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히스, 괜찮을까……)
홍차를 흘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어 히스클리프의 방 앞까지 왔다. 그의 모습이 신경 쓰였던 나는 홍차를 옮기려던 하녀에게 부탁해 그 역할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혹시 잠들어 있을지도 몰라. 그때는 바로 나오자.)
노크하려고 할 때, 문이 약간 열려있는 것을 깨닫는다. 그 틈으로 방안의 모습이 보인다.
(……아.)
히스클리프는 침대 속에서 몸을 일으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턱을 괴고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듣는 것처럼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매끈한 곡선을 그리는 단정한 옆모습은 잠든 밤보다 훨씬 조용해, 그대로 빗속으로 녹아내릴 것 같다. 그 광경은 매우 신성해 보여 잠시 말을 거는 것을 잊어버렸다.
히스클리프: ……현자님?
그가 먼저 이쪽을 알아차렸다. 그대로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기 때문에 나는 황급하게 달려갔다.
아, 그대로 있어주세요……!
죄송해요. 휴식하고 있는 걸 방해할 생각은…….
히스클리프: 그런. 저야말로 이런 모습이라 죄송합니다. ……아, 혹시 홍차를 가져다 주신 건가요?
하녀의 일을 받았어요. 히스가 어떻게 있을까 신경 쓰여서……. 홍차만 드리고 바로 나갈게요.
히스클리프: 신경써주져서 감사합니다. 차까지 부탁드려서…….
히스클리프는 미안한 듯 눈썹을 숙였다. 그리고 엿보듯 푸른 눈동자를 살며시 이쪽으로 향한다.
히스클리프: ……저, 조금 진정 되었으니 괜찮으시다면 함께 차를 마시지 않겠나요?
괜찮나요? 그러면 조금만…….
홍차의 따뜻한 향기가 컵에서 피어오른다. 한 모금 마시고는 안심이 된 듯 둘 다 숨을 내쉬었다.
히스, 안색이 좋아졌네요. 조금 안심이 되었어요.
히스클리프: 파우스트 선생님께서 말씀하셔서 마력을 회복하고 있었습니다. 마나 에어리어에서 쉬는 것이 제일 좋다고.
마법사는 각각 마나 에어리어라고 불리는 자신만의 파워 스팟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마음을 가라앉히거나 마력을 회복하기 위한 마음에 드는 장소다.
그러고 보니 히스의 마나 에어리어는 비오는 날의 침대 안이었죠.
히스클리프: 네.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의식이 맑아져서 마력이 스며드는 느낌이 들어요.
회색 하늘은 그때부터 계속 울고 있다. 빗줄기는 점점 세지고 있었다. 히스클리프는 창밖 쪽을 보며 눈을 감았다.
히스클리프: ……아까는 보기 흉한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오즈 님의 말에 동요해 버려서요.
히스…….
묵직한 오즈의 말이 되살아난다. '시노에게 저주를 건 것은 히스클리프일지도 모른다.'
히스클리프: 무서웠어요.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무의식적으로 시노를 묶어버리고 있는 자신을 알 수 없게 되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서……. 조급하면 조급해질수록 마력이 불안정해지는데. 저 때문에 시노가 큰일이 난 걸지도 모르는데, 정말 한심해…….
그런……. 히스 때문에 그런 거라고 결정된 건 아니에요. 게다가 무의식이라고 해도, 저 상자에 대한 건 짐작도 가지 않는 거죠?
히스클리프: ……네.
살짝 말문이 막힌 히스클리프가 할 말을 찾듯 시선을 방황한다.
히스클리프: 어제의 훈련도 아까의 일도, 발만 동동 구르는 자신에게 싫증이 나요. 저는 마법사인데. 중요할 때 소중한 친구도 구할 수 없어…….
짜낸 목소리에 어쩔 수 없는 억울함이나 초조함이 배어 있었다. 마음도 몸도 내 것인데, 마치 내 뜻대로 되지 않아. 강하고 씩씩한 누군가처럼 항상 흔들리지 않는 나도 될 수 없다. 그것은 나에게도 뼈아픈 아픔이다.
