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무르: 아하하! 슈가, 먹혔다!
루틸: 아, 아직 낼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 '오르토니크…….'
시노: 아니. 잘했어, 미스라.
에?
아서: 아아. 자, 봐 줘. 이 작은 별을 먹어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고 건강해 보이지.
루카: …….
갑자기 주목을 받은 루카 씨는 어깨를 움츠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당황스러워 하는 것 같다.
루카 씨……. 저도 하나 받을 수 있을까요?
커다란 연보라빛의 눈이 두 번 깜빡였다. 나는 루틸이 다시 만든 슈가를 살짝 집어 입으로 옮긴다.
……응, 맛있다. 루틸의 슈가는 부드러운 맛이 나요.
루틸: 그런가요? 기뻐요.
그걸 본 루카 씨가 쭈뼛쭈뼛 슈가를 집었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입에 옮긴다. 작은 입 안에서 슈가가 굴러가 뒹굴뒹굴 구르는 귀여운 소리가 났다.
루카: ……! 맛있어…….
순간 활짝 꽃이 피어난 듯 루카 씨의 표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주위의 공기가 부드럽게 풀려간다.
아슬란: 루카…….
루틸: 다행이다! 루카가 웃어주면 나도 기뻐. 너의 미소는 분명 달콤한 슈가보다 누군가를 더 힘나게 하는 힘이 있지 않을까?
시노: 아아. 조금 안색도 좋아진 것 같아.
히스클리프: 그렇네요. 볼에 붉은 빛이 배어서……. 건강해진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아슬란: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도 그녀의 이런 표정은 오랜만에 봤어요. 잘 됐네, 루카! 모두가 잘 대해주셔서.
시노: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자.
시노가 마법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그림책을 주워 루카 씨에게 내밀었다. 꿈틀거리던 담쟁이 덩굴도 이제는 진정됐다.
시노: 중요한 그림책이잖아.
루카: ……응. 고마워.
시노: 흐흥, 천만에.
무르: 저기, 아까 그 반짝반짝은 어디갔어?
루틸: 반짝반짝?
무르: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나 반짝반짝 거렸어. 다들 못 봤어?
무지개빛의…… 마법 가루 같은 건가요?
무르: 맞아, 그거! 어디로 사라졌어?
루카: 아…….
어리둥절한 기색의 그녀는 그림책을 안고 다시 아슬란 씨의 등에 숨어버린다.
무르: 그러면 좀 더 슈가를 선물해 버리자! '에아뉴 랑블!'
무르가 주문을 외우자 천장에서 많은 양의 슈가가 떨어졌다. 아침볕에 비치는 비처럼, 차례차례 흘러내리는 별처럼, 변덕스러운 봄바람에 날린 꽃잎처럼. 부드럽게 그녀 위로 쏟아졌다.
루카: ……!
루카 씨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큰 눈동자가 더 크게 떠지고 슈가의 빛을 받아 더 반짝반짝 빛난다. 마법사들의 표정은 신기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되었다. 옆에 있는 루틸도 넘어가는 만남을 놓치는 듯한 그녀의 옆얼굴에 눈길을 빼앗기고 있다.
무르: 자, 알려줘.
루카: ……그게…….
오즈: 무슨 일이 있었나.
아서: 오즈 님.
루카: ……!
훅 하고 숨을 삼킨 루카 씨는 재빨리 떠났다. 흔들리는 은빛 머리가 멀어져 간다.
루카 씨……!
아슬란: ……죄, 죄송합니다! 저도 실례하겠습니다.
아슬란 씨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루카 씨를 쫓아갔다.
무르: 어라? 슈가를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오즈의 얼굴이 무서웠나?
시노: 그것보다, 어떻게 해 이거. 바닥이 온통 슈가 바다라고.
지, 진짜다!
아서: 서둘러서 치우죠. 다른 방문객도 아직 남아있고…….
미스라: 호호 호히라면 후나히, 호히호히히호리.
히스클리프: 에? 미스라, 뭐라고 했어……?
루틸: 이런 청소라면 나쁘지 않아……. 다행이다!
무르: 보이는 범위는 마법으로 살짝 해버리자. '에아뉴 랑블!'
오즈: …….
무르가 주문을 외우는 한편, 오즈는 루카 씨가 떠난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왜 그러나요? 오즈.
오즈: 저 아이, 이상한 기색이 난다. 있을 리가 없는 것의……. 아니면 아직 싹이 트지 않았나.
싹이 트지 않았다고요……?
오즈: 모든 마력의 원천……. 마음이다.
오즈의 말을 천천히 마음 속으로 되새긴다. 의아해하는 나를 보며 그는 긴 머리와 고개를 흔들었다.
오즈: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마법은 마음으로 쓴다.
오즈: 그것보다 현자, 저 호박 눈의 남자에게서 아이의 이야기를 들었겠지. 어린 마법사는 마력을 제어하는 것이 서투르다. 무언가를 계기로 혼란을 초래하기도 한다. 전람회의 경비를 관장하고 있는 것은 쌍둥이. 만약을 위해 보고해 두면 좋다.
루카: 저기, 록시. 슈가를 알고 있어? 마법사가 만드는 작은 별 같은, 반짝반짝하고 달콤한 덩어리. 나도 만들 수 있을까?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루카: 저기 록시……. 머릿속이 푹신푹신해서 왠지 계속…… 진정이 안 돼.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빨리 그림책을 완성해야 하는데. 모처럼 아슬란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줬는데. 내가 뭘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왜냐하면 그림책을 완성시켜 버리면…….
루카: 여기 있는 동안 계속 따뜻한 알 속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좀 더……. 좀 더…….
스노우: 그렇군……. 즉, 그림책에 그려진 세계는 공상도 아니고 문헌을 본뜬 것도 아니란 것인가.
화이트: 루카라는 아이가 실제로 그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라고.
마법관으로 돌아온 후 나는 오즈와 아서, 그리고 루틸과 함께 쌍둥이를 만났다.
네. 루카 씨 본인에게 물어본 건 아니지만 아슬란 씨가 그러더라고요. 그녀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특별한 힘이 있다고…….
루틸: 게다가 루카가 아무것도 없느 공간을 바라보며 호소하는 걸 봤거든요. '록시' 라고.
스노우 / 화이트: 록시?
루틸: 이걸 보세요.
