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파우스트: 꽃을 보고 싶었던 거라면 오즈가 마법으로 직접 데려다줄 수 있지 않나?
오즈: 공간 이동의 마법은 금지되었다. 나와 같은 이름의 꽃이기에 제 손으로 찾고 싶다면서.
무르: 아서다운 요망이네! 중앙의 마법사는 모험심이 넘쳐. 단락적인 쾌락보다는 수반되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에 가치를 찾고 있으니까!
오즈: 덕분에 힘들었다. 여러 번 들판에 내려 붉은 꽃을 발견할 때마다 도감을 펼치고, 낙담하고…….
시노: 마물과는 만나지 않았나? 노숙도 했겠지.
오즈: ……공간 이동 이외의 마법은 금지되어 있지 않았다.
(즉, 마법으로 몰래 가드하고 있었구나…….)
오즈: 이윽고 들판에 내린 수가 양손 손가락으로 부족한 수가 되었을 무렵에야 아서는 그 꽃을 발견했다. 벌써 몇 번이나 도감을 봐서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겠지. 빗자루를 내리는 순간 쏜살같이 달려갔다.
말하는 오즈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드러웠다. 그것이 그에게 행복한 추억이었던 것을 증명하는 것첢 들려 가슴이 따뜻해진다.
아서, 무척 기뻐했겠네요. 기쁜 듯이 웃는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아요.
오즈: 보물을 발견한 듯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나에게는 독한 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아서는 크고 강해 보이고 예쁜 꽃이라고…….
말하던 오즈의 미간에 약간 주름이 잡혔다.
오즈……?
붉은 눈동자가 숲속을 향한다. 다른 마법사들도 경계하는 눈빛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무르: 뭐가 오고 있네!
그러자 날갯짓 소리를 내며 몇 개의 큰 새의 그림자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시노: 매인가!?
파우스트: 아니야. 이 녀석들도 언데드다!
나타난 새의 떼들은 핏발이 선 눈을 하며 힘차게 날카로운 발톱으로 이쪽을 향해온다.
오즈: '복스노크'
오즈가 숲에 섬광을 발했다. 눈부신 빛에 튕겨져 새들이 털썩거리며 맥없이 떨어진다.
무르: 대단해! 저만한 무리를 일격에!
시노: 개에 이어 이번에는 매 언데드인가. 마치 죽음의 숲이군.
파우스트: 아까 들개보다 더 공격적이었어. 명확한 의사를 가지고 우리를 노리고 있던 것처럼……. 숲에 숨어 있는 무언가가 더 이상 다가오기를 거부하고 있는 건가?
이어지던 길은 어느새 오즈로 좁혀지고 있다. 눈앞의 나무들의 끝은 먹물을 흘린 것처럼 깊은 어둠에 싸여져 있다. 햇빛도 사람의 눈도 닿지 않는 숲 속 깊은 곳에는 오즈가 어디까지 펼쳐져 있을까.
섬뜩한 어둠이네요. 왠지 몸채로 삼켜져버릴 것 같아…….
무르: 여기서부터는 사람이 거의 안 들어오나 봐. 정령의 기운이 강해.
파우스트: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정령인가…….
오즈: 그것만 알면 충분해. 돌아간다.
오즈는 어둠 속을 한 번 쳐다보더니 이내 발길을 돌려버린다.
시노: 뭐, 어차피 돌격할 거니까.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같이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그러자 시노가 오즈의 등에 말을 걸었다.
시노: 그건 그렇고 네가 선뜻 부탁을 들어주다니. 여기에 피어있는 것이 아서와의 추억의 꽃이라서 그런 건가?
오즈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걷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돌린다.
오즈: 꽃들은 전부 똑같다. 하지만 그 달이 관련되어 있다면 머지않아 우리가 떠나게 될지도 몰라. 귀찮은 싹을 일찍이 잘라놓을 뿐이다.
앞을 바라보는 오즈가 어떻게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한 건지 모르겠다. 분명 평소와 같을 거야. 아무것도 동요하지 않는 조용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즈는 아마…….)
제시카: 저…….
문득 가냘픈 목소리가 닿는다. 보니 길 끝에 익숙한 모습이 있었다.
제시카 씨? 어째서 여기에…….
시노: 집에서 쉬고 있는 게 아니었나?
제시카: 미안해요. 어떻게든 당신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무르: 부탁? 이반 몰래?
그 이반에 대한 것인데…….
할 말을 찾듯 시선을 망설이는 제시카 씨가 숨을 쉬었다. 그리고 똑바로 우리를 발본다. 희미한 구석의 눈매는 덧없지만 눈동자 속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져 있었다.
제시카: 오늘 밤 의식, 분명 그 아이도 같이 오고 싶다고 할 거야.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그 아이를 숲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 줘.
그건…… 위험하기 때문인가요? 이반 씨의 상태도 별로 좋아보이지 않았거든요.
제시카: 그것도 그렇지만, 그것 뿐만이 아니야……. ……당신들에게 이야기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가 있어.
제시카: 아, 이반! 또 '오즈' 의 꿀을 빨아먹고……! 그 꽃은 예쁘지만 독이 있다고.
이반: 출출해서 그래. 게다가 독이 있는 건 뿌리 뿐이지, 꿀은 무해하니까 괜찮잖아.
제시카: 정말이지……. 오즈 님에게 앙갚음을 당해서 제물이 되어도 모르니까.
이반: 그런 건 미신이잖아? 오래된 옛날 이야기야. 게다가 오늘 밤은 '거대한 재앙' 오는 날이야. 올해도 큰 피해는 없을 것 같지만 밤에는 집에서 나가면 안 되고. 만약에 무슨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서 좋아하는 것을 먹어둬야지.
제시카: 그래. 그러면 간식인 꿀 쿠키는 나 혼자 먹어야지.
이반: 에, 기다려. 나도 먹고 싶어! 제시카, 제시카도 참!
이반: ……으응……. ……아, 어라……?