……그렇지 않아요.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에 흔들리고, 마음도 안정되지 않는 거예요. 히스는 한심하지 않아요. 그러니 부디 자신을 엄하게 책망하지 말아주세요.
전하지 못하는 자신의 말이 답답해 히스클리프의 손을 잡았다. 그를 괴롭히는 불안과 실망이 아주 조금이라도 사라지도록.
히스클리프: 현자님…….
히스클리프는 약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서 눈썹을 숙이고 약하게 웃었다.
히스클리프: 사실 제가 이렇게 된 것은 처음이 아니에요. 전에도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눈이 한 번 감긴다. 다음에 떴을 때, 하늘색 눈동자는 지금이 아닌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히스클리프: 오란졔리에 있던 오렌지 나무가 잘려나갔을 때예요. 당시 저에게 그 오렌지 나무는 소중한 친구였습니다. 그걸 잃어버려서 잠시 틀어박혀버렸죠. 그때는 시노가 열심히 위로하고 격려해줘서…… 어느새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노가…….
히스클리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름다운 눈썹이 일그러진다.
히스클리프: ……현자님. 시노가 갇힌 건 정말로 저 때문일지도 몰라요.
에……?
계속해서 내리는 비가 유리창을 세차게 두드리며 노래한다. 우산 없이 뛰쳐나가면 분명 속수무책으로 흠뻑 젖어버릴 것이다.
히스클리프: ……한심한 김에, 조금만 더 옛날 이야기를 들어주시겠나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히스클리프는 두툼한 페이지를 넘기듯 살며시 말하기 시작했다.
7화
히스클리프: 오늘 아침에도 말씀 드렸지만, 시노를 만나기 전의 저에게는 친구라고 부를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마법사라는 것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시기였기에……. 대신 머릿속으로 자신을 많이 닮은 모습을 가진 친구를 사귀고 있었어요.
히스클리프: 물론 가공의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오란졔리 안에서만. 자기 안에서 룰을 정했어요.
……비밀 친구였군요.
히스클리프: 네. 거기서만 만날 수 있었던 특별한 친구였어요.
어린 히스클리프는 그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아무도 없는 오란졔리에 들어가 공상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오렌지 나무에 기대어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들려주고. 작은 고민거리를 털어놓기도 하고.
히스클리프: 그러다보니 어느새 오렌지 나무도 저에게 말을 걸어주더라고요. 어렸을 때의 기억이고, 분명 기분 탓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저에게는 확실히 그렇게 들렸습니다. 정말로 친구가 되어줘서, 기뻐서…….
어른들이 보기에 남다른 놀이라도, 아이들에게는 마음을 맡기는 담요같은 근거지가 된다. 히스클리프에게 있어서 오렌지 나무는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소중한 친구였다.
히스클리프: 그러고 나서 나중에 저는 시노를 만났습니다. 오렌지 나무 말고 사귄 친구는 처음이라, 그에게도 시노 얘기를 많이 했었거든요. 언젠가 시노에게도 그를 소개하고, 셋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히스클리프는 수줍게 웃으며 컵의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더듬는다.
히스클리프: 시노라면 알아줄 줄 알았는데,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가상 친구가 있다고 털어놓는 것이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오렌지 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그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수줍은 그에게 이끌려 나도 웃었다. 과감한 일을 털어놓기까지 내 안에서 기간을 두는 것은 나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표정에 약간 그늘이 드리웠다. 멍하니 참회처럼 아픈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히스클리프: ……하지만, 오렌지 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어요. 마법을 걸어도 물이나 비료를 줘도 건강해지기는커녕, 나날이 말라가고……. 스승님이 짐을 놓는데 그 자리를 빌려달라고 했을 때도 저는 반대의 소리조차 내지 못했어요.
컵을 든 그의 손이 떨리고 홍차의 표면이 흔들린다.
히스클리프: 시들해진 오렌지 나무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잘려 나갔습니다. 친구라고 생각했으면서…… 겁쟁이의 그늘에 가려 저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어요. 이렇게 끝나 버렸기 때문에, 저는 시노에게 그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침묵이 찾아오면 빗소리가 한층 더 크게 존재감을 갖는다.
