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만삭의 의식을 거행하는 장소이기도 한 연못은 마을 한복판에 있었다. 연못이라기보다는 거의 호수라고 해도 되는 크기다. 투명한 물속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말로만 듣던 신령이라 불리는 이무기가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웬: 저기, 신령님? 나랑 수다 좀 떨자. 만삭 의식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
오웬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외치자 갑자기 몇 미터나 될 것 같은 갸름한 그림자가 떠오른다. 잠시 후, 천천히 푸르스름한 거구의 이무기가 수면에서 얼굴을 살짝 내비쳤다. 크기는 무섭지만 눈빛은 온화하여 어딘가 거룩함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다.
오웬: 여, 신령님. 당장 만삭 의식의 유래를 알려줘.
신령님: …….
오웬: 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어? 네가 말하면 빨리 끝날텐데.
오웬: ……됐어. 대신, 끝나면 두고 보자.
어, 어땠나요. 오웬?
오웬: 바탕이 된 일들은 알지만 알고 싶다면 올해의 만삭 의식을 거행하래. 마을 사람들이 중지한다고 하는 걸 들었던 것 같아.
그것은, 신령이 축제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인가요?
오웬: 현자님을 제물로 해서 당장 가르쳐 달라고 하는 건 어때?
에, 사양할게요.
스노우: 어찌됐든 만삭의 의식을 치를 수 밖에 없을 것 같구먼.
화이트: 우리가 협력하는 것이니까 틀림없이 훌륭한 축제가 되겠지. 연못의 신령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좋을거다.
그렇네요. 저도 기대돼요!
에마: 라라라~ ♪
히스클리프: ……예쁜 모양이네. 한 짜임 한 짜임 정중하고, 섬세함이 느껴져.
시노: 베를 짜는 건 처음 보는데, 뭐가 어떻게 되는지 보고 있어도 모르겠네. 히스는 알아?
히스클리프: 나도 전문가가 아니니까 일단 분해해봐야 구조를 알아. 거의 다 나무로 되어져 있고.
에마: 쇠 같은 건 쓸 수 없었던 시대의 기계니까. 하지만, 지금도 확실히 움직인다구!
히스클리프: 응. 되게 섬세한 일인 것 같아. 내가 아는 베틀은 페달만으로 움직임이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전부 수작업으로 할 때는 어떻게 조립한걸까…….
시노: 어이. 이 녀석의 도구는 분해하지 말라고?
에마: 아하하. 지금 분해되면 곤란해!
히스클리프: 아, 안 해. 흥미는 있지만. 하지만 정말 예쁜 천이다... 클로에한테도 보여주고 싶어.
에마: 클로에씨? 그 사람도 천을 좋아해?
히스클리프: 마법사 동료로, 서쪽 나라의 마법사야. 오늘 같이 오지는 않았지만 옷을 잘 만드는 아이지. 그가 하는 일도 굉장히 정중하고 섬세하니까, 네가 짠 옷감을 보면 틀림없이 기뻐할 거야.
에마: 옷을 만드는 사람도 있구나! 마법서는 멋진 곳이네. 언젠가 나도 만날 수 있을까?
히스클리프: 기회가 되면 클로에를 데려올게. 이 마을 사람들은 마법사한테도 잘해주니까 정말 좋아할거야.
에마: 아싸, 기대된다!
에마: ……좋아. 이것으로 일단락. 이거, 당신들의 의상 천인데 어때?
히스클리프: 우리들의? 우와…… 대단해. 무늬도 반듯하고 이렇게 촉감이 좋은 천은 중앙 도시에서도 보기 힘들어.
시노: 아아. 나도 맘에 들었어.
에마: 고마워! 올해는 멋진 마법사가 춤을 추게 되었으니까 의상 만들기도 열심히 할게. 기대해줘! 특히 '거대한 재앙' 의 화신역을 맡은 사람은 키가 크고 박력이 있는 느낌이었으니까 의상도 지지 않도록 해야지!
히스클리프: 응, 기대하고 있어. 이 천으로 의상을 만들어 준다면 나도 분발해야겠다…….
파우스트: …….
네로: 차근차근 준비가 되어가고 있나보네.
파우스트: 그렇군. 공을 많이 들인 의식 같다.
네로: ……정말로 이 의식으로 너희들의 기묘한 상처가 나아질거라고 생각해?