이반: (일어나려고 했는데, 어느새 잠들어 버렸구나……. 슬슬 날이 밝아질 거야……. 모두는 숲에 들어가 있을 무렵인가.)
이반: ……제시카…….
한밤 중을 넘어 새벽에 가까워지는 시점. 우리는 제시카 씨와 함께 숲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꿈에서 봤다던 것처럼 검은 의상에 몸을 감싸는 제시카를 따라 우리도 단장을 했다. 파우스트가 중심이 되어 의식에 익숙해지도록 준비한 의상들이 숲의 어스름에 흔들리고 있다.
이반 씨……. 납득해 주셔서 다행이에요.
제시카: 응……. 나 혼자였다면 분명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을 거야. 모두가 설득해 준 덕분이야.
시노: 오즈는 따라오고 싶으면 알아서 하라는 느낌이었지만.
레녹스: 하지만 제시카의 말처럼 집에서 기다리는 것이 이반에게 가장 안전할 거야.
히스클리프: 그렇네. 사실을 전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괴롭지만…….
왔던 길을 돌아보며 히스클리프가 목소리를 낮춘다. 그등을 보며 제시카 씨가 고한 사실을 떠올렸다.
제시카: '거대한 재앙' 의 밤에 제물로 정해진 건 내가 아니야. 이반이야.
에……!?
무슨 말이야? 그 녀석은 너를 돕고 싶다며 마법관으로 왔어.
무르: 이반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뜻?
제시카: 아니, 그 아이는 기억을 못 해. 그날 자신의 몸에 일어난 일을…….
가슴 앞에서 손을 잡는 제시카 씨가 조그맣게 입술을 깨물었다. 금지된 책을 풀어주듯 고요한 목소리가 말한다.
제시카: 그날 밤, 큰 달아래서 유혹을 받듯 이반은 숲 속으로 들어갔어. 창문 너머로 눈치채고 황급히 쫓아갔지. 발자국은 숲 속으로 이어져 있었어. 무서웠지만, 그래도 내버려둘 수가 없어서……. 뒤를 쫓은 끝에서 본 건 그 아이가 검은색의 오즈를 꺾는 모습이었어.
제시카: 그래서, 나……. 순간 마법으로 이반의 의식을 빼앗았어. 그래서…….
오즈: 바꾼 건가. 제물이 될 운명을.
오즈는 조용히 물었다. 책망하는 것과는 다른, 자신과 같은 것을 보는 듯한 애처로움을 느끼는 눈빛으로. 제시카 씨는 눈을 내리깔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우스트: ……즉, 너는 스스로 원해서 몸을 대신했다는 건가.
제시카: 응……. 어둠에 호소해 손으로 꺾은 꽃에서 늘어지는 꿀에 입을 대려는 그에게서 기억과 꽃을 빼앗았어. 그리고 쓰러진 그 아이 대신 내가 꿀을 먹었어. 그러면 제물이 되는 건 분명 나고, 그 아이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제시카: ……하지만 내가 건 마법이 그 아이를 괴롭히고 있어. 기억이 혼탁해져서 이반의 정신도 몸도 약해지고 있어. 가끔 두통이 있는 것도 분명 그 때문일 거야. 이반을 감싼 것은 후회하지 않지만……
7화
제시카: ……전부 내가 겁이 많아서 그래. 자기 의지대로 맡은 역할인데.
달빛조차 희미하게 비치는 어둡고 깊은 숲속을 걸으며 제시카 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손에 쥔 랜턴만이 불과 몇 걸음 앞으로 다가온 길과 울음을 터뜨릴 듯 일그러진 그녀의 옆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제시카: 그날 밤부터 연이어 숲에서 이변이 일어나는 가운데 이반은 나를 격려해 주었어. 나도 전갈은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렇다면 숲에서 본 건 대체 뭐야? 꽃의 색도 거무스름하고, 동물들도 이상해지고……. 그리고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혼자 맞서는 것이 무서워져 버려서…….
히스클리프: 제시카…….
밤의 숲이 연주하는 것은 나무들의 웅성거림, 벌레 소리, 새들의 지저귐.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 존재하는 생명을 느낀다. 어둠 속을 혼자서 간다면 아무 소리도 느끼지 않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짐승의 소리나 흙 밟는 소리. 위협이 다가오는 소리만 들려주고 어둠 속으로 뒤어들어오라는 건 너무 가혹한 이야기다.
(주위에서 이변이 가속화될 때마다 제시카 씨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아무리 각오를 다져도 상대방이 믿는 신이라도 몸을 던지는 것은 두려워. 실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라면 더더욱…….)
무심코 할 말을 잃는다. 그러던 중 나지막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오즈: 너는 아직 그 역할을 내던지지 않았다.
오즈였다. 그가 손에 든 랜턴은 오렌지색의 따뜻한 빛을 발하고 있다. 깊고 어두운 숲속에서 그의 모습은 매우 엄격해 보였다. 하지만 그 눈빛은 결코 냉철하지 않았다. 자연조차 마음대로 해버리는, 신과 비슷한 힘을 가진 그의 불타는 불꽃 같은 눈동자가 유유히 제시카 씨를 바라본다.
오즈: 그 몸을 바칠 각오로 네가 빼앗은 역할이다. 후회가 없다면 지금 한 번 내딛을 수도 있지. 너는 마법사다. 망설임을 버리고 진정한 마음을 따라라.
흔들림 없는 힘찬 목소리. 그것은 엄한 울림을 주고 있었지만, 어두운 길을 드러낸다. 마음을 복돋우고 어두운 길을 비추는 빛 같기도 했다.
무르: 오즈, 좋은 말 하네!
시노: 아아. 너도 가끔은 눈치 빠른 말을 하는구나.
리케: 약간 페이스가 느리긴 하지만 저는 오즈의 말을 좋아해요. 힘이 세고 등을 떠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히스클리프: ……오즈 님의 말이 맞아. 제시카, 분명 괜찮을 거야. 액재의 밤부터 오늘까지 혼자 힘냈구나.