원망하고 있다. 울고 있다. 이 빗소리는, 히스의 귀에 어떤 식으로 들리고 있을까.
히스클리프: 어쩌면 그 나무는 저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복수를 위해서, 저에게서 시노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상자 속의 광경은, 분명히 제가 전에 떠올렸던 것이에요. 제가 몇 번이나 오렌지 나무에게 얘기했던, 제 꿈이요.
히스클리프: 그러니 기억의 상자가 저런 광경을 재현해 보여줘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더니 마법을 잘 사용할 수 없게 되어…….
히스…….
파우스트: 네가 못하면, 내가 시노를 구한다.
어느새 방 입구에 파우스트가 서있었다.
파우스트?
히스클리프: 선생님……!
파우스트: 지금으로서는 상자에서 나쁜 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그렇게 느긋하게 있을 수는 없어. 육체와 분리된 정신은 노가 없는 뗏목과도 같다. 이대로 정신과 육체가 떨어진 상태가 계속되면 연결이 끊길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시노의 의식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늦기 전에 대처해야해.
담담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경질적이고 엄하다. 파우스트는 히스클리프를 응시했다.
파우스트: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지. 그래도 회복이 안 될 것 같으면, 내가 상자의 저주를 푼다.
히스클리프: …….
히스클리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풀면 저주가 간다고…….
파우스트: 히스나 시노에게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일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가 모든 책임을 질게. 너는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마.
그렇게 말하고 파우스트는 발길을 돌렸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진다.
히스클리프: …….
손 안에서 마시던 홍차는 완전히 열을 잃고 있었다. 빗소리는 아직 그치지 않는다.
파우스트: ……!?
네로: 우왓! ……뭐야, 선생인가.
파우스트: 네로? 왜 그래. 이런 곳에서 어슬렁거리고…….
네로: 아니, 잠깐…….
파우스트: ……히스라면 현자와 함께하고 있다. 아직 좀 어려운 상태인 것 같아.
네로: ……그렇군.
파우스트: 그 아이는 좋든 나쁘든 사려 깊어. 돕고 싶은 상대…… 친구이기 때문에 마음이 흐트러지고 힘겹겠지. 만약의 경우느 ㄴ내가 치운다. 그때는 너도 힘을 빌려줘.
네로: 아아.
네로: ……히스, 견뎌내라.
그날 밤.
히스클리프: …….
시노: …….
히스클리프: 역시 잠들어 있구나.
아서: …….
리케: ……쿨…….
히스클리프: 아서 님, 리케……. 계속 시노를 봐주고 있었어.
히스클리프: (조금만 더 가까이서 시노의 모습을 봐도 되려나. 두 사람을 깨우지 않게……)
???: 와!
히스클리프: !?
카인: 여, 놀랐어?
히스클리프: 카인!?
히스클리프: 하아…… 깜짝이야.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했어.
카인: 미안 미안. 사소한 장난이야.
히스클리프: 카인도 시노를 봐주고 있었구나.
카인: 아아. 아서도 리케도 깨어날 기미가 안 보인다고, 교대로 망을 보기로 했어.
히스클리프: 그렇구나……. 나만 쉬어서 미안하네.
카인: 신경 쓰지 말라고. 친구잖아. 시노도 히스도.
히스클리프: 고마워…….
히스클리프: ……사실 내일, 파우스트 선생님이 시노를 구해주실 것 같아.
카인: 파우스트가?
히스클리프: 선생님은 원래 내가 져야 할 책임을 대신해주시는 것 같아. 그 마음은 매우 기쁘지만…… 나도 알아. 이것 만큼은 양보해서는 안 돼.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가 시노를 구하러 가야 해. 나 자신이 그러고 싶어. 내 손으로 시노를 돕고 싶어. 시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나로 있고 싶으니까.
카인: ……그래.
히스클리프: 와앗.
카인: 이런, 너무 세게 했나?
히스클리프: 방금 대사 엄청 멋있었어. 시노에게 알려 주면 놓친 것을 분명 후회하겠지. 왜 안 깨웠냐며 불평하기 전에 빨리 데리러 가자고.