루틸이 그림책을 펼치자 환영이 펼쳐지고, 무지개빛 폭신한 생물이 떠올랐다.
루틸: 이 아이가 록시예요. 그림책 속에서 어떤 여자아이의 소중한 친구로서 그려져 있는데…….
화이트: 세상에. 이건…… 환수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호칭이군. 록시는 아마도 그 아이가 붙인 호칭이겠지만, 종으로서는 현대에 멸종되었다.
스노우: 기재된 문헌도 극히 근소하고, 좀처럼 사람들 앞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희귀종이지.
역시……. 분명 루카 씨 곁에는 이 록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루틸: 네. 그림책에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 진짜 록시…….
화이트: 흠. 오즈는 어떻지? 아이를 실제로 보지 않았는가.
오즈: 마력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 하지만 기묘한 분위기의 아이였다. 그런 특성을 지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스노우 / 화이트: 호오…….
샤일록: 과연……. 실제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토록 치밀한 세계를 그릴 수 있다고.
루카 씨가 특수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바로 순식간에 마법관에 퍼졌다. 샤일록의 바에서도 그 화제가 난무였다.
샤일록: 저희가 알 수 없는 세상을 보고 있다니 매우 흥미롭군요. 꼭 이야기해보고 싶네요.
파이프 연기를 내뿜으며 눈을 가늘게 뜬 샤일록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요염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샤일록: 현자님? 얼굴이 붉으시군요.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취해버리신 걸까요.
아뇨! 그…….
라스티카: 취하게 한 것은 너일지도 모르겠네, 샤일록. 그 감미로운 미소로.
브래들리: 하긴. 아이들에게는 자극적이겠지.
샤일록: 이런, 영광이군요. 그런 당신에게는 이쪽을 서비스 해드리죠.
샤일록을 내민 잔을 브래들리가 들여다본다.
브래들리: 어이어이, 주인. 그런 억지 술을 꺼내놓고 어쩌자는 거야?
샤일록: 편안한 낙정의 세계로 모시려고. 하기야 술에 넘어갈 당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브래들리: 대단한 취미잖아. 좋아, 어울려 줄게.
히죽 웃던 브래들리가 끙 하고 잔을 기울이며 목을 울린다. 가벼운 마시기가 시작된 카운터 끝에는 파우스트의 모습도 있었다.
파우스트: 하지만 루카 캐럴이 그렇게 젊은 마법사였을 줄은 몰랐군.
라스티카: 나도 그래. 하지만 새하얗고 순수한 눈동자에만 비치는 신비의 세계는 분명 있을 거야. 어린아이라는 것이 특히 그런 거에 민감하다고 들어서.
스노우와 화이트에게도 인간이나 마법사에 국한되지 않고 무조건 특별한 힘을 갖는 시기의 대부분은 어린 시기라고 들었어요. 제가 있던 세계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고요.
파우스트: 그렇겠지. 정도는 개인차가 있겠지만 아이는 어른에게 없는 감성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어려서 다루기 힘들 뿐, 모든 감각이 뛰어나고 날카로워. 단, 그것들을 유지한 채 어른이 되는 것은 한 줌도 없으니까. 그 아이도 이해자가 적어서 고생했겠지.
네……. 아슬란 씨와 지내기 전까지는 그다지 좋은 환경에서는 지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이상한 세계를 보는 것을 징그럽다고 여겨져서, 꽤 고생하고 있었다고…….
오웬: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마법사잖아. 고생할 일이 뭐가 있어.
오웬…….
소파에 앉아 있던 오웬이 등받이에 크게 기대어 몸을 젖힌다. 고개만 이쪽으로 돌리고 말을 이었다.
오웬: 마법사는 내버려둬도 혼자 살 수 있어. 그 특별한 힘을 발휘해서 다른 사람들을 멀리하거나 시키면 될 텐데.
12화
(그렇지……. 북쪽 나라는 실력주의고, 인간이 살기에는 어려운 땅이라 마법사의 입지가 강해. 오웬은 물론 그렇게 살아온 북쪽 마법사들 입장에서는 이상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네.)
브래들리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마법사가 인간에게 거처를 쫓기는 건 이상한 일이라고.
브래들리: 그건 그렇지. 인간 따위에게 얌전히 움츠러든 놈들은 자존심이 없는 건지 무너지. 능력이 있다면 마음대로 살면 돼.
능력…….
라스티카: 타고난 힘은 본인에게 있어서 손과 발과 같으니까요. 그 아가씨에게도 그 세계가 보이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 마법사가 마법을 쓰는 것처럼.
……확실히 그렇네요. 라스티카의 말대로 보통인지 특별한 건지는 사실은 별 차이가 없는 것인데. 저는 루카 씨는 특별한 힘을 가진 마법사라고…… 그렇게 생각해 버렸을지도 몰라요. 어렵네요. 이해하려다가 오히려 멀어질 수도 있다니.
가슴 속의 안쪽이 따끔따끔 아팠다. 그런 나에게 샤일록이 점잖게 웃었다.
샤일록: 오늘 밤은 좋은 밤이군요. 다양한 견해가 난무하는 자리는 술을 달콤하게 만들죠. 특별하지 않은 그림채 작가 루카의 곁에 신비의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은 사실. 아직 더럽지 않는 눈동자에만 주어진 그 세계를 들여다볼 권리. ……멋진 소설의 서두 같지 않나요?
그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들어올린 유리잔 속에서 얼음이 잘그락 소리를 낸다. 밤이 깊어가는 소리 같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루틸: 미틸, 리케. 무슨 일 있으면 피가로 선생님에게 보고하는 거야.
미틸: 네! 잘 둘러보고 올게요!
리케: 네. 미틸과 함께 열심히 할게요. 맡겨주세요!
전람회도 나흘째를 맞았다. 나와 루틸은 경비를 담당하는 마법사들을 배웅하는 것이 일과였다.
피가로: 지금까지는 별 일 없이 개최되는 것 같아 다행이네.
네. 연일 붐비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끝까지 무사히 개최디면 좋을텐데…….
피가로: 분명 괜찮을 거야. 오늘은 우리에게 맡겨. 레노도 같이 와주니까.
레녹스: 네, 안심해 주세요. 설사 도적이 끼어들어도 막을 수 있는 훈련도 했으니까요.
도적……?
피가로: 루틸. 만약 루카가 회장에 와있으면 상황을 보고해 줄게.