제시카 씨는 떨리는 입술을 움켜쥐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즈와의 대화를 지켜보던 아서가 기쁜 듯 반짝이는 눈동자를 깜빡인다. 그리고 그녀에게 상냥하게 웃었다.
아서: 제시카, 나는 네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는 지금도 이렇게 두려움에 지지 않고 마음을 복돋아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맞서려고 하고 있어. 게다가 우리가 곁에 있잖아.
아서: 그러니 함께 나아가자. 마왕이 피는 숲의 안쪽으로.
이윽고 우리는 숲의 가장 안쪽까지 도달했다. 발 밑은 오즈로 가득 차있고 무릎보다 높은 꽃을 헤치며 나아가는 모습은 검은 바다에 잠긴 것 같다.
정말 온통 꽃 뿐이네요. '오즈' 밖에 안 보여…….
레녹스: 확실히. 이 광경은 길거리와는 비교가 안 되는군요.
리케: 게다가 달콤한 꽃향기가 가득 나서……. 마치 다른 세계로 빠져든 것 같아요.
갑자기 오즈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모두가 들고 있던 랜턴의 불이 꺼지고 주위는 깊은 어둠에 휩싸인다.
오즈: 시간이 됐다.
오즈가 그렇게 말하자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아침햇살이 비쳤다. 마치 희미하게 빛나듯, 어렴풋이 꽃밭이 검붉게 어둠 속으로 떠오른다.
히스클리프: 아름다워……. 이야기처럼 환상적이네.
시노: 으스스한 곳이지만 나쁘지 않은 전망이야.
무르: 응! 빛이 꽃에 반사되어 온통 반짝반짝해!
히스클리프: 어라……?
모두가 경치에 눈을 빼앗기는 가운데 히스클리프가 올려다본 끝에서 검은 무언가가 훌쩍 가로질렀다. 그것들은 아침 노을 속에 흔들리면서 아련한 윤곽이 서서히 형태를 만들어 간다.
리케: 사람……? 아니, 빛에 비친 그림자와 비슷해요.
나무 사이로 빠져나가는 새, 발밑을 뛰어다니는 토끼, 그리고 사슴이나 멧돼지 같은 짐승들……. 여러 형태의 검은 그림자들이 꽃밭을 헤매고 있다.
파우스트: ……그림자다. 아마도 주변 숲에 사는 동물이나 마을 사람들의.
무르: 숨 쉬는 기색이 나. 주인의 육체를 떠난 그림자만이 이곳에 불려지는 것 같아.
그림자만이……?
그것은 이상하고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워. 공포를 느끼면서도 비치는 빛 속에서 흔들흔들 흔들리는 그림자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시노: 그림자만 방황하고 몸은 어딘가에 두고 있다는 건가? 그렇게 돼서 괜찮은 거냐고.
오즈: 지금은 아직 일시적으로 육체를 떠나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림자는 그자의 반신. 떨어져 있는 채라면 이대로는 심신이 위험하다.
그때, 옆에서 경치를 바라보았을 터인 제시카 씨가 한 걸음 내디뎠다.
제시카 씨……?
허망한 눈으로 마치 유혹을 받듯 검은 의상을 바람에 휘날리며 꽃밭의 중심으로 나아간다.
파우스트: 우리도 제시카를 따라가자. 오즈, 현자를 부탁해도 되겠나?
오즈: 아아. 현자, 이쪽으로.
네……. 저기, 제시카 씨는 괜찮을까요? 왠지 상태가 이상한 것 같은데…….
파우스트: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는 섣부리 움직이는 것이 위험해. 그림자에 섞여 상황을 지켜보자.
제시카 씨에 이어 마법사들도 검은 의상으로 어둠을 헤치며 그림자들 속에 섞였다.
제시카: …….
꽃밭 한가운데 제시카의 검은 머리가 덧없이 바람에 흩날린다. 그런 그녀의 손을 잡은 것은 아직 어려 보이는 아이의 그림자였다. 그 그림자에 이끌리듯 제시카 씨가 한 두 걸음 춤추는 듯한 스텝을 밟는다. 옅게 떠오르는 검붉은 바닷속,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그림자들을 따라 마법사들이 의상을 펄럭였다.
살랑살랑 펄럭이는 천, 나긋나긋 춤추는 손발. 아름답고 요염한 움직임은 의식이라는 이름에 걸맞다. 이 기묘한 숲과 하나로 녹아내리듯 모두가 경치에 섞여간다.
오즈: 현자. 몸에 이상은 없나.
아…… 네. 오즈의 마법 덕분에 그 이후로 아무렇지도 않아요.
오즈: 그렇군.
(오즈는 그림자를 피하면서 몸을 흔들기만 하지만 여전히 춤을 추는 것처럼 보여. 나도, 오즈가 손을 잡아주고 있는 덕분에 어떻게든 익숙해지고 있지만…….)
때때로 우리 손발이 스치기도 했다. 닿은 그림자가 안개처럼 흩어지며 빠져나간다. 아침 해살에 비친 그림자들은 한낮에 꾸는 처럼 어딘가 현실서이 없고 요염하게 아름다웠다.
제시카: …….
제시카 씨가 손을 들었다. 그 손가락에 찾아온 것은 조금 꼬리가 긴 작은 새의 그림자다. 제시카 씨가 그림자에 입술을 기댄다. 그러더니…….
히스클리프: ……뭐, 야. 지금 소리…….
시노: 뭐가 떨어졌네. 저 나무에서.
레녹스: 내가 보고 올게.
무르: 나도 갈게~!
꽃을 헤치고 그림자를 피하면서 레녹스와 무르가 몸을 굽힌다. 레녹스가 손바닥에 얹은 작은 새는 그림자가 없었다.
히스클리프: 움직이지 않네. 죽은 걸까…….
무르: 아니, 심장은 뛰고 있어. 클로에가 잘하는 가사의 마법을 걸었을 때와 같아!
레녹스: 이 긴 꼬리……. 아까 제시카가 입술을 붙인 새의 그림자를 닮지 않았나?
히스클리프: 그건 설마……!?