카인: 카인…….
8화
카인: 나는 히스클리프 블랑셰를 믿어. 히스도 자신을 믿어줘. 네가 시노를 저주할 리가 없잖아. 너라면 반드시 구할 수 있어.
히스클리프: 응.
히스클리프: ……있잖아, 만약 먼 옛날에 어색해졋던 친구와 오랜만에 재회하게 된다면, 카인이라면 어떻게 할래?
카인: 나라면? 그렇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그때는 미안했어! 라고 말을 걸려나?
히스클리프: ……아하하! 카인답네.
아서: 누군가와 화해하러 가는 거야?
리케: 과자를 가지고 사과하는게 좋아요. 미틸은 항상 그러거든요.
히스클리프: 아서 님, 리케!?
카인: 뭐야. 둘 다 깨어있었어?
리케: 카인의 목소리가 커서 깼어요.
카인: 이상하네. 나는 작은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아서: 히스클리프, 이야기는 들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뭐든지 말해줘.
리케: 시노를 돕는 데 저희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히스클리프: 모두들…….
히스클리프: 그러면 지금부터 마법의 훈련에 어울려줄 수 있어?
아서 / 리케 / 카인: 물론!
다음 날 아침, 어느새 비는 그치고 있었다. 페인트칠을 막 한 듯 번쩍이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다. 상자에서 시노를 구하기 위해 파우스트, 오즈, 네로, 나 네 사람이 오란졔리 앞으로 왔다.
여기서 저주를 푸는 건가요?
파우스트: 기억의 상자와 결부력이 강한 곳이 마법이 더 잘 작용할 테니까. 네로, 오즈. 무슨 일이 생기면 서포트를 부탁하지.
오즈: 아아.
네로: 알았어.
히스클리프: 기다려 주세요!
히스……!
파우스트: 너희들…….
아서: 다행이다. 제시간에 온 것 같네.
히스클리프와 다른 마법사들이 빗자루를 타고 온다. 모두들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로: 너희들, 혹시 안 자고 있었나?
우리와 하이파이브를 나누면서 카인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카인: 잠을 자긴 했지. 밤샘은 조금 했지만.
히스클리프: 내 마법 훈련에 늦게까지 어울려 줬거든.
마법 훈련?
오즈: 그런 짓을 하고 있었나.
아서: 네. 모두와 함께.
리케: 비밀의 특훈이에요!
파우스트 쪽을 향하여 히스클리프는 얼굴을 다잡았다.
히스클리프: 파우스트 선생님, 부탁드립니다. 제가 하게 해주세요.
파우스트: ……그런 상태로 괜찮은가?
히스클리프: 괜찮습니다. 게다가 시노를 돕는 건, 친구이자 주군인 제 몫이니까.
파우스트: …….
파우스트는 손바닥에 만든 슈가를 히스클리프에게 주었다. 그가 그것을 입에 넣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 상자를 건넨다.
파우스트: 해 봐.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서포트 하지.
히스클리프: 네……!
마음을 정한 듯 입을 꼭 다물고 입을 연다. 자신에게 타이르듯 작은 소리로 히스클리프는 중얼거리고 있었다.
히스클리프: 이번에야말로…….
오란졔리 안은 마법 도구가 몇 개 놓여 있는 정도로, 상상하는 것보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여기가…….
네로: 싫은 기척은 안 느껴지네.
카인: 오히려 기분 좋을 정도야.
저주가 소용돌이치는 듯한 불온함은 전혀 없었다. 창문으로 햇살이 잘 들어오는 밝고 따뜻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히스클리프: …….
가장 햇볕이 드는 곳에 작은 나무 그루터기가 있었다. 히스클리프가 그 앞에서 멈춰선다.
파우스트: 절차는 어제와 같다. 상자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의식을 보내는 느낌으로 주문을 외워. 너의 마음과 상자가 연결되는 것을 상상하는 거야.
히스클리프: 네. 해볼게요.
히스클리프는 손에 상자를 얹고 눈을 감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조심스럽게 주문을 입에 올린다.
