는 어떤 것보다 진실은 무서운 것입니다. 무서워하는 것도 당연하죠. 무리하게 짐을 질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답게 마음의 소리를 따르면 됩니다.
샤일록: 만약에 당신 마음의 목소리가 상처받았다고 해도 무서워도 진실을 잡으려면…… 공포를 즐기도록 하죠. 운명을 이겨냅시다.
클로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샤일록은 매력적으로 미소지었다. 놀란 듯이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샤일록: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아도 그걸 시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똑바로 마주보는 거예요. 당신에게 상처를 주는 진실의 칼날이 어느 정도의 것인지 간파하는 겁니다. 이건 당신의 이야기니까요. 당신을 흔들 운명이란 당신의 영혼을 물들이는 세공에 불과해.
샤일록: 당신을 위협하는 운명 따위, 당신의 열정에 비하면 분명 별 거 아닐 겁니다.
클로에: 샤일록…….
샤일록: 서쪽의 마법사 클로에. 부디 영혼이 타오르는 쪽을 선택해 주세요. 영혼이 얼어붙는 선택은 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의 빛을 잃지 않기 위해서, 저는 어떤 도움도 아끼지 않을 테니까요.
클로에: ……윽. 고마워, 샤일록……!
저도…… 저도예요, 클로에. 클로에를 교활하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제가 클로에의 입장이었다면 분명 똑같이 고민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저도 도와드릴게요. 자기를 나쁘게 말하지 말아주세요.
붉게 물든 눈꺼풀로 클로에가 운다. 슬픈 노을을 튕겨내듯 그는 힘차게 고개를 들었다.
클로에: 고마워. 현자님, 샤일록……. 나, 어떤 운명이라도 타볼게. 라스티카의 운명에서 라스티카를 지켜보일게. 나의 스승님이고 나의 은인이니까. 절대로, 두 번 다시 나를 잊게 하지 않을 거야.
켈빈의 팜플루트를 가지고 그레고리가 돌아왔다. 우리는 일단 코르테제 성으로 돌아와 밤을 기다렸다가 왕립 식물원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쪽이 켈빈과도, 망령이라고 불리는 영혼 조각의 무르와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서쪽 나라의 마법 과학 병단 본부로 가기로 했는데, 들르는 길이 길어졌네……. 마법 과학 병단 본부로 향한 중앙의 마법사들은 괜찮을까. 노바의 단서를 무사히 찾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리케: 여기가 서쪽 나라의 마법 과학 병단 본부……. 니콜라스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거죠.
오즈: 아아.
리케: 카인이 여기서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기다리기만 하니 지루하네요. 오즈, 알고 있나요? 마법 과학은 마나석을 원동력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구조예요. 무르가 발명한 것이라고 들었어요. 샤일록은 별로 마법 과학을 좋아하지 않는대요.
리케: 오즈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마법 과학은 좋아하나요? 싫어하나요?
오즈: …….
리케: 듣고 있나요?
오즈: 듣고 있다.
리케: 맞다. 탑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것도 마법 과학 기술 장치래요. 저는 엘리베이터를 좋아해요. 마법 과학으로 어떤 것까지 할 수 있을까요? 마법 과학으로 토네이도를 부를 수 있나요? 과학은 발전하는 것이라고 들었어요. 언젠가 마법 과학이발전하면 오즈보다 강해지기도 할까요?
오즈: …….
리케: 답을 해주세요.
오즈: ……이 세상에 내 위는 없다.
리케: 오즈가 최고란 말인가요? 후후. 그 말투, 멋있네요. 따라해도 될까요?
오즈: ……아아.
리케: 어떤 질문의 답에 아아, 라고 한 건가요?
오즈: 전부.
리케: 적당히!
오즈: 적당하지 않다.
카인: 미안. 기다리게 했네.
리케: 카인! 어땠나요? 니콜라스를 아는 분은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나요?
카인: 서쪽 나라의 장군에 대해서. 지금은 어디 외출했나 봐. 돌아오는 건 밤이나 내일이 될 것 같다고 하네.
리케: 밤이나 내일…….
오즈: 일몰이 되면 나는…….
카인: 쉿, 오즈. 어디서 누가 듣고 있는지 몰라. 너의 그것은 가장 중요한 기밀이야.
오즈: …….
카인: 마법 과학 병단 본부에 얼굴을 내밀어 안 것이지만, 상당히 중앙 나라를 경계하고 있어.
리케: 어째서죠?
카인: 이유는 여러가지지만, 첫번째는 이 녀석이야.
오즈: 삿대질 하지 마라.
카인: 세계 최강의 마법사가 중앙 마법사를 자칭하고 중앙 나라를 따르고 있다. 서쪽 나라는 너에게 겁을 먹고 있어. 당신의 상처…… 밤이 되면 생기는 일에 대해 알면 뭘 할지 몰라.