모두의 시선이 제시카 씨에게 쏠린다. 그녀는 긴 치마를 휘날리는 여성스러운 그림자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잡은 손을 끌어당겨 그대로 손등에 키스를 한다.
히스클리프 / 시노 / 레녹스: ……!
리케: 그림자가 숲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아서: 녹아 내리듯이 사라졌다……?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숲 속을 내다보는 가운데 파우스트가 흔들리는 그림자 사이를 뚫고 오즈의 곁으로 몸을 기댄다.
파우스트: 역시……. 저 어둠 속에는 이 의식을 관장하는 것이 있어.
오즈: 아아. 제물을 통해 그림자를 들이마시고 그자의 정기를 사로잡고 있다. 그들을 불러모으는 것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정령들.
그때, 뒤에서 꽃을 헤집는 소리가 났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나타난 것은 여기에 있을 리가 없는 소년의 모습.
히스클리프: 이반!?
시노: 저 녀석, 집에서 기다린다고 했으면서……! 몰래 따라왔나?
이쪽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아찔했다. 눈동자는 공허하고 헛소리처럼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이반: ……오즈 님의 인도대로…….
오즈: ……정령에게 끌린 건가.
무르: 아하하! 정령들은 이반을 놓칠 생각이 없었구나. 제시카는 제물로 대체된 것이 아니야. 두 사람은 같은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을 뿐. 욕심 많은 숲은 이반도 제시카도 함께 데려가겠지!
그러던 중, 제시카 씨가 새로운 그림자의 손을 잡았다.
8화
성인 남성보다 조금 작은 실루엣. 긴 목덜미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파랗게 질렸다.
저 그림자, 이반 씨예요……!
파우스트: 기다려, 제시카!
하지만 말을 걸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입술이 닿는 순간 이반 씨의 그림자가 흔들리며 빛에 녹듯 사라져 간다. 이반 씨는 힘이 다한 듯 쓰러졌고 유리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히스클리프: 펜던트가 부서졌어……!
제시카: ……!
문득 제시카 씨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 눈동자가 꽃 속으로 쓰러지는 이반 씨를 붙잡고 크게 뜬다. 그녀는 눈썹을 바짝 들이대고 숲 속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시카: 거짓말쟁이……. 이반에게는 손대지 않겠다고 했잖아……!
통곡 같은 마음의 외침. 그녀의 몸은 분노와 슬픔으로 떨고 있었다.
제시카: 그 아이는 나에게 있어서, 소중한……. 소중한……! 아아아……!
히스클리프: 제시카! 제시카, 진정해. 괜찮아. 그는 지지 않아……. 그렇게 쉽게 끌려가지 않을 거야. 이반을 믿어줘.
제시카: ……믿, 어……?
달려온 히스클리프에게 등을 잡히고 제시카 씨가 가느다란 목소리를 낸다. 훌쩍 고개를 든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는 그림자처럼 검게 가라앉아 있었다.
히스클리프: 제시카……?
시노: 히스, 안 돼!
갑자기 제시카 씨의 몸에서 검은 것이 번진다. 순식간에 가시밭 같은 그림자가 히스클리프의 몸을 묶었고, 커다란 검은 손이 그의 뺨을 감쌌다. 고개를 숙인 제시카 씨의 옆머리가 히스클리프의 뺨에 닿는다. 그때, 그의 그림자가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
히스!
파우스트: '사티르크나도 무르크리도!'
히스클리프: 헉, 아…….
순간, 찢어지는 듯한 파우스트의 주문이 들렸다. 시간이 멈추듯 그녀의 몸이 굳어있다. 힘이 빠지듯이 무너져내린다. 순간적으로 그 몸을 지탱하고 꽃밭에 눕히며 히스클리프는 고개를 들었다.
히스클리프: ……가, 감사합니다. 파우스트 선생님.
시노: 파우스트에게 선수를 뺏겼군. 안심해, 히스. 파우스트가 없어도 네 목숨과 입술의 위기는 내가 지켜줄게.
히스클리프: 이, 입술 쪽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정말…….
파우스트: 여러가지로 늦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상상 이상으로 귀찮은 일이 되었군. 이 자리에 있는 정령은 더 이상 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어. 늘 어둠에 휩싸인 숲에 대한 끝없는 공포와 마왕의 이름이 붙은 꽃에 얽힌 불길한 소문……. 그러한 오랜 경외심을 계속 먹으면서 나쁜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
꽃의 바다가 술렁거렸다. 작은 움직임이 서서히 크게 꽃을 흔들어 간다.
리케: 검은 물결이……. 바람도 없는데 어째서…….
히스클리프: 싫은 느낌이 들어. 귓가에 소곤소곤 무언가가 속삭이는 것 같은…….
오즈: 환청이다. 마음을 어지럽히려고 정령들이 움직이고 있는 거지.
……윽.
술렁이는 꽃의 바다. 숲속의 어둠이 한층 짙어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내 몸을 껴안았다.
오즈: 공포에 휩싸이면 너희들의 그림자도 뽑힐 수 있다. 정신 차려. 여기에는 너의 마법사들이 있다.
네, 네……!
오즈의 차분한 목소리에 어떻게든 기운을 차려 고개를 끄덕였다.
히스클리프: 윽……. '레프세바이브러프 스노스!'
그때 숲속에서 무언가가 흔들리고 히스클리프의 날카로운 주문이 어둠을 깨뜨렸다. 그러나 어둠이 그것을 연주한다. 부서진 장난감 같은 섬뜩한 웃음소리가 어둠에 녹듯 사라졌다.
지금 건…….
오즈: 이제서야 모습을 드러냈군.
파우스트: 아아……. 저것이야말로 '거대한 재앙'의 힘을 얻어 부풀어오른 성품의 끝. 오랫동안 이 숲을 향해 온 공포와 지배심의 상징, 오즈다.
문득 덤불 속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우왓……!?
뒤돌아보는 동시에 눈에 들어온 것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진 늑대 무리다. 눈알을 꿈틀거리며 제정신이 아닌 표정의 그것들이 덤벼든다.