루틸: 네, 감사합니다. 가벼운 의뢰인데 오늘은 함께하지 못해 죄송해요.
피가로: 괜찮아. 루틸은 루틸대로 잘하고 와. 나도 스노우 님과 화이트 님에게 부탁받았거든. 무슨 일이 있을 때 그녀를 부탁한다고.
레녹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 지금도 신기한 곳과 연결되어 있는 거죠. 저도 산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연의 깊은 곳이나 마력이 짙은 장소에서 평소와는 다른 낌새를 느끼긴 합니다만…… 아이가 혼자서 그 낌새와 대치하고 있는 것은 조금 걱정이 됩니다.
잔잔하게 말하는 레녹스 옆에서 출발 준비를 마친 미틸들이 얼굴을 내민다.
미틸: 피가로 선생님, 레노 씨! 슬슬 가지 않으면 전시회가 시작될 거예요.
리케: 지각은 엄금입니다. 제대로 책무를 다해야죠.
미틸 / 리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조심하고요!
빗자루에 걸치자 피가로들은 훌쩍 날아올라 하늘을 달려갓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루틸하고 배웅했다.
마지막 날까지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네요.
루틸: ……네. 무사히 그녀의 신작을 전시할 수 있기를 바라요.
루틸은 아서에게 빌린 그림책 표지를 살짝 빗대며 기도하고 있었다.
(어라……?)
문득 무지개빛으로 빛나는 비늘가루가 루틸의 손아귀에서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공간으로 녹아든다. 지금 보인 것은…… 착각일까.
루카: (뭘까…… 이 그리운 냄새. 먼 계절의…… 햇빛 냄새.)
아아, 조금씩 생각이 나. 그것은 그래……. 기온이 높은 날의 오후였다. 나는 달리고 달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숲을 빠져나와 거리에 있었다. 몹쓸 짓을 하는 인간들로부터 도망쳤을 텐데, 인간이 많은 곳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가로수 밑동에 주저앉아 희미한 나무 냄새에 잠깐 울었다.
그때, 문득 머리 위에 뭐가 올라갔다. 고소한 보리 냄새가 나는 모자. 이건 햇빛 냄새라고 나는 생각했다. 올려다보니 약간 햇볓에 그을린 피부와 호박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 사람을 말했다 '미아인가?' 라고. 인간이다. 도망가지 않으면 또 혼날 거야. 그렇게 생각했는데, 은은하게 나는 햇살의 향기에 왠지 안쇰되어서, 단번에 피로가 엄습해 와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미아가 아니야. 나를 찾아줄 사람은 없으니까. ……며칠 째 걷고 있던 나는 거기서 의식을 잃었다.
다음으로 잠에서 깬 것은 푹신한 침대 위였다. 머리에는 젖은 수건이 얹혀져 있었고 머리맡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났다. '기분이 어때?' 덜컹하고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노을에 물드는 바람이 편안하게 머리를 흔들어 간다. 창문으로 보인 하늘에 옅은 구름이 끼어 있었다.
태양 아래에 피는 노란 꽃과, 연한 빨강을 섞은 곳에 아주 조금 어린 풀빛이 올라간 예쁜 색. 저 구름, 그려보고 싶다. 그러면서 잠시 멍하니 바람에 몸을 맡겼다. '저기, 이건 네가 그린 거야?' 이윽고 그 사람은 조심스럽게 얇은 종이 뭉치를 보이며 말했다. 마음이 내킬 때 마음대로 그려놓은 경치나 생물들의 그림. 나만의…… 세계. 나는 바로 그 종이 뭉치를 뺏었다.
그 세계가 보이는 것이 이 세계에서 살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어리지만 그건 알고 있다. '소중한 건데 멋대로 봐서 미안해.' 라며 그 사람은 고개를 숙였다.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리는 그 사람의 밝은 머리를 밀짚밭 같다고 생각했다. ……아아, 그래서 햇빛 냄새가 나는 거구나.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런데 생각헀다. 따뜻한 햇살 같다고.
그 사람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는구나. 어린 날에 꾼 백일몽처럼 아름답고 어딘가 애틋한, 기억의 한구석에서 계속 살아가는 추억 같은…….' 그리고 스케치북과 새 그림 재료를 나에게 건넸다. '……너와 너의 세계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좀 더 그려주면 안 될까?' 물론 무리하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너는 그림을 잘 그려서 좋아하는 것 같아서.' 눈꼬리에 얇은 주름을 잡고 그 사람이 웃는다. 누군가가 이렇게 웃어넘긴 적은 처음이었다.
뭘까, 이 기분. 가슴이 따뜻해서, 어딘가 애틋하고……. '어, 어째서 우는 거야!?' 그 사람은 당황하면서 그림 재료를 떨어뜨렸다. 흩어지는 그것을 그대로 두고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싫었어? 아니면 어디 다쳤어? 너무 울면 눈이 부어버릴 거야. 지금 차가운 물과 천을…….'
루카: ……오빠. 저 구름, 무슨 색으로 보여?
'뭐……?' 창밖을 가리키고 이상한 색의 구름을 가리킨다. 그 사람은 몸을 내밀어 창틀에 손을 얹었다. '으음……. 마침 해질녘이니까, 주황색이라고 하는 것이 무난하려나. 아니, 어쩌면 주홍색일지도…….
루카: 노란색이랑, 연한 빨강색이랑…… 밝은 초록색. 나한테는 그렇게 보여.
번쩍 석양보다도 밝은 색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어깨가 떨린다. 하지만 평소처럼 나를 꾸짖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눈동자를 가르는 그 속눈썹이 신기하다는 듯 몇 번이나 깜빡인다. 그리고. '……그렇구나. 너는 꺠끗한 세상에 살고 있구나.' 조금 어린애 같은 얼굴로 웃었다.
당황하거나 생각하거나 무언가를 떠올리거나. 돌변하는 표정은 지금까지 나를 향한 싸늘한 표정이 아니다. 나와 내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 징그러워하지 않고, 더 알고 싶다고 말해주는……. '아아…… 그렇지. 계속 너라고 부르는 것도 조금 그러니까. 괜찮다면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 곧은 눈빛과 호박 눈동자에 나의 모습이 비친다. ……역시 나는 미아였는지도 모른다. 찾아줄 사람이 여기에 있었어.
루카: ……루카. 당신의 이름은……?
루카: ……꿈? 너무 그리워서…… 머리가 어지러워.