히스클리프: '레프세바이브러프 스노스'
아서 / 리케 / 카인: …….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자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서서히 히스클리프의 얼굴에 초조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히스클리프: ……안되나…….
히스……!
순간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어제 그의 기운을 차리게 했을 때처럼 정신없이.
저도 도와드릴게요. 반드시 시노를 구하러 가요.
깜짝 놀란 듯 히스클리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다시 잡았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주문을 외운다.
히스클리프: '레프세바이브러프 스노스!'
나도 마음속으로 강하게 외쳤다. 무엇에 대해서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냥 기도했다.
(제발, 잘 되기를……!)
그 순간, 상자가 움직이고 일곱 빛깔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빛이 사라지고 눈앞에 경치가 들어온다.
아까와 똑같은 것 같고, 아까와 다른 경치. 아침이었을 터인데 노을빛이 큰 창문을 통해 비치고 있다.
……?
히스클리프: …….
나도 따라와버린 것 같다. 상자 안은 실제 오란졔리보다 넓게 느껴졌다. 뭔가를 찾듯이, 히스클리프는 고개를 돌렸다.
히스클리프: ……오렌지 나무.
덩달아 뒤돌아보니 푸르스름하게 우거진 나무가 서있다. 상자에서 본 오렌지 나무다. 그 밑에는 낯익은 뒷모습이 있었다.
히스클리프: ……시노!
불린 등이 되돌아본다.
시노: 여어. 드디어 왔나.
현자 / 히스클리프: ……에?
우리는 눈을 깜빡였다. 시노는 약한 모습도, 저주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도 아니었다. 맥이 빠질 정도로 평소의 모습이었다.
9화
시노: 생각보다 늦었네. 기다리다가 지칠 뻔했어.
저, 저기……. 시노는 상자 안에 갇혀있었던게 아닌가요……?
시노: 뭐야 그게. 그럴 리가 없잖아.
히스클리프: 뭐야 그게……. 너, 밤새 잠든 채로 있었다고!?
시노: 하룻밤? 의외로 지났네.
시노는 의외라는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시노: 그날 밤, 오란졔리의 문을 여는 순간 끌려 들어왔는데 그것 뿐이였어. 나가려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한테 옛날 얘기를 듣는 게 재밌어서 지금까지 얘기하고 있었거든.
히스클리프: 이 녀석?
시노: 히스, 내 얘기도 많이 했다면서?
안뜰에서 서서 이야기 할 때처럼 웃고 있다.
시노: 들었어. 너희들, 오랜 친구잖아.
시노: 이 녀석은 히스가 다시 만나러 오기를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대. 그래서 오랜만에 오란졔리의 문이 열렸을 때 히스인 줄 알고 끌어들인 것 같아. 나한테 너의 기척이 옮았나본데.
히스의 친구…….
눈을 뜨면 오렌지 나무 앞에 어느새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히스클리프와 많이 닮았다. 지금의 그가 조금 나이를 먹은 듯한 모습이다.
(이 사람은……)
히스클리프: 혹시, 그때의 오렌지 나무……?
멍하니 히스클리프가 묻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노: 너,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네. 히스는 소극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편이지만 최고로 멋진 나의 주군으로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어.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우리들은 운이 좋구나.
그는 시노와 나를 보고 나서 히스클리프의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바람도 없는데 오렌지 나무의 가지와 잎이 바스락바스락 가볍게 흔들린다. 히스클리프르 진심으로 환영하며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아, 그런가……)
원망이 아니야. 오렌지 나무는 만날 수 없게 된 히스클리프를 계속해서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려도, 땅에 뿌리내리지는 못해도, 사랑스러운 기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작은 친구들과 보낸 해질녘 시간을, 둘도 없는 양식으로.
히스클리프: …….
히스클리프의 뺨과 입은 떨리고 있었다. 그것들을 힘껏 움직여 미소를 짓는다.
히스클리프: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그때는 미안했…….
밝은 목소리는 도중에 막혔다. 히스클리프의 얼굴이 울기 직전의 어린 아이처럼 찌그러진다.