시노: '맛차 스디파스!'
히스클리프: '레프세바이브러프 스노스!'
시노의 큰 낫과 히스클리프의 눈부신 빛이 늑대들을 튕겨낸다. 그것들은 차례차례 꽃밭에 가라앉아 갔지만 습격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서: 토끼에 새, 사슴까지……! 숲속 동물들이 모여들었어.
무르: 모든 동물에서 사취가 나. 전부 언데드야!
파우스트: '사티르크나도 무르크리도!'
레녹스: 핫!
파우스트: 어이 레노. 마법을 써! 그리고 나는 지키지 않아도 돼.
레녹스: 핫……. 죄송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뒤가 가장 움직이기 편해서……. '포세타오 메유바!'
리케: ……이 얼마나 개탄스러운지. 죽고 나서도 상처받은 몸으로 이렇게 본의 아니게 싸우다니.
리케: 하지만 이제 괜찮아요. 제가 바른 곳으로 이끌어 드리겠습니다. '산레티아 에디프!'
아서: '파르녹턴 닉스지오!' 리케, 이쪽으로! 오즈 님과 함께 현자님을 지키자.
가, 감사합니다! 아아, 뒤에서 부엉이가……!
언데드들은 끊임없이 나타났다. 시노의 큰 낫이 여러 마리의 동물들을 한데 묶어 베어낸다.
시노: 언데드는 자연스럽게 생기는 게 아니지. 이 녀석들을 조종하는 것도 '오즈' 인가?
무르: 그렇겠지! 분명 주위 사람들의 공포를 부추기기 위해 덮치게 했을 거야.
무르가 둥둥 허공을 난다. 마치 서커스 광대처럼 호를 그리며 달려드는 새를 피했다.
무르: 마왕 오즈가 사랑했던 꽃을 변색시키고 연약한 작은 동물은 죽음에 쓰러지고 피에 굶주린 짐승들이 마을을 덮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겁을 먹고 이렇게 생각하겠지. '마왕 오즈가 제물을 부르고 있다! 생피를 바치고 이 땅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어둠의 잔치, 발푸르기스의 밤을 열어야 한다.' 고 말이야!
파우스트: 부정적인 생각을 너무 많이 하면 나쁜 것으로 변한다고는 하지만……. 남의 정기까지 먹어 치우다니.
오즈: 아아. 영혼들을 신경 쓸 시간은 없다.
오즈는 마도구를 내놓을 것도 없이 언데드들을 바람으로 걷어찼다. 옅은 빛을 띤 바람이 그의 주위를 흩날린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오즈는 어둠 속에 시선을 던졌다.
오즈: 내가 이 자리의 모든 것을 힘으로 따르게 하겠다.
파우스트: 뭐……!
무르: 역시 오즈. 하는 일이 호쾌해!
파우스트: 그런……. 그렇지 않아도 정령들은 제정신이 아니야. 무리하게 간섭하면 성질을 바꿔버릴 수도 있다. 이 자리에 마땅한 것이 변용되면 토지에 미치는 영향은 헤아릴 수 없어. 숲의 일대는 황폐해져 재기불능이 되고…….
오즈: 혼돈은 저항할 수 없겠지만, 어느 쪽이든 이 땅은 더럽다. 화근을 없애려면 내가 자리를 지배하고 명하겠다. 그게 제일 쉬워.
거침없이 말하는 오즈에게 파우스트는 압도당한 듯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끄덕인다.
파우스트: ……알았어. 그렇다면 적어도 주위에 결계를 치게 해 줘. 정령들의 폭발하는 혼돈을 정화하기 위해. 영향은 남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
오즈: 마음대로 해라. 그러나 곧 아침 해가 떠오른다. 다시 숲이 어둠에 휩싸이면 제물을 통해 빨아들인 그림자들은 어둠과 함께 녹아 내려 앉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파우스트: 아아. 서둘러 상공에 결계를 치고…….
그렇게 말하며 빗자루로 뛰어오르려는 파우스트에 이어 히스클리프도 자신의 빗자루에 올라탔다.
히스클리프: 파우스트 선생님, 저도 가겠습니다! 제시카는 두려움을 참고 여기까지 왔어요. 이반도 위험을 무릅쓰고 마법관을 찾아왔어. 그런 그들이 돌아갈 장소를 잃게 하고 싶지 않아요. 같이 지키게 해주세요!
파우스트: 히스…….
시노: 나도 간다. 주군을 따라가는 것이 종자의 의무니까. 게다가 이대로 아침을 맞아 그들의 보금자리를 빼앗게 된다면 잠자리가 불편해.
아서: 나도 같은 마음이야, 파우스트! 같이 가게 해줘.
리케: 저도요!
레녹스: 다같이 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혼란스러운 정령들의 폭동에 대비한다면 조금이라도 인원이 많은 것이 좋을 거예요.
무르: 마법사가 백 명 있어도 많지 않아! 날아가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무르: 안녕, 현자님! 나중에 보자!
에!? 저, 이 자리에 남아도 괜찮은 건가요?
나도 모르게 한심한 목소리로 묻고 말았다. 숲의 일대를 넘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의 충돌. 뭐니뭐니해도 그 중심지다. 무르는 빗자루로 떠오르면서 내게 쏘아붙였다.
무르: 세계 최강 마법사의 옆이야. 세상 어디보다 안전한게 당연하잖아!
머리 위를 덮는 나무들을 넘어 모두가 빗자루로 하늘로 사라져 간다. 그러자 옆에서 오즈가 주문을 외웠다.
오즈: '복스노크'
와앗……!
천둥이 숲 속을 여러 번 치고 지나간다.
9화
주변에 있던 언데드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꽃밭에 가라앉는다. 그리고 승화되듯 빛의 알갱이가 되어 사라졌다.
오즈: 산 송장은 모두 배제했다. 다음에는 대원을 탕진하지.
오즈는 마도구 지팡이를 한 손에 들고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오즈: 아마도 정령들은 격렬하게 동요하고 저항할 것이다. 마음이 끌리지 않도록 나에게서 떨어지지 말도록.