루카: 록시……. 록시……! 아아, 다행이다. 거기에 있었구나. 선잠을 자고 있었던 것 같아……. 응. 꿈을 꿨어. ……그리운 꿈을.
루카: ……아, 목소리가 나. 그림책 밖에서 아슬란이 부르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어째서일까……. 너무 졸려. 몸이 일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아…….
루카: 나……. 왜 이렇게 졸린 걸까…….
13화
네로: 루틸, 곧 어두워질 거야.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때?
루틸: 아, 네로 씨.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네로: 또 그걸 읽고 있었어? 아서에게 빌린 루카 캐럴의 그림책.
루틸: 네. 몇 번을 읽어도 신선한 놀라움이 있고 질리지가 않아요.
네로: 공들여 만든 책이구나, 그거. 넘기고 싶어지는 것도 알 것 같아. 게다가…… 그 책만큼 특별하지는 않아도 왠지 다시 읽고 싶어지는 것도 있지. 방에서 뒹굴거릴 때던지 말이야.
루틸: 어머. 그러면 다음에 제가 추천하는 그림책을 네로 씨에게 빌려드릴게요. 어쩌면 네로 씨에게 있어서 몇 번이라도 다시 읽고 싶어질지도 모르고.
네로: 그림책 말이지. 뭐, 리케도 가끔 읽어달라고 가져올 때가 있고. 현역 교사가 추천하는 한 권, 빌리는 것도 좋을 것 같네.
루틸: 아싸! 소중한 거를 골라올게요.
루틸, 네로. 여기 있었군요.
클로에 / 카인: 둘 다, 찾았다!
루틸: 아, 여러분!
네로: 수고했어. 오늘 전시회는 어땠어?
카인: 하루가 다르게 붐비니까 오늘도 성황이었어.
클로에: 경비도 빈틈없었어. 오늘도 이상 없음!
루틸: 별 일 없어서 다행이야. 그…….
루틸의 시선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루카 씨의 신작 전시는 아직이었어요. 오늘도 공간이 텅 빈 채로…….
카인: 내일이 드디어 마지막 날이야. 그걸 향해서 지금쯤 막바지일지도 모르겠네.
네로: 그렇구나. 내일이면 꼭 전시될 거야. 자, 이제 곧 저녁이다. 식기 전에 먹으러 와.
카인: 아아, 바로 갈게! 넓은 회장을 돌아다녔더니 배고파졌어.
클로에: 나도! 네로, 오늘 메뉴는 뭐야?
네로: 루틸이 좋아하는 거.
루틸: 내가 좋아하는 거?
네로: 뭔가 요즘 신경 쓰이는 게 많은 것 같았으니까. 좋아하는 걸 먹으면 조금은 기분 전환이 되잖아. 사양 말고 많이 먹어.
루틸: 네로 씨…….
루카 씨의 일……. 역시 조금 걱정이죠.
루틸: ……네. 아슬란 씨가 옆에 있어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잘 말할 수는 없지만, 루카는 마음이 피곤하다고나 할까. 흔들리는 것처럼 보여요. 내일 마지막 날은 저도 행사장에 가려고 해요. 루카와 조금 이야기를 하고 싶고.
저도 같이 갈게요. 신작이 완성되기 전이라 힘든 시기에 피로가 쌓였을 수도 있지만. 내일 무사히 전시를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모습으로 만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기다리는 시간도 즐겨요. 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루틸: 현자님……. ……네. 기다려요. 즐거운 마음으로!
그때, 시야에 반짝이는 것이 가로질렀다. 보니까 반짝이는 무지개빛 비늘가루가 루틸과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에?
네로: 뭐야, 이 빛…….
카인: 나도 보여……. 싫은 느낌은 안 들지만, 대체 뭐지?
클로에: 반짝반짝하고 예쁘지만…… 어디서 온 걸까?
무지개빛 비늘 가루는 마치 뜻을 가진 듯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 어딘가 낯익은 그것의 기억을 더듬어 불쑥 소리를 지른다.
이거, 전시회장에서도 본 반짝임이에요!
루틸: 그때는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는데…….
나와 루틸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루카 씨는 분명히 중얼거리고 있었지. 그림책 속에 나온 신기한 나비의 이름을…….)
나는 무지개빛 비늘 가루에 살짝 물어본다.
당신은……. 록시?
그러자 무지개빛 비늘 가루는 빙글빙글 허공을 춤추듯 원을 그렸다.
전원: 답장했다!
네!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확실히 응해준 것 같아요……!
그러자 무지개빛 비늘 가루는 좌우로 흔들리며 마치 꼬시듯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쪽을 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네로: ……우리를 어딘가에 안내하려는 건가?
클로에: 응. 따라오라는 것 같아!
루틸: 어쩌면…… 루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몰라요.
어쨌든 록시를 따라가 봐요!
카인: 아아!
루틸: 현자님은 제 뒤로!
네!
클로에: 나, 나도 갈게!
루틸: 기다려, 록시!
네로: 어이, 너희들……!
루틸, 클로에, 카인에 이어 네로도 빗자루를 꺼내 땅에서 날아올랐다. 마법사들이 줄줄이 하늘로 날아오는 가운데, 급상승하는 바람에 무심코 눈을 감는다.
……!
이윽고 고요한 기색에 슬며시 눈을 뜬다. 시야에 가득 찬 것은, 감시하는 듯한 붉은 노을이다.
아…….
가릴 것 없는 넓고 높은 하늘 한 면과 멀리 보이는 거리들도 모두 유달리 짙은 황혼 전의 빛깔로 삼켜져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농도가 변해가는 하늘. 곧 애수를 머금은 자양화빛으로 물들어갈 것 같다. 아주 잠깐의 찰나와 가까운 기적을 채운 듯한 광경은 루카 씨의 그림책에서 본 세계와 어딘가 닮은 것 같다.
루틸: 예쁘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심코 입으로 쏟아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걸 말로 한 건 내가 아니야. 매달린 어깨 너머로 완만하게 휘날리는 머리카락 틈으로 보였던 루틸의 눈동자는 석양에 물들여 반짝이고 있었다. 함께 날아오른 마법사들도 빗자루에 걸린 채 펼쳐진 절경의 바다에 눈길을 빼앗기고 있다.