어제 히스클리프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자기와 시노, 오렌지 나무. 언젠가 셋이서 이야기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오렌지 나무가 시노를 끌어들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친구가 말했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히스클리프: 미안해……. 그때 도와주지 못해서…….
히스클리프: 나, 계속 후회했어. 너를 또 만나고 싶었어. 제대로 사과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까지 눈을 돌리고 있었어……. 나를 만나고 싶어해줘서 고마워. 다시 만나서 나도 너무 기뻐. 정말로, 기뻐…….
히스클리프가 열심히 연결한 말에 오렌지 나무를 귀룰 기울이며, 하나하나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라는 듯이, 인자하게. 그 표정은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상냥하고, 온실에 비치는 석양처럼 따뜻했다.
히스클리프: 사실은 너와 조금 더 천천히 얘기하고 싶지만, 이대로라면 시노가 위험해.
시노: ……그래?
네. 실은 꽤 위험한 느낌이라서…….
히스클리프: 일단 지금은 서둘러서 돌아가야 해.
오렌지 나무는 온화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조금 쓸쓸해 보이지만, 너무나도 따뜻한 미소로. 다시 부드러운 바람이 분다. 그의 말이 들렸는지 히스클리프의 푸른 눈동자가 조용한 수면에 빗방울을 떨어뜨린 듯 약간 물결쳤다. 하지만 뿌리치듯 미소를 짓고, 밝게 고한다.
히스클리프: 그래도 꼭, 다시 만나러 올게.
히스클리프는 시노와 내 손을 잡고 주문을 외웠다. 왔을 때와 같이 일곱 빛깔이 천장에서 쏟아진다. 그 빛 속에서 오렌지 나무의 그는, 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곳은 원래의 오란졔리였다. 이쪽을 바라보는 걱정스러운 마법사의 얼굴이 보인다.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노는!?)
히스클리프: 시노……!
히스클리프는 튕긴 듯 외치며 오란졔리를 뛰쳐나갔다.
시노: ……응……?
시노: 아아, 돌아온건가.
히스클리프: 시노!
시노: 히스, 드문 일이잖아. 네가 창문으로 들어오다니. 그러고 보니 옛날에 비슷한 일이 있었네. 기억나? 그때는 내가 빗자루를 타고 히스의 방에 가서 놀래켰었잖아. 지금이랑은 딱 반대네.
히스클리프: ……다행이다…….
시노: 왜 그래, 갑자기 무너져내리고. 배라도 아픈 건가?
히스클리프: 하아……. 얼마나 걱정했는데……. 애초에 왜 혼자서 오란졔리에 간 거야.
시노: 히스가 자는 동안 몰래 치우고 아침에 깨끗해진 오란졔리를 보여주려고 했어. 거기는 네가 옛날부터 신경 썼던 곳이니까.
히스클리프: ……정말이지, 바보라니까.
히스클리프: 그래도 고마워. 어서 와, 시노.
10화
결국 그 상자와 오렌지 나무는 뭐였을까요…….
파우스트: 글쎄. 오렌지 나무의 사념이 상자로 옮겨진 결과, 친구와의 재회를 이루었다……. 내가 아는 건 그것 뿐이야. 어쩌면 '거대한 재앙' 의 영향도 다소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진실은 알 수 없어.
히스클리프와 내가 돌아온 후, 상자는 하얗게 변해 있었다. 상자에서 느껴졌던 희미한 마력도, 히스클리프의 기척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오렌지 나무도.
(……그 광경을 원했던 것은 분명 히스클리프 뿐만이 아니야. 히스클리프를 소중히 여기는 오렌지 나무도 같은 생각이었을지도 몰라)
두 사람의 마음을 형상화한 상자는 이제 텅 비어 있다. 하기만 확실한 것은, 히스클리프와 그의 소중한 친구들은 꿈 같은 오란졔리 속에서 서로 웃고 있었다.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져서 그 경치는 역할을 끝낸 걸까……)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는데 카인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카인: 히스가 또 오란졔리에 오렌지 나무를 심는다고 했어. 이번에야말로 뿌리내리겠대.
……! 그런가요.