파우스트: 시도해 볼 만하겠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어. 하지만 히스나 시노는 물론 저런 아이까지 열심히 하고 있으니, 내가 뭘 안 할 수도 없잖아.
네로: 그렇네. 뭐,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랄게. 나도 나름대로 협조는 할테니까.
파우스트: ……아아. 고마워.
에마: 오웬 씨, 있으려나? 당신의 의상이 되었으니까 급하게 가져왔어! 주역의 의상이니까 모두 함께 열심히 만든거야. 잘 어울릴 것 같으니 빨리 입어서 보여줘!
에마: 촉감은 어때? 불편하지 않아?
오웬: 시끄럽네……. 문제 없어. 힘들면 마법으로 어떻게든 할 수 있고.
에마: 헤에. 마법이란 편리한 거구나……. 응. 역시 이 색깔, 당신에게 딱 맞는 것 같아. 엄청 좋은 느낌! 올해는 당신 같은 예쁜 사람들이 춤을 춰주니까 축제가 너무 기대돼!
오웬: 헤에. 너는 외관의 아름다움이 중요한거구나? 작년까지 춤춘 마법사는 너에게 무가치했나보네.
에마: 그렇지 않아. 하지만, 누구라도 예쁜 걸 보면 기쁘잖아.
오웬: 어떠려나? 너의 가치관이 정말로 맞는 것 같아? 네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모두에게 예쁜거야?
에마: ……어려워서 잘 모르겠어. 하지만 뭔가 짓궂은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아.
오웬: 아하하. 짓궂다고 생각하는 건 분명 짚이는 데가 있기 때문이야. 난 그냥 수다 떨고 있을 뿐인데.
에마: 그럼 말투가 심술쟁이네. 의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렇게 말해주면 될텐데. 그게 아니라면……. 혹시 만삭 의식에서 춤추는게 싫어졌어? 지금 그만두는 건 슬프지만, 그만두고 싶어?
오웬: 할거야. 나는 나로 있고 싶으니까.
에마: ……뭐야 그게. 당신이 아닐 때가 있어?
오웬: 지금도 그래. 보통 북쪽 마법사는 이런 거 안 해.
에마: 그거, '거대한 재앙' 의 탓?
오웬: 글쎄.
에마: 그럼, 난 보통이 아닌 당신에게 감사해야겠네.
오웬: ……하아?
7화
에마: 있잖아, '거대한 재앙' 이 와도 행복의 마을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났어. 브래들리 씨가 마을의 모금을 먹어치우기도 하고, 혼자서 마법서까지 여행을 하기도 하고, 내가 만든 의상을 마법사님들이 입게 하고. 이런거 보통은 아니지?
오웬: …….
에마: '거대한 재앙' 은 분명 무서운 것이니까, 이런 말 하면 혼날 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주 조금 감사하고 있어. '거대한 재앙' 이 보통이 아니게 해줬기 때문에 멋진 일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는걸.
오웬: '거대한 재앙' 에게 감사하다니 말도 안돼. 나에게는 민폐를 많이 끼쳤어. 보통인 쪽이 좋은게 당연하잖아.
에마: 그래……. 마법사인데 보통이 좋다니 조금 아깝네.
주민: 어―이, 에마! 이쪽 의상 좀 봐줘.
에마: 네― 지금 갈게!
오웬: ……정말로, 바보 같아.
히스클리프: 이것이 우리들의 의상....
에마: 어때? 이상한 점은 없어?
히스클리프: 응. 촉감도 너무 좋아. 예쁜 의상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에마: 다행이다……!
시노: 히스는 역시 멋있어. 튀는 역할을 하길 잘했네.
시노도 잘 어울려요. 의상도 굉장히 화려해서, 밤하늘에 비칠 것 같아요.
시노: 흐흥, 뭐. 나는 히스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이니까, 자연스럽게 보내줄게.
히스클리프: 별로 나는 눈에 띄고 싶지 않지만…….
파우스트: ……뭐랄까, 조금 부끄럽군. 나한테는 조금 더 수수한 의상이었어도 좋았을텐데.
네로: 뭐 어때. 당신은 평소에 수상쩍게 입고 다니니까 가끔은 좋은 뜻으로 눈길을 끌자구.
파우스트: 미안하군. 평소에는 음침하고 수상해서.
네로: 음침하다고는 말 안했잖아…….
스노우: 우리들의 의상까지 만들게 해서 미안하구먼.