네로: 오늘은 훨씬 볼만하네. 노을 같은 거, 지금까지 수천 번이나 봐왔는데……. 몇백 년 살아도 넋을 잃고 보는 현실은 있는 법이야.
네로가 쏟아낸 말에 젊은 마법사들과 나는 얼굴을 맞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는 이상한 세계는 보이지 않을 텐데,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알고 있다.
(이 경치를 잊고 싶지 않아. ……기억하고 싶어.)
셔터를 누르듯이 나는 눈을 천천히 닫는다. 문득, 우리를 유혹하듯 약간의 방울소리가 났다. 눈을 돌리면 빙글빙글 춤추듯 무지개빛 비늘 가루가 반짝인다. 그리고 노을에 물드는 구름 아래 무지개빛 비늘 가루는 살랑살랑 날아간다.
루틸: ……가죠. 록시를 쫓아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에 이어 빗자루를 탄 마법사들과 함께 붉은 하늘을 달려갔다. 무지개빛 비늘 가루를 따라 도착한 곳은 요 며칠 새 익숙한 곳. 전시회장의 고성이었다. 이미 폐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성 안에는 사람이 없어 쌀쌀하고 조용하다. 마법으로 무거운 문을 열자, 그곳에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카인: 뭐야, 이거……!?
바닥에는 형형색색의 꽃이 만발하고, 커다란 꽃봉오리가 윤기를 내며 비눗방울처럼 투명한 꽃잎이 날리고 있다. 나선계단과 기둥은 담쟁이덩굴 같은 것으로 덮여져 잇었고, 신기한 식물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식물 뿐만이 아니다. 본 적도 없는 신기한 생물이 떠돌고 있다.
클로에: 우리가 아는 회장이 아닌 것 같아…….
카인: 아아. 그리고 이 이상한 낌새.
네로: 성이 통째로 무언가에 침식당한 것 같네.
이 환상적이고 섬세한 경치는…….
루틸: 네……. 분명 루카의 그림책이에요. 그런데 왜 이렇게……?
카인: 아무튼 루카의 그림책의 전시장으로 가자!
카인의 뒤를 루틸, 나, 클로에, 네로가 경계하며 따라갔다. 나아갈수록 그림책의 숲 속으로 안내되는 것 같았다. 떠다니는 공기 밀도가 짙어지는 것 같아. 올려다보니 무지개색 담쟁이덩굴이 천장까지 덮고 있다. 신기한 새의 날개짓이 일으키는 바람이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는다. 루카 씨의 그림책 전시장에 도착하자마자 의식을 잃을 것만 같았다.
네로: ……어이, 이것 좀 봐줘.
전시장 옆에서 쭈그리고 앉은 네로가 의아한 목소리를 낸다. 달려온 카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난잡하게 바닥에 펼쳐져 있는 옅은 빛을 띤 그림책에서 담쟁이덩굴이 뻗어져 있다. 그것들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회장의 바닥이나 벽을 향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카인: 그림책 속의 세계가 넘쳐나오고 있어……?
네로: 회장 안에 떠돌고 있는 이 이상한 광경은 그림책이 원인이라는 건가?
클로에: 그런데 이런 그림책 장식이 있었나? 오늘 경비하는 동안은 못 봤지?
혹시, 루카 씨의 신작……?
아슬란: ……현자, 님……?
호박색 눈이 나를 바라보더니 아슬란 씨는 벌떡 일어났다.
아슬란: 아아, 이럴 수가……!
아슬란 씨, 괜찮나요? 저기, 이건 도대체…….
아슬란: 저 그림책이야……. 이렇게 되기 전에, 좀 더 그녀에게 다가갔었더라면……!
머리를 싸매고 있는 아슬란 씨를 달래듯 루틸이 부드러운 어조로 묻는다.
루틸: 아슬란 씨, 진정하세요. 천천히여도 좋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르쳐 주세요.
등을 문지르는 루틸의 손에 맞춰 아슬란 씨는 호흡을 되찾는다.
아슬란: ……감사합니다. 혼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슬란: 이건 분명…… 루카가 신작 그림책을 완성할 수 없는 초조함에서 초래한 것입니다. 장치의 환영과는 별개로 그림책에서 식물 등이 넘치는 일은 지금까지도 몇 번인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나온 건 처음입니다…….
아슬란 씨는 침식하는 그림책을 곁눈질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아슬란: ……루카가 그리는 그림책은 모든 페이지를 채우고 마지막으로 제목을 정하면 완성되는 거예요. 미완성인 동안에는 그림책 속에 뛰어들어 창작을 하거나 놀 수 있거든요.
14화
루틸: 그림책 속으로 뛰어들어……?
아슬란: 네. 그렇게 그려가는 것이 그녀의 창작 방법이었습니다.
클로에: 작품 속에 들어가 창작하다니, 좀 재밌을 것 같네…….
아슬란: 네. 굉장히 즐거운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 루카에게 그림책은 그녀의 작품이자 놀이기구입니다. ……계속 고독을 방황해 온 그녀가, 누구의 눈도 신경쓰지 않고 날개를 펼 수 있는 장소. 그것이 그림책 속이었으니까요.
아슬란: 하지만 완성되면 그림책의 세계는 닫혀버린다. 그래서 바로 다음 그림책을 그리기 시작하고……. 그렇게 그녀는 몇 권이나 그림책을 그려나갔습니다. 하지만…….
아슬란 씨가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떨리는 한숨이 새어나온다.
아슬란: 이 신작 그림책만은, 왠지 계속 완성시키지 못하고 그림책의 세계를 닫지 못한 채……. 이대로라면 그림책에서 넘쳐나는 세계가 성을 삼켜버릴 겁니다. 그러다가 비난의 눈초리를 받게 되면 루카는 또 마음을 닫아버릴 거예요. 루카에게 무리는 시키고 싶지 않지만, 어떻게든 그림책의 세계를 닿지 않으면……. 그런데 정작 그녀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요.
그때, 무지개빛 비늘 가루가 나타나 아슬란 씨의 주위를 살랑살랑 흩날렸다.
록시……?
무지개빛 비늘 가루는 흔들리며 그림책 속으로 날아간다. 그림책 바로 위에서 그 빛이 더해지면, 홀홀 그림책의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고…….
이건……!
그곳에는 다른 페이지에 그려져 있던 것처럼 아름다운 경치는 없었다. 몇 번이고 붓으로 휘갈기듯 온통 시커멓게 칠해져 있었다. 온갖 불안과 고독이 뒤섞인 듯한 기색이 이상한 힘을 갖지 못한 나에게도 전해져 온다.