네, 네!
숲은 조용했다. 나무들의 웅성거림도, 새들의 지저귐도 없이 귀에 따가울 정도의 정적이 섬뜩함을 부추긴다. 문득 올려다보니 강하게 내리쬐던 아침 햇살이 희미해지고 어둠의 장막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숲에 빛이 비친느 것은 아침뿐. 곧 본격적인 아침이 온다.
오즈: 여기까지군.
오즈가 천천히 지팡이를 높이 든다. 그리고 조용히 어둠을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오즈: 이 자리에 둥지를 틀고 있는 사악한 어둠의 정령들이여. 나를 따르라.
오즈: '복스노크'
직후, 엄청난 폭풍이 몰아쳤다.
파우스트: 윽, 전원 준비해!
리케: 우왓!
무르: 엄청난 충격! 찌릿찌릿해!
파우스트: 정신을 놓으면 이쪽이 날아가 버릴 거다. 절대로 마력을 헛되이 쓰지 마! 괜찮아……. 잘 되고 있어. 안 터지게 계속 힘을 쏟는 거야.
아서: 아아, 맡겨줘!
레녹스: 윽……. 이 얼마나 대단한 힘인지……!
히스클리프: ……큭…….
시노: 히스! 괜찮아?
히스클리프: 괜찮아……! 너도 집중해! 만약 이것이 깨지면 생명은 지켜져도 돌아갈 장소가 없어져 버릴지도 몰라. 절대로 힘을 늦추면 안돼……!
우리 주위를 강한 바람이 휘몰아친다. 그 폭풍 속에 있던 나는 무심코 두 손으로 머리를 껴안았다.
(머,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직접 내 안에 울려오는 귀청을 찢는 듯한 비명 소리, 신음, 탄식. 검은 안개가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부정적인 감정이 다가온다. 공포와 불안, 자책과 후회, 자포자기가 되어 모두 내던지고 싶어지는…….
(어라……. 나 왜 여기에 있지? 숲 속으로 유혹하듯 큰 꽃이 흔들리는 이 자리에서 혼자서…….)
(아아, 그렇지. 나는 언제나 누군가의 그림자에 가려져 겁을 먹고 지켜지기만 해. 아무 쓸모도 없는 나는 여기서 몸을 바칠 수밖에 없어. 이대로 깊은 어둠에 휩쓸려 이 숲의 일부가 되어…….)
오즈: 현자.
머리를 움켜쥔 내 손에 오즈의 손바닥이 포개졌다. 그리고 그대로 가슴팍으로 끌어당겨진다. 따뜻한 사람의 감촉에 팽팽하던 손가락이 느슨해진다.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오즈: ……자신을 잃을 정도로 역할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하지만 너는 너다. 현자로서, 너의 마법사인 나를 이끌기 위해 여기에 있지. 어두워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등불은 우리가 갖고 있겠다.
팽팽하던 호흡이 문득 편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린아이에게 말을 거는 듯한 목소리가 계속된다.
오즈: 걱정하지 마라. 나는 여기에 있어.
맞아. 그는 세계 최강의 마법사. 나는 그런 오즈의 옆에 있다. 서서히 바람소리가 진정되고, 이윽고 꽃이 수북거리는 소리도 그쳤을 때…… 머리를 울리는 목소리도 그치고 주위에 정적이 찾아온다. 고개를 들자 아침 해는 뜨고 다시 숲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아…….
어둑어둑한 어둠 속으로 떠오르는 것은 한 면에 한껏 펼쳐진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검고 칙칙했을 꽃 오즈는 싱싱한 빛을 되찾아 어둠 속에서 요염하게 흔들리고 있다.
아서: 오즈 님! 현자님!
아서. 모두들!
리케: 와아……! 대단해! 숲 속이 붉은 빛이에요.
무르: 땅은 죽지 않았어! 어떻게든 살아있네!
파우스트: 아무래도 잘 된 것 같군.
오즈: 아아. 부정에 물들어 있던 정령들도 이제는 얌전히 잠들어 있다.
시노: 위에서 봐도 큰일이었지. 어떻게든 지켜냈지만.
환한 표정을 지으며 모두가 꽃밭으로 내려온다. 나도 웃으면서 그들을 맞았다. 오즈의 꽃밭을 본 마법사들은 후우…… 하며 숨을 쉰다.
아서: 장관이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치인지…….
히스클리프: 네. 끝이 보이지 않는 숲 속까지 젖은 듯 선명한 붉은색이 펼쳐져서…….
레녹스: 공기도 맑네요. 싹트는 초록빛도 생명력이 넘쳐.
무르: 응. 마치 갓 태어난 숲 같아!
빛은 닿지 않고 여전히 숲은 어둡지만 생생하게 피어나는 '오즈' 는 힘차게 어둠 속에서 반짝이고 있다. 자연이 있어야 할 모습을 본 것 같아 나의 마음도 촉촉해지는 것 같다.
히스클리프: 맞다. 이반과 제시카는……!
히스클리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오즈가 조금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오즈: 저기다.
제시카: ……으음…….
이반: 어라, 여기는……. 어째서 내가 이 숲에…….
이반: 그것보다 의식은 어떻게 됐어!? 낡은 밝은…… 거지? 그러면 제시카는 제물이 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제시카: 그런, 걸까. 군데군데 밖에 기억이 나지 않아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지 두 사람은 조금 멍한 채 신기한 듯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무래도 정령들에게 조종당했을 때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히스클리프: ……괜찮아. 숲은 무사히 아침을 맞았고 오즈도 붉은 빛을 되찾았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경치뿐. 너희를 위협하는 건 이제 없어.
이반 / 제시카: ……!
숲에 아침 햇살이 비치듯 두 사람의 눈동자에 빛이 깃들었다. 서서히 그 표정이 기쁨으로 물들어간다. 제시카 씨는 웃으면서 이반 씨의 가슴으로 뛰어들었다.
이반: 와앗……! 잠깐, 제시카!?