해질녘 오란졔리에 선 커다란 오렌지 나무. 상자에서 본 그 광경은 언젠가 찾아올 미래가 된다. 꿈도 환상도 아닌, 히스클리프가 그의 손으로 이뤄낸다. 분명 그때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그립고 소중한 비밀스러운 친구를.
카인: 그렇게 딱딱해지지 말라고.
아서: 우리와의 훈련을 떠올려봐.
리케: 괜찮아요, 저희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히스클리프: 으, 응……!
긴장한 히스클리프를 중앙의 마법사가 격려하고 있다. 시노가 무사히 돌아와 예정보다 늦으면서도 수호 마법의 훈련이 재개되려고 하고 있다.
네로: 준비 됐어?
시노: 간다.
동쪽 마법사들은 서로 말을 걸며 마도구를 꺼낸다.
시노: '맛차 스디파스'
네로: '아도노디스 오므니스'
시노와 네로에 이어 히스클리프도 주문을 외웠다.
히스클리프: '레프세바이브러프 스노스!'
세 사람의 마법이 빛을 발하며 한 점에 집중했다. 직후, 빛은 큰 원이 되어 블랑셰 성을 감쌌다.
아서 / 리케: !
이건…….
카인: 성공이다!
히스클리프: 됐다!
와아 하고 함성이 오른다. 기쁨에 겨운 가운데, 가장 큰 소리를 지른 것은 히스클리프였다. 그걸 보고 다들 무심코 웃는다.
히스클리프: ……앗.
흐뭇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히스클리프는 뺨을 묽히며 높이 든 한 손을 서서히 내렸다.
시노: 흐흥. 어때, 오즈. 불평 없지?
오즈: '복스노크'
블랑셰 성에 번개가 친다. 유리가 깨지듯 수호 마법이 순식간에 파괴된다.
동쪽의 마법사들: 아!?
동쪽 마법사들의 망연자실한 모습에 중앙의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서: 알지, 그거.
카인: 우리도 예전에 당했을 때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리케: 정말이지, 오즈는 너무해요.
오즈: 그런 훈련이다.
시노: 모처럼 히스가 마법을 성공 시켰는데……. 열 받았어. 이렇게 된다면 내가 상대해주지.
히스클리프: 어, 어이, 시노!
네로: 어이, 그만둬. 주군의 성에서 날뛰지 마.
시노: 주군의 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수호 마법을 부쉈다니까?
오즈: 저 정도의 마법으로는 성을 지킬 수 없어.
시노: 뭐라고?
히스클리프: 시노, 진정하라니까!
네로: 오즈도 너무 부추기지 마.
오즈: 사실이다.
네로: 그러니까, 그게 부추기는 거라고…….
파우스트: …….
시끄러운 학생들을 말리지도 않고 파우스트는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 있다.
괜찮나요, 파우스트. 말리지 않아도.
파우스트: 오늘은 오즈의 수업이다. 나는 견학이야.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그들을 지켜보는 보라색 눈동자는 매우 상냥했다. 험난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그 모습이 말해준다. 시끌벅적하고 낯익은 일상이 이제는 이렇게 반갑다.
카인: 시노, 힘내자고. 블랑셰 성을 지키기 위해서야.
히스클리프: 맞아. 시작한지 얼마 안됐으니까.
네로: 네가 그렇게 하고 싶어했던 실기잖아. 돌아가면 뭐라도 만들어줄게.
시노: 쳇…… 좋아. 눈에 새겨주겠어. 어이, 다음이야말로 오즈가 깨지 않는 수호 마법을 걸자고!
히스클리프: 응!
벼르는 시노 옆에서 히스클리프가 우리를 돌아본다. 상자에서 손을 흔들던 친구를 많이 닮은, 맑은 미소를 지은 채.
히스클리프: 다시 해볼게요. 두 분, 지켜봐 주세요!
뒤돌아본 자리에는 실수가 있다. 상처도 있고, 넘어진 흔적도 있다. 겁에 질린 자신도 있다.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어도,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도, 누군가의 손을 다시 잡을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다음엔 분명 잘 될거야.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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