루틸: ……여기서 루카의 기척이 나요.
네로: 아아……. 잔잔한 느낌은 아니지만.
클로에: 어, 어쩌지……. 마법관으로 돌아가서 누군가를 불러올까?
카인: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할지도 몰라. 부르러 돌아갈 시간이 있을까.
미스라가 있었다면 공간의 문을 연결해 달라고 했을 텐데…….
루틸: 아!
루틸이 목소리를 높여 마법으로 무언가를 꺼넀다. 그것은 새 박제처럼 보였다.
네로: 에, 뭐야 그게.
카인: 뭔가 이상한 냄새 나지 않나?
클로에: 남쪽 나라 축제에 출발하기 전에 미스라가 준 피리야!
네로: 피리? 저게?
루틸: 네. 예전에 미스라 씨에게 부적 대신 받았거든요. 엉덩이 쪽을 물고 불면 미스라 씨가 달려온대요!
루틸은 힘껏 숨을 들이마시더니 박제의 엉덩이 같은 부분을 물었다. 그러자 마치 목숨을 건진 듯 새가 드높이 울었다.
잠시 후, 낯익은 문이 눈앞에 나타난다.
미스라: 무슨 일 있나요?
그런 미스라의 등 뒤에서 몇 명의 마법사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문 너머는 샤일록의 바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루틸: 미스라 씨!
저기, 실은 전시회장이……!
클로에: 와아!!
상황을 설명하려고 할 때, 클로에의 짧은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뒤돌아보면 아슬란 씨의 발에 그림책에서 뻗어진 김긴 담쟁이덩굴이 얽혀 있다.
아슬란: 끄, 끌려 간다……!
클로에: 괜찮아! 나는 절대, 손을 놓지 않을 테니까, 버텨……. 우왓……!?
카인: 클로에!
네로: 어이!
그렇게 뻗은 네로의 팔은 허공을 긁었다. 아슬란 씨와 그 팔을 잡은 클로에는 순식간에 그림책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클로에와 아슬란 씨가……!
카인: 젠장!
루틸: 저도 갈게요!
네로: 잠깐…… 기다려!
카인과 루틸은 망설임 없이 그림책 속으로 뛰어들었다.
미스라: 잠깐!?
브래들리: 뭐야, 시끄럽게. 우와, 뭐야 이거.
무르: 성 안에 이상한게 생겼어!
샤일록: 검소한 모습이군요.
뛰쳐나오려는 미스라를 붙잡듯 공간의 문 틈으로 쌍둥이가 쑥 얼굴을 내밀었다.
스노우: 무슨 일인가!
화이트: 보통 일이 아닌 것 같군.
스노우, 화이트! 클로에들이 그림책 속으로……!
스노우: 이럴 수가……. 비상사태구먼!
화이트: 현자의 마법사.
스노우 / 화이트: 전원 집합!
미스라: 쳇……. '아르시무'
미스라가 주문을 외우자 그 자리에 없던 마법사들이 차례차례 행사장에 나타난다.
시노: 뭐야!?
레녹스: 여기는, 전시회장……?
네로: 이야기는 나중에! 일단 거기 그림책으로 뛰어들어…….
그때, 내 손을 확 잡아당긴 것은 무르였다. 분주한 목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눈길을 끄는 에메랄드의 눈동자가 반짝이며 미소 짓는다.
무르: 재밌는 일, 잔뜩 일어나겠네! 자, 현자님. 그림책의 세계로 렛츠 고!
와……앗!
손을 잡은 채 날아오른 무르에 이끌리듯 내 몸도 둥둥 공중에 뜬다. 뛰어드는 순간, 까맣게 칠해진 페이지가 옅은 빛을 내뿜었다. 밑도 끝도 없는 구멍에 떨어지는 듯한 불안감과 푹신함 침대 위에서 뛰는 듯한 편안함이 동시에 엄습한다. 미지의 감각에 무르의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빛이 튄 세계는…… 부드러운 숲의 향기가 났다.
카인: 현자님……!
부드러운 풀 위에 무릎을 꿇는 동시에 카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면 먼저 끌려 들어온 아슬란 씨와 클로에, 쫓아 뛰어온 카인들의 모습도 있다.
카인! 모두도……!
달려와 무사함을 확인하지만 모두 다치지 않고 무사해서 안심하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 사이 소집된 다른 마법사들도 줄줄이 그림책의 세계로 내려왔다.
미스라: 루틸……. 아, 다행이다. 제멋대로 굴지 말라고 했잖아요.
루틸: 죄송합니다. 안절부절 못해서……. 그래도 미스라 씨가 와주셔서 안심이에요. 그때 받은 새 피리, 간직하길 잘했어!
미스라: 하아, 태평한 사람…….
라스티카: 그림책의 세계에 오다니 귀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좋은 날씨네. 그런데 이 의상은 크로에의 서프라이즈? 그림책의 등장인물이 된 기분이야.
클로에: 아니, 나 아니야! 갑자기 끌려들어와서 놀랐는데, 멋진 의상을 입을 수 있어서 기쁠지도……! 다들 너무 잘 어울려. 현자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통통 튀는 목소리의 클로에를 비롯해 마법사들도 나도 어느새 신기한 의상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여러분, 너무 잘 어울려요! 특히 뾰족모자가 느낌이 좋네요.
무르: 이거 좋지! 그림책에 나오는 마법사 같아!
샤일록: 후후, 그러면 평소보다 더 마법사처럼 굴어야겠군요.
쳇. 너희들, 나른한 마력으로 마음대로 옷을 바꿔 입혀져서 잘도 주눅들지 않는구나.
네로: 뭐, 일부러 되받아칠 정도로 불쾌하지도 않지만……. 이런 새하얗고 작고 예쁜 건 조금 진정이 안 돼.
오웬: 북쪽 마법사에게 마법으로 간섭하다니 배짱이 좋잖아. 그래도 너희 같은 애송이한테는 잘 어울리네. 재롱장치 같아서.
브래들리: 아? 나잇살에 펄럭이는 놈이 잘도 말하네.
시노: 안심해. 너희 모두 충분히 늙었으니까.
브래들리 / 오웬 / 네로: 하?
레녹스: 파우스트 님도 잘 어울리십니다.