제시카: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반: ……응, 그렇지. 잘했어.
문득 이반 씨가 익숙한 움직임으로 가슴팍에 손을 뻗었다. 아마도 펜던트를 만지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반: 아, 어라? 펜던트 장식이 부서졌어! 모처럼 제시카에게 받은 건데…….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이반 씨에게 제시카 씨가 부드럽게 고개를 흔들었다.
제시카: ……괜찮아. 분명 역할을 다했을 테니까.
그것을 보고 히스클리프가 기쁜 듯이 웃었다. 아서도 리케도 레녹스도 눈을 마주치고 미소짓고 있다. 그러던 중 색채를 되찾은 숲을 둘러보며 파우스트가 살짝 입을 열었다.
파우스트: 이반, 제시카. 이 숲은 무서운가?
이반 / 제시카: 에…….
그들은 천천히 눈앞의 숲을 눈동자에 비춘다. 그리고는 얼굴을 마주보고 입을 열었다.
이반: ……여기는 아름다운 숲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계속 징그럽게 느껴졌어. 어둡고, 깊고,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고…….
제시카: 그렇네……. 그리고 '오즈' 의 전설도 있으니까. 숲 근처에 들르기는 해도 깊은 곳까지는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어.
무르: 이번 요인은 아마도 그거겠지. 어둠의 잔치 발푸르기스의 밤이 탄생한 계기!
살랑살랑 몸을 띄우고 흩날리는 '오즈' 하고 장난치며 무르가 입을 열었다.
이반: 계기라니……. 우리가 꽃과 숲을 섬뜩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르: 맞아! 깊은 어둠은 때때로 보는 것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지. 하물며 이곳은 마왕의 이름이 붙은 꽃이 피는 숲. 예전에도 공포에 사로잡혀 고민하는 사람이 있었을 거야. 그런 사람들이 '오즈' 를 보기 시작했다고 해서 제물로 삼았던 것이 아닐까?
파우스트: 조금 가혹한 얘기지만. 저 어둠 속에는 그런 자들의 정념이 섞인 것들이 그을려져 있었다. 가뜩이나 공포에 시달리는데 혼자 숲 속으로 나가 하룻밤을 보낸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겠지. 자포자기하고 자해하는 것이 끊이지 않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아.
무르: 개중에는 숲에 나가는 척하고 어딘가로 도망쳐 버린 사람이나 짐승에게 습격당한 사람도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파우스트: 그러한 정념도 모두 포함해 오즈가 지워버렸지만…… 적게 잡아도 수백 년치의 부정이 순식간에 사라졌으니 엄청난 힘이지.
수백 년치…….
모두가 자연스럽게 오즈를 봤다. 너무나도 막강한 힘을 가진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 다양한 감정이 실렸다. 경악, 압도, 존경, 칭찬, 찬송, 부러움, 그리고 경외. 그런 눈빛을 한 몸에 받고도 오즈는 태연하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10화
아서: ……강대한 힘이나 깊은 어둠을 두렵게 여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섭리야. 하지만 만약 이 숲이나 꽃에 대해서 공포나 불안 이외의 기분이 향하고 있었다면……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정령도 또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르지.
제시카: ……확실히 그렇네.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겁만 먹었어. 이 숲을 저런 모습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우리에게도 분명 요인이 있었겠지…….
제시카 씨는 다시 한 번 숲을 둘러본다. 붉은 꽃을 비추는 눈동자는 무언가를 결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즈: 뭐가 됐든 사소한 일이다. 저 정도는 나한테는 촛불 끄는 것이나 다름 없어.
시노: 시원한 반응이나 하고. 이쪽은 튕겨버릴 뻔했다고.
파우스트: ……너의 힘의 크기는 알고 있었지만 규격 밖이라서 놀랍군.
비난을 받고도 오즈의 표정은 여전했다. 긴 손가락이 선명하게 물드는 붉은 꽃잎에 닿는다.
오즈: 검든 붉든 꽃은 꽃이다. 하지만 아까 그 색보다는 이게 더 나은 것 같군.
리케: 저도요. 오즈도 이 꽃을 예쁘다고 생각하는군요.
오즈: ……미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아서: 그래도 예전에 오즈 님과 봤던 색과 똑같습니다.
아서: 봐주세요. 어디까지나 펼쳐지는 '오즈' 의 아름다운 모습을!
아서는 기쁜 듯이 붉은 꽃의 바다를 달렸다. 그들의 소중한 추억의 꽃. 반짝반짝 빛나는 기억이 분명 더욱 이 숲을 빛내고 있는 거겠지. 순진한 미소로 아서는 오즈를 돌아보았다.
아서: 마치 오즈 님의 눈동자처럼 강하고 아름다운 붉은색…….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어서 아서는 기쁩니다!
오즈: ……그렇군.
이후 우리는 마을 근처까지 돌아갔고 이반 씨는 주민들에게 숲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오즈가 나타나 숲을 정화해 주었다. 그 증거로 제물로 선정된 제시카는 무사히 살아 돌아왔고 숲의 꽃의 색도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일단 거짓말은 없다.
제시카: 여러분, 정말 고마워. 마을 사람들도 이제 발푸르기스의 밤이 필요 없다는 말을 듣고 기뻐했어.
이반: 물론 제시카가 돌아온 것도! 다 너희들 덕분이야.
레녹스: 하하, 전부는 아니야. 먼 길을 넘어 마법관을 찾아온 이반의 공적도 있어.
시노: 제시카. 이 녀석을 제대로 칭찬해 주라고.
제시카: 당연하지. 조금 더 쉬다가 소중한 대접을 할게!
리케: 아……. 맞다. 제시카, 한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해서 배고팠죠? 간식인 꿀 쿠키예요. 자, 받으세요.
제시카: 어머……! 내가 좋아하는 거야. 고마워. 너무 기뻐.
리케에게서 쿠키 꾸러미를 받아들자 제시카는 강한 의지가 담긴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까 꽃밭에서 본 눈동자와 같다.