화이트: 밤의 축제에서는 별로 힘이 되지 못하지만, 아주 좋은 의상일세.
스노우: 잘 어울리는구먼, 화이트.
화이트: 스노우도 잘 어울리네.
모두 정말 멋있어요! 본방이 점점 더 기대가 되어요.
브래들리: 어이. 적당히 좀 해, 미스라!
우왓, 뭐지……?
(의상이 한 벌 튕겨져 나왔어. 저건, 미스라의?)
미스라. 의상 갈아입지 않을건가요?
미스라: 이런 거, 저에게는 필요 없으니까요. 애초에 춤을 추라던가 의상을 갈아입으라던가, 저에게 명령하다니 어쩔 셈인가요.
브래들리: 꼬맹이처럼 떼쓰는 거 아니야. 네놈이 한다고 했잖아. 너만 편하게 상처를 고치려고 하다니 태평한 것도 정도가 있지. 무슨 일이 있어도 싫다고 하면 힘으로 밀어붙이겠어.
미스라: 당신이? 헤에, 재밌는 농담이네요.
둘 다, 마도구를 집어넣어주세요…….
에마: ……의상이.
내팽겨쳐진 의상을 주운 에마씨가 고개를 숙이며 떨고 있다. 미스라의 의상은 딱 봐도 열심히 작업한 옷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 그녀들이 열심히 만들어 준 것인데....
히스클리프: ……에마. 의상 좀 빌려줄래?
에마: 으, 응.
네로: 어이, 히스……!
히스클리프: ……미스라.
미스라: 뭔가요?
히스클리프: 이 의상을 입어줬으면 해.
미스라: 그건, 저에게 명령하는 건가요? 동쪽의 마법사가?
히스클리프: …….
시노: 히스!
파우스트: 기다려, 시노.
미스라와 히스클리프의 주위가 긴장이 감도는 공기가 되었다. 시노를 제지하던 파우스트도, 그 옆에 있는 네로도, 각자의 마도구를 겨누며 두 사람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
히스클리프: 이 의상에 사용된 옷감은…… 많은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짠 아주 귀중한 옷감이야. 그 작은 아이가 미스라의 춤을 위해서 만들어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의상이라고.
히스클리프: 그러니까, 미스라가 이 의상을 입고 같이 춤을 췄으면 좋겠어.
미스라: …….
오웬: '쿠아레 모리토'
히스클리프: 에?
미스라: 오웬.
오웬: 이렇게 평화에 잠긴 한가로운 마을에서 인간들에게 축복을 받고 인형처럼 멋대로 치장을 하는 건 나도 마음에 안 들어. 요구받은 것을 그냥 순순히 해주다니 기분 나빠. 인간이나, '거대한 재앙' 을 위한 춤이나 질색이야. 어처구니가 없어.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잠 못 드는 생활이 계속되는 것보다 더 어처구니 없는 일은 없잖아.
미스라: 뭐, 그러네요.
오웬: 그럼 너도 그거 입고 춤 춰.
미스라: …….
8화
미스라…….
미스라: 으―음……. 의상을 입고 서 있기만 하면 괜찮은데, 춤을 배우기가 너무 귀찮아서…….
오웬: 하아?
브래들리: 그런 이유로 갈아입는 걸 싫어했던 거야?
미스라: 옷을 갈아입으면 연습을 시작한다고 쌍둥이가 그러길래. 옷을 안 갈아입으면 연습 안해도 되는건가 하고 생각해서.
스노우: 그럴 리가 없잖아. 옷을 갈아입든 안 갈아입든 연습에는 참가해줘야겠네.
미스라: 하아? 얘기가 다르잖아요.
브래들리: 그런 이유로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너뿐이잖아. 안무도 제일 적은 역할이고.
미스라: 마음이 안 내켜요. 현자님, 대신 해주세요.
저는 마법사가 아니라서 어려울 것 같네요... 아, 맞다! 그러면 제가 AD처럼 플립을 낼게요!
브래들리: AD?
미스라: 플립.
그, 큰 종이에 안무 그림을 그리고 보여주는거에요. 이걸 보면서 하면 미스라는 안 외워도 되겠죠?
미스라: 하아……. 그런거라면.
오웬: 현자님, 미스라에게 춤 도중에 죽이기 쉬운 안무를 추게 해줘. 내가 깜빡하고 죽여도 들키지 않을 그런 거.