파우스트: 너도. 아무래도 그림책 속에서는 이 세계의 룰이 적용되는 것 같군.
히스클리프: 네……. 그렇지만 마법을 못 쓰는 건 아닌 것 같네요.
피가로: 루카의 마력의 영향인가. 꽤 광대한 세계가 펼쳐져 있는 것 같은데……. 조금 불안하네. 세상을 형성하는 마력이 불안정하고 연약한 공간이야.
스노우: 그렇지. 어느 정도 힘을 가진 마법사라면 마력의 간섭도 쉽게 해소할 수 있다. 쨔잔하고…….
화이트: 여기는 일단 허술한 마법이 걸려 있는 걸로 하지.
미틸: 설마 그림책 속에 들어가 버리다니……. 놀랍네요.
리케: 네. 그림책을 펼쳤을 때 떠오른 환영 거리의 신기하고 기묘하고 아름다운 세계지만…….
주위를 둘러보는 리케의 당혹감이 전해진다.
경치 군데군데 거무스름해지고, 색이 바래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피가로: 그림책에서 본 건 더 선명했지. 이 공간 자체가 녹아 있는 건가…….
시노: 여기가 이상하게 되어 있는 건 보면 알 수 있어. 그것보다 우리는 왜 이런 곳에 모여있지?
맞다! 죄송해요. 갑자기 호출했는데 아무런 설명도 안 했네요.
나는 여기에 이르기까지 간략한 설명을 했다. 마법관에 나타난 비늘 가루부터, 그걸 쫓아 이 행사장까지 와보니 이상한 상태로 변해 있었던 것까지.
아서: 그림책에 뛰어들기 전에 본 전시회장은 확실히 이상한 분위기였지만, 그런 일이…….
네로: 아아. 이 그림책의 세계가 넘쳐나 성 안을 침식한 것 같아.
라스티카: 그렇군요. 전람회 마지막 날 열리는 파티용 치장치고는 꽤 성대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미틸: 회장을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그림책을 완성해야 하니까 루카 씨를 찾는다는 건가요?
아슬란: 네……. 완성되면 이 세계는 닫히고, 이 책은 환영만 떠오르는 그림 나무가 됩니다. 저희가 여기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건 아직 그림책은 완성되지 않은 거예요. 루카는, 분명 이 세계에 어딘가에…….
오즈: ……그 아이라면 저기에 있다.
오즈가 보고 있는 것은 펼쳐진 꽃밭의 끝. 꽃들이 쌓아올린 주춧돌 같은 곳이었다.
15화
채도가 낮은 세계 속에서 그곳만이 이상하게 색다르고 생생하다. 중앙에 커다란 꽃고치 같은 것이 우뚝 솟아 있었다. 중심으로 감싸이듯 잠든 것은…….
아슬란: 루카!
화사한 꽃 속에서 루카 씨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달려가려는 아슬란 씨를 피가로가 막는다. 곁에 있던 스노우와 화이트도 눈살을 찌푸리며 꽃을 올려다보았다.
스노우: 음, 이건…….
피가로: 꽤 곤란하네요.
화이트: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루카 씨의 표정은 안심한 듯 평온했다. 그러나 그 뺨에도 입술에도 핏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꽃관에 담긴 밀랍인형 같다.
오즈: 이상하군. 이 아이, 마음이 삼켜지고 있다.
스노우: 흠. 아무래도 이 딸의 마음은 예전부터 이 그림책의 세계와 긴밀하게 접해져 있었던 것 같군.
화이트: 그림책을 계속 그리다가 세계에 잠기는 사이 경계선을 잃은 걸지도 모른다.
루틸: 피가로 선생님……. 루카는 괜찮은 건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피가로: 글쎄. 나도 도와주고는 싶지만…….
피가로의 말에 루틸이 파랗게 질린다. 나도 핏기가 빠졌다.
아서: '거대한 재앙' 과의 관계는?
파우스트: 없다고도 단언할 수는 없군. 이 세계에 심취하여 매혹되는 것을 액재의 힘이 뒷받침한 걸지도 몰라.
무르: 아하하. 역시 사건이 일어났어!
시노: 일단 이 녀석을 꽃 속에서 끌어낼까?
미스라: 뭐, 그게 훨씬 빠르죠. 그냥 그림책 속에서 끄집어내요.
오즈: 함부로 손대지 마라. 마음이 이 자리에 있다면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만…….
스노우: 음. 지금 여기 있는 딸은 거의 껍데기나 마찬가지.
화이트: 그러나…… 이 세계의 곳곳에서 딸의 기척이 난다.
샤일록: ……즉.
꽃고치를 들여다본 샤일록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샤일록: 마음이 몸에서 떨어져 버린 그녀를 억지로 여기서 끌어내는 짓을 해버린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거군요.
스노우: 아마도. 이 아이는 물론 이 아이의 마력을 유지하고 형성된 이 세계에도 영향을 주겠지.
화이트: 산산조각으로 붕괴해 버릴지, 왜곡되어 비틀어 버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팔짱을 끼고 생각하는 쌍둥이의 말에 호응하듯이 느닷없이 희미한 방울소리가 들렸다. 번쩍 작게 빛이 깜빡이고 우리 앞에 무지개빛 비늘 가루를 감싼 신기한 생물이 불쑥 나타난다.
무르: 아! 혹시 저게 그때 회장에 있던 반짝반짝의 정체?
나는 그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아서에게 빌린 그림책에 그려져 있던 생물. 여기에 올 때까지 몇 번이나 부르던 이름을 다시 부르려고 할 때, 그 아이가 나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따. 그것은 분홍색으로 빛나는 보석 같은 것.
분홍색…… 진주?
내가 그것을 받아들자 진주는 빛나고 번쩍 빛이 났다. 누군가의 기억 같은 것이 흘러들어온다…….
따뜻한 날, 웅덩이 속. 지금보다 훨씬 어린 루카 씨와 푹신한 무지개 생물이 장난을 치고 있다.
루카: 저기, 록시. 너는 이 꽃을 좋아해?
어린 루카 씨는 그 생물을 록시라고 불렀다. 사랑스럽게, 몇 번이고. 록시라고 불리던 이상한 생물도 그 부름에 부응하듯 즐겁게 날아다니고 있다.
루카: 록시가 가장 좋아하는 꽃의 꿀, 내가 같이 찾아줄게.