제시카: 당신들 덕분에 이제 그 숲에 발푸르기스의 밤은 찾아오지 않아. 숲도 꽃도 두려워할 건 없어. 가끔식 숲 속으로 가서 꽃을 돌보려고 해. 가끔 무서운 걸 볼지도 모르지만, 이런 변방의 땅에서도 '오즈' 를 보러오는 사람이 있어. 그러니까 이제 겁먹지 않고 저 꽃을 다같이 지키고 싶어. 더 이상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몇 년……. 아니. 몇 십 년, 몇 백 년 후에도.
너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모처럼 크고 예쁜 꽃이니까요.
아서: 아아. 저 아름다운 '오즈' 꽃밭을 꼭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해줬으면 좋겠어.
마법사는 오래 산다. 제시카 씨가 자신에 대해 모두에게 밝힐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꽃과 길게……. 매우 오랜 시간에 걸쳐 동행할 각오를 결정한 거싱, 상냥하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로부터 전해져 온다.
이반: 제시카……. 나도 도와줄게. 들어서기를 주저하던 숲 속이 저렇게 예쁜 곳이라는 걸 분명 모두는 모를 거야. 그러니까 같이 전하자. 좀 더 이 숲과 가까이 살고 함께 살기 위해서.
제시카: 이반……. 그렇네. 너와 함께라면 나도 든든해. 저런 의식이 행해지고 있던 숲이기 때문에 믿어주기까지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무르: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진짜 발푸르기스의 밤은 북쪽 나라에서 열린다는 건 알고 있어?
이반 / 제시카: 에?
제시카: 진짜 발푸르기스의 밤? 같은 이름의 잔치가 이 숲 말고도 있는 거야?
이반: 그러고 보니 마법관에서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은…….
무르: 원래 발푸르기스의 밤은 1년에 한 번, 북쪽 나라의 마의 산에서 열리는 마법사 잔치를 말하는 거야! 노래와 불꽃놀이와 엉망진창이 뒤섞인 하룻밤의 축제지!
제시카: 마법사만의 축제…….
무르: 맞아! 나라마다 전설이 있고 동쪽 나라라면 흉사에 가까우니까. '오즈' 에 대한 두려움에서 그 이름이 붙은 걸까? 다음에는 진짜 잔치에 다녀 와. 제시카는 마법사니까 환영받을 거고, 이반도 몰래 따라가면 돼!
이반: 이, 인간이 가도 괜찮은 거야?
시노: 괜찮지 않나? 전에 현자도 갔었고.
그렇네요. 하지만 그건 주역에게 허가를 받았다고나 할까…….
시노 / 리케 / 히스클리프: 주역?
파우스트: …….
아, 아니…… 그게. 그러고 보니 그때의 리케, 굉장히 예쁜 물고기를 가지고 돌아가지 않았었나요?
리케: 미틸이랑 포장마차에서 건져낸 물고기죠.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사랑스러웠어요. 마법관에 가서 네로에게 부탁해 맛있게 먹었습니다.
히스클리프: 역시 먹었구나…….
아서: 좋겠다. 나는 아직 가본 적이 없어. 괜찮다면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줘. 모두가 어떤 발푸르기스의 밤을 즐겼는지 나도 듣고 싶어.
레녹스: 재미있는 장소였습니다. 포장마차가 줄을 서서 밤새도록 다같이 노래하고 춤추고…….
히스클리프: 등불도 굉장했지. 밤새 뜨다가 물고기가 랜턴 안을 헤엄쳤어.
이반: 밤새도록? 하늘도 지상도 굉장히 시끌벅적한 축제구나.
히스클리프: 응. 올려다본 불꽃놀이도 대단했지만 빗자루를 타고 하늘에서 바라본 축제의 경치도 정말 예뻤어.
제시카: 우선 빗자루로 나는 연습을 해야겠네……. 저기, 다른 건? 포장마차는 어떤 가게가 있었어?
마법사들이 말하는 발푸르기스의 밤을 이반과 제시카는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공포의 상징이었을 이름이 동경과 부러움으로 탈바꿈한다.
맞다. 오즈는 발푸르기스의 밤의 잔치에 간 적이…….
말을 걸려다가 슬쩍 삼켰다.
오즈: …….
오즈는 아무렇지도 않게 흔들리는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가진, 아서와의 추억의 꽃을. 아침 햇살의 가감인지 그 눈동자는 어딘가 온화하고 부드러운 빛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즈는 꽃은 꽃이라고 했었지…….)
그 말에 거짓말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즈가 아끼고 싶은 것은 이 꽃에 깃든 아서와의 추억이다. 오즈가 처음으로 이 꽃의 이야기를 해줬다. 그날 밤. 오즈가 말하는 추억 속의 어린 아서를 내가 칭찬하자 오즈는 흐뭇하게 웃었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오래 사는 오즈를 인간인 내가 진정한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분명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진짜 오즈의 웃는 얼굴을 본 것 같았다. 그 달빛이 빛나는 밤의 안뜰에서……. 구름이 달을 가렸던 그 순간의 대화를 떠올리며 가슴이 애틋해진다.
아서: 오즈 님! 오즈 님도 발푸르기스의 밤의 잔치에는 가본 적이 없다고 하셨죠? 다음에 꼭 같이 가요. 즐거운 경치나 물건들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시노: 가본 적이 없다니, 한 번도? 엄청 오래 살았으면서.
리케: 하지만 알고 있는 건 많이 있잖아요. 오즈의 이야기도 꼭 제시카와 이반에게 들려주세요.
오즈: 아니, 나는…….
아서: 오즈 님, 현자님도 이쪽으로!
젊은 마법사들이 오즈의 등을 밀어 고리 안으로 들어간다. 그 옆을 따라가다가 문득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뒤돌아본 것은 아까까지 오즈가 바라보던 꽃. 오즈의 눈동자 같은 선명하고 아름다운 꽃들이 맑은 아침 햇살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때…… 흐뭇하게 꽃을 보며 웃는 은발 소년과, 소년을 다정한 눈동자로 지켜보는 머리가 긴 마법사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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