미스라: 저는 상관 없어요. 춤이든 서로 죽이든.
아, 안돼요. 기묘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라도 의식을 잘 치르도록 하죠.
오웬: 의식이 끝나면 신령의 먹이로 던져 줄게.
미스라: 뱀 맛있죠.
연못의 신령에게도 던지지 말아주세요…….
의식 당일, 브래들리의 제안 덕분인지 행복의 마을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에마: 대단해……. 만식 의식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준 건 처음이야!
좀 더 작은 규모의 축제라고 생각했는데 손님들로 가득하네요.
브래들리: 내 덕분이지. 감사하라고, 아가씨.
에마: 응, 고마워! 브래들리씨, 역시 대단해!
브래들리: 뭐. 보수는 있는 대로 다 먹어치우는걸로.
네로: 여기서 춤춘다고 생각하면 위가 아파져…….
브래들리: 얼빠진 소리 하는 거 아냐, 이 자식!
네로: 아얏……. 네 놈, 마법서로 돌아가면 당분간 야채밖에 못 먹게 할거니까…….
히스클리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다니, 긴장해서 안무를 까먹을 것 같아…….
시노: 괜찮아, 히스. 당당하게 있어. 만약에 틀려도 나랑 파우스트가 도와줄게.
파우스트: 히스라면 괜찮아. 자신감을 가져라.
히스클리프: 파우스트 선생님……. 감사합니다.
시노: 히스, 나는?
히스클리프: 시노도 고마워. 의지하고 있을게.
시노: 아아, 맡겨둬.
미스라: 자, 의식을 하는 거죠. 빨리빨리 걸어주세요.
오웬: 허수아비 화신이 나에게 명령하지 마.
스노우: 이봐, 둘 다 사이좋게 지내는게야!
화이트: 현자여, 우리들의 그림을 부탁하네.
맡겨주세요. 자, 가죠.
거대한 재앙' 에 비추어져 황금빛으로 빛나는 보리밭을 걷는 에마씨의 의상으로 차려입은 마법사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당당한 행진에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민: 너무 예쁘다……. 저게 선택받은 마법사들이야?
주민: 젊은 마법사들에 저렇게 외모도 예쁠 수가. 춤이 기대돼!
(엄청나게 주목 받고 있어……. 하긴, 오늘 밤 모두는 그 어느 때보다 멋있으니까.)
그 중에는 모두에게 홀딱 반한 채 움직일 수 없게 된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인정받으니까 나까지 자랑스러워. 기쁨에 겨워 울리는 고동을 감추지 못한 채 손님들을 모시고 연못으로 향한다.
이윽고 당도한 큰 연못 위에는 유난히 아름다운 '거대한 재앙' 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가, 만월……. 원래의 세계에서는 달맞이에 가까운걸지도 몰라.)
이 세계에서 '거대한 재앙' 을 보고 즐겁게 생각하는 것은 조심성 없는 걸지도 모르지만, 달맞이라고 생각하면 일본인인 나에게는 친숙한 광경이다.
스노우: 그럼, 모두 자리는 잡은건가.
마법사들의 걸음이 멈추자 주위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조용해졌다. 이제부터 시작될 잔치를 기다리는 듯이.
화이트: 우리들은 춤에 참가할 수는 없지만, 의식을 복돋게 해주마.
스노우 / 화이트: 영차……. 하나,둘!'노스콤니아!'
예쁘다……!
스노우와 화이트의 마법으로 연못 위에 희미한 빛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눈처럼, 반딧불처럼 부드러운 불빛이 조각배를 비추고 있다. 이어서 마을 사 람들이 연주하는 엄숙한 음색이 유혹하듯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오웬: ……간다.
9화
먼저 조각배에서 내려선 건 오웬이다. 그 경쾌한 움직임에는 소리도 무게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건……)
한 번 시선을 빼앗겨버리면, 선명하고 요염한 그의 모습에서 이제 눈을 뗄 수가 없어. 은실처럼 빛나는 머리카락 아래서 영혹적인 눈동자가 보일 때 마다 살갗에 소름이 돋고 등줄기가 오싹오싹 떨렸다. 스노우와 화이트의 그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오웬의 춤에 이끌려서 눈 앞의 깊은 연못에 발을 들여놓았을 지도 몰라.
(가장 어려운 안무의 역할인데 이런 완성도라니……. 대단하네, 오웬.)