얼마나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기억인지……. 주홍빛이 잦아들자 흘러들던 기억도 쑥 사라진다.
미틸: ……지금 건?
리케: 뭐랄까, 머릿속에 환영이 들어온 것 같은…….
마법사들이랑 아슬라 씨에게도 보인 것 같다. 눈을 동그랗게 뜬 아스란 씨가 동동 떠다니는 그 신기한 생물에게 말을 걸었다.
아슬란: 록시.
아슬란: 그렇구나……. 네가 록시구나. 루카가 자주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향해 그 이름을 불렀었어. 즐겁게, 사랑스럽게. 아아, 드디어 만났구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녀의 이상한 친구와…….
록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케: 그림책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아이는 그림이 아니죠? 날대라던가, 푹신한 털의 느낌이…….
미틸: 네, 진짜예요! 왜 우리에게도 보이는 걸까요?
루틸: 이 아이도 보통은 보이지 않는 환수인 거죠……?
피가로: ……이 세계의 영향인 걸까? 여기는 루카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니까. 여기 있는 동안은 그녀의 시각과 감각을 공유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록시는 아슬란 씨의 어깨 둘레를 둘러본 뒤, 내 팔에 달려와 매달리듯 올려다본다.
브래들리: 오웬, 네 차례다. 얼른 해결해버리자고.
오웬: 하? 왜.
브래들리: 저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봐. 뭔가 호소하는 분위기잖아.
오웬: 싫어. 귀찮아. 왜 내가 그런 걸…….
록시가 뭔가를 짐작한 듯 오웬 주위를 빙글 돌기 시작한다. 반짝 방울 같은 소리가 울렸다.
오웬: ……흐응.
루틸: 오웬 씨……. 록시가 뭐라고 했나요?
오웬: 별거 아니야. 그 여자의 심장을 도려내서 먹어버리면 된대.
미스라: 뭐야, 쉽잖아요. 그럼 당장…….
카인: 잠깐, 기다려!
미스라, 스톱……!
미틸이 미스라의 팔에 매달렸고, 루틸이 미스라의 입을 양손으로 막았다.
미스라: 애 막라요? 왜 막나요?
카인: 나는 록시의 말은 모르지만, 이 아이는 루카의 친구잖아. 그런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아.
오웬: 글쎄, 어떠려나. 무해한 외모에 속고 있을 뿐일 거야.
록시가 몸을 부르르 떤다.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도 이 아이의 말은 잘 모른다.
오웬…… 부탁드려요. 사실대로 알려주세요.
오웬: 그러면 대가로 뭘 줄 거야? 공짜로 시킬 셈은 아니지?
음……. 단 과자를 잔뜩 준비할게요. ……네로와!
네로: 어이어이, 현자 씨.
죄, 죄송해요. 저도 힘껏 도와드릴 테니까…….
오웬: 과자가 있으면 내가 말을 들을 것 같아? 내가 만만하게 보이는 거네.
얼마든지 무한 리필로 준비할게요! 오웬이 정말 좋아하는 과자를 뭐든지, 좋아하는 것만…….
카인: 그러면 나도 도와줄게. 오웬의 만족할 만한 양의 크림의 거품을 내면, 아키라의 팔이 아플 테니까.
네로: ……아아, 알았어. 나도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오웬: ……흥.
오웬은 몸을 뒤로 젖히고는 변덕스럽게 중얼거렸다.
오웬: '이 그림책 속에 그려진 다섯 마리의 환수가 루카의 기억의 조각을 감추고 있어. 그걸 찾아서 루카에게 돌려주고 싶으니까, 도와줘.' 라고 하는데.
레녹스: 기억의 조각……?
파우스트: 생소한 말이군. 찾아서 돌려준다는 것은 실체가 있다는 건가?
그런데 어째서 숨긴 걸까요…….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나요?
오웬: 글쎄.
샤일록: …….
등 뒤에서 은은하게 장미 향이 난다. 내가 손에 든 분홍색 진주를 관찰하듯 샤일록이 들여다보았다.
샤일록: 혹시 이 분홍색 진주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무르의 영혼의 조각과 같군요. 하나로는 불완전하고, 원래 하나였던 것이 이유가 있어서 뿔뿔이 흩어져 버린…….
무르: 정말 나 같다! 나도 영혼이 부서져서 여기저기 날아간 것 같고.
피가로: 즉, 이 세계에서 곳곳에서 느껴지는 기색은 흩어진 그녀의 기억의 조각이라는 것?
파우스트: 뿔뿔이 흩어져 버린 기억…… 인가. 어린 마음에는 상당한 부담이겠지.
루틸: 무슨 뜻인가요……?
파우스트: 기억이란 본래 연결되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끊어져서 존재하고 있는 것은 루카의 마음 붕괴의 전조일지도 몰라. 너는 어떻게 생각해, 오즈.
오즈: 너의 견해대로겠지. 마법은 마음으로 쓰고, 기억은 마음에 작용한다. 몽상했던 세계의 붕괴에 이끌려 그 딸의 기억과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루틸: 그런……! 빨리 기억의 조각을 모아서 루카에게 돌려줘야 해!
미틸: 네! 그 환수 님들을 찾아서 조각을 돌려받아요.
파우스트: 말을 알아듣는 상대라면 좋겠지만, 마력은 커녕 모습조차 알 수가 없으니.
레녹스: 게다가 이 세계는 꽤 광대한 것 같고, 다섯 마리나 있다고 하면…….
그때 바스락 소리가 난다. 꽃 고치가 루카 씨를 더욱 덮으려는 듯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슬란: 루카……!
아슬란 씨가 손을 뻗는데 힘차게 날아온 덩굴에 머리를 맞는다.
아슬란: ……으윽!
넘어지는 아슬란 씨를 히스클리프가 받아들인다.
히스클리프: 아슬란 씨……!
괜찮나요……!?
나와 루틸이 아슬란 씨에게 달려가는 한편, 다가오는 담쟁이 덩굴을 향해 아서가 손바닥을 치켜든다.
아서: '파르녹턴 닉스지오!'
아서의 마법을 받고 담쟁이 덩굴이 번쩍 튄다. 순간, 세계가 크게 흔들렸다. 위력을 더한 담쟁이 덩굴이 경쟁하듯 덤벼든다.
아서: ……!
오즈: '복스노크'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주문을 외웠다. 아서가 마법으로 오즈에게 이끌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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