오즈: …….
9화 마법 과학 병단 본부에서
리케: 걱정할 필요 없어요, 오즈. 저희가 지켜드릴 테니까요.
오즈: 필요 없다.
리케: 하? 필요하잖아요.
오즈: 나는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않는다.
리케: 그런가요? 그렇지만 밤에는 그거잖아요?
오즈: 그렇더라도 말이다.
리케: ……? 즉, 뭔가요? 그런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고집을 부린 대답이란 말인가요?
오즈: ……너는 피가로와 닮았군.
리케: 제가요?
오즈: 무슨 말을 해도 대꾸하는 게 비슷해.
리케: 미틸의 선생님과 닮았다니 콧대가 높아지네요. 의술의 마음가짐이 있는 것도 훌륭하고요.
카인: 슬슬 내 말 좀 들어줄래?
리케: 네.
오즈: 아아.
카인: 서쪽 나라의 군 본부가 숙소를 마련해준대.
오즈: 마법관으로 돌아가면 돼. 내일 다시 데려오면 된다.
카인: 그러고 싶지만 아무래도 핑계를 대는 것 같아.
리케: 드물게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네요. 불쾌한 대응을 받았나요?
카인: 뭐, 그렇지.
리케: 무슨 말을 들었나요.
카인: 됐어. 얘기할 정도는 아니야. 아무튼 너희들은 먼저 마법관으로 돌아가줘.
리케: 저는 카인과 같이 있을게요.
카인: 리케.
리케: 그런 얼굴의 카인을 혼자 둘 수는 없어요. 혼자 상대하면 나쁜 일이 생겨도 두 사람은 상대하기 힘들겠죠. 오즈는 돌아가세요. 발에 걸려요.
오즈: 나를 지키겠다고 하지 않았나?
리케: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오즈: ……나도 남겠다.
리케: 마음대로 하세요.
카인: 어이어이…….
리케: 괜찮아요.
오즈: 괜찮다.
카인: 정말일까. 부탁할게…….
카인: ……아서를 데려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서쪽 나라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지? 동쪽의 마법사들은 길드에 도착했을지…….
실웨스: ……샤일록……. 중앙의 마법사들만 보내고, 그는 이 거리에 오지 않는 걸까……. 샤일록이 오면 상담하려고 했던 일이 있었는데…….
서쪽의 마법사: ……실웨스……! 큰일이야! 또 한 명 사라졌어……! 풍요의 거리의 뒷골목에서 반한약의 비약을 팔고 있던 도로테아가 가게와 통째로 행방불명이…….
실웨스: ……또……!? 이게 몇 번쨰야……!? 이 거리의 마법사들이 차례차례 행방불명이 되고 있어……. 그냥 실종? 유괴? 아니면…… 살해당해서 돌이 된 걸까……. 우리는 시체도 남지 않으니까…….
실웨스: ……그렇다고 해도, 도대체 누가…….
히스클리프: ……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 선생님들, 아직인가.
히스클리프: ……. 이 가게에 장식된거, 엄청 정교한 오토마타네. 어느 공방의 어떤 장인이 만들고 있는 걸까…….
???: …….
히스클리프: 아, 죄송합니다.
???: 아냐.
히스클리프: (부딪힐 뻔해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버렸다……. 비오는 거리는 법이 많으니까. 여기는 어학 금지 공공 구역일 수도 있어. 공무원에게 통보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 …….
히스클리프: (그건 그렇고 꽤 화려한 사람이네. 서쪽 나라에서 왔나……?)
???: 꽤 정교한 오토마타군.
히스클리프: 아……. 그, 그렇네요.
히스클리프: (……답해버렸어…….)
???: 기계를 좋아하나?
히스클리프: 아……. 네……. 정교한 세공이나 장치를 보는 것을 좋아하고, 시계나 오토마타를 좋아해요.
???: 그렇군.
히스클리프: ……당신은 장인인가요?
???: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히스클리프: 왠지 모르게…….
히스클리프: (일반인이 아닌 것 같아……. 외향이 화려하다고 해서 편견일까…….)
???: 글쎄……. 내 작품을 너에게 보여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히스클리프: 아……. 이 근처에 전시된다는 건가요?
???: 그런 것이다. 기대하고 기다리는게 좋아.
시노: 히스!
히스클리프: 아…… 죄송해요. 친구가 불러서요.
???: 그렇군.
히스클리프: 실례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히스.
히스클리프: 에?
???: 그렇게 불렸으니까.
파우스트: …….
시노: 파우스트. 네로.
네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혹시나 해서 이것저것 사왔어.
시노: 먹을 거야?
네로: 수호 주구 같은 거.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조심해야지.
파우스트: 히스는 어디에 있었나?
히스클리프: 아……. 여행자가 말을 걸어서요.
네로: 여행자?
히스클리프: 아마도……. 비오는 거리의 사람 같지 않았어. 편견일 수도 있지만.
시노: 뭐, 여행자가 히스를 만나면 말을 걸고 싶어지는 기분은 알아.
파우스트: ……? 여행자? 마법사인가? 아니면 현자가…….
히스클리프: 마법사였나? 잘 모르겠어요.
파우스트: 읽기 어려운 기색이다. 정체를 감추고 여행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시노: 어제까지 너와 똑같았던 히키코모리일지도 몰라, 파우스트.
히스클리프: 그건 아니지 않을까.
시노: 어째서.
히스클리프: 으음……. 꽤 화려했어.
파우스트 / 시노 / 네로: …….
시노: 서쪽의 마법사군.
파우스트: 서쪽 마법사일지도 모르겠네.
네로: 서쪽 녀석이겠지.
파우스트: ……자. 다 모였으니 마법사 길드로 가자. 지금은 여관이 되어 있다고 해. 단서 같은 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파우스트: 시노.
시노: 뭐야.
파우스트: 내 지시에 따라. 앞서가면 마법으로 재우고 메고 다닐 테니까.
시노: 알고 있어. 하지만 네가 너무 소심할 때는 내 판단에 따라 움직일 거야. 괜찮지.
파우스트: 괜찮을 리가 없잖아. 네 판단으로 행동하지 마.
시노: 하지만…….
파우스트: 때가 되면 반드시 공을 세울 기회를 줄게. 착하게 있어.
시노: ……알았어.
10화 파우스트의 서
X월 X일. 동쪽 나라, 비오는 거리. 흐리고 가끔 비. 총원 이상 없음. 달을 소환한 마법사 노바의 단서를 찾기 위해 마법사 길드 흔적 조사. 이날 중앙과 서쪽의 마법사는 서쪽 나라의 풍요의 거리로. 남쪽 마법사는 중앙 나라의 수도로 출립. 북쪽 마법사의 행선지는 불명. 현자는 중앙과 서쪽 마법사와 동행. 오즈가 함께 있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출발 전에 레녹스를 만났다.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피가로를 부탁한다고. 그런 전언을 맡기면 민첩한 레녹스는 피가로의 용태를 알아채겠지.
파우스트: 다녀올게.
레녹스: 조심하세요.
파우스트: 너도.
레녹스: 저는 괜찮습니다. 오늘은 중앙 거리로 가기만 하면 되니까요.
레녹스의 온화하고 성실한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옛날처럼 믿고 싶어진다. 그에게 숨기는 일은 없었다. 숨길 수 없었으니까 그를 두고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생의 이야기 따위는 당사자 이외가 해서는 안 된다. 피가로도 나 말고는 말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그뿐 만이 아니다. 원래부터 나는 남의 마음을 모르겠어. 아니면 친한 친구라고 믿었던 남자에게 화형을 당하거나 하지 않았겠지.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과묵하고 경건한 그에게 죽기 직전에 이렇게 통보받았다. 파우스트, 너는 불행하다. 불행할 때 사람은 사람을 저주하는 법. 하지만 너는 불행의 밑바닥에 있어도 행복한 인간을 축복해라. 강하고 상냥한 아름다운 마음을 가져라. 그것이 마법사로 태어나 아버지에게까지 버림받은 네 목숨에 가치를 낳을 것이다. 얼어 지는 밤에도 벽난로에 있는 사람들의 행복을 축복할 수 있게 되어라.
할아버지가 돌아가셔도 그 가르침을 잊은 적은 없었다. 나는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집을 나가셨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다. 마법사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면 그들의 생활을 지탱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친구에게도 축복받았다. 훌륭한 스승도 만났다. 나는 행복했다. 피가로, 알렉. 믿음을 가지면서 보낸 시간도 있었지만…… 피가로에게는 버려지고 알렉에게는 의심을 사 배신당했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아마도 원인은 나에게 있을 것이다. 곁에 두고 싶지 않아. 믿을 수 없는, 무언가가. 그래도 나는 내 나름대로의 신념을 품고 성실함을 관철하여 온 힘을 다해 마주봤다. 다른 삶의 방식은 할 수 없다.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그들의 행복을 빌려고 했다. 나는 자업자득이고 불행의 밑바닥에 있다. 그래도 어디선가, 그들이 행복하기를. 그렇게 기도하려고 했는데……
맹렬히 화가 났다. 웃기지마. 할 수 있을까보냐. 알까보냐. 세상이 나를 거부했듯이 나도 이 세상을 거부할 거다. 국가는 썩었고, 신앙도 썩었고, 민중도 썩었고, 푸른 하늘도 썩었다.
파우스트: …….
파우스트: (후우……. 푸른 하늘에는 죄가 없지. 화풀이했어…….)
하지만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현자는 나를 믿는다고 말해주었다. 그 마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다.
파우스트: 여기인가…….
네로: 아아. 일단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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