눈을 깜빡거리는 것도 잊고 오웬의 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갑자기 그가 크게 옷자락을 휘날리며 시야에서 사라진다.
직후, 그의 뒤쪽 배에서 히스클리프의 모습이 보였다. 놀라는 우리에게 작게 미소를 지어주더니, 그도 자신이 맡은 역할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요염한 오웬과는 대조적인, 맑고 섬세한. 하지만 남성다운 늠름함을 느끼게 하는 움직임에 소리 안 나는 비명이 새어나왔다.
(머, 멋있어……!)
원래부터 자세가 좋은 히스클리프의 움직임은 기분 좋을 정도로 늠름하다. 그런데도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의 용모와 의상의 화려함 덕분이겠지. 비유하자면 부용의 꽃같은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그런 히스클리프를 지키듯 양옆 배에서 파우스트와 시노가 내려온다. 이들은 좌우대칭으로 같은 안무지만 시노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파우스트는 감싸듯 잔잔하게. 같은 안무일텐데도 분위기가 전혀 달라서 각자의 개성이 드러난다. 먼저 춤을 추던 오웬과 히스클리프를 보조하듯. 하지만 그들 두 사람 역시 굳건한 존재감이 있다.
(안되겠어……. 너무 멋있어서 그들을 칭찬하는 말이 잘 안 나와.)
연못을 너무 바라보았는지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이들과 반대편 배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내려온다. 이쪽도 같은 자세로 나타난 브래들리와 네로였다. 그들도 같은 안무일 것이다. 춤이라기보다는 싸우는 듯한, 펄럭이는 옷자락 소리가 들릴 정도로 씩씩한 춤으로 호흡이 잘 맞는 동작은 거울을 보는 것 같다. 브래들리에게는 딱이지만 섬세한 작업을 좋아하는 네로가 당당하게 소화해 내는 것이 신선하다.
……?!
브래들리가 휙 돌아서는 순간,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강렬한 위압감으로 무서워지지만, 시선은 연못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간다.
미스라: …….
하나만 검게 칠해진 작은 배에는, 세상을 등지고 서 있는 듯한 '거대한 재앙' 의 화신의 역할인 미스라의 모습이 있었다.
스노우: 현자여, 미스라가 나설 차례일세.
화이트: 플립을 거는 거야!
네, 네……!
당황해서 미스라용으로 그린 플립을 스노우와 화이트의 그림 위에 올려보인다. 미스라는 이쪽을 보고 입을 딱 벌리더니 후다닥 크게 팔을 뿌리쳤다. 모든 것을 멸망시킬 재앙에 걸맞는 거칠고 난폭한 움직임. 긴 손발이 흔들릴 때마다 수면이 크게 웅성거린다. 짐승 같은 격렬함인데 그의 겁없는 미소에 정신이 팔릴 것 같다. 이것이 빌런의 카리스마라는 것인가.
(귀찮다더니 안무는 제대로 외워줬네.)
연습할 때 봤던 것이랑 똑같이 미스라의 춤은 더 세련되고, 멈추지도 않는다. 히스클리프를 감싸듯 앞으로 돌아온 오웬에게 도발을 가하는 여유마저 있는 듯 하다.
오웬: '쿠아레 모리트'
미스라: '아르시무'
아.
스노우: 이봐, 둘 다! 공격마법은 안돼!
화이트: 마법을 쓰는 것은 상관 없지만, 적당히 하는 게야!
마을 사람들의 음악의 저편에서 마법의 소리가 난무한다. 하지만 대충 봐주고 있는 거겠지. 춤을 돋우듯 피어나는 형형색색의 불꽃은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
이윽고 마법사들은 조각배를 떠나 '거대한 재앙' 이 지배하는 밤하늘에서 자유롭게 춤을 춘다. 아름답고도 전대미문한 무도는 연못 사이에서 숨은 신령이 지켜보고 있다…….
히스클리프: '레프세바이브러프 스노스'
음악이 끝나는 순간, 히스클리프의 마법이 관중석에 꽃을 뿌리고 무대는 종막을 내렸다. 마법사들을 찬양하는 박수와 함성은 그들이 연못을 떠난 뒤에도 꽤 오랫동안 울려 퍼졌다.
어어어어어엄청 좋았어요……! 감동받아서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아서 몽롱해요.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히스클리프: 그, 그 정도는 아니에요, 현자님. 그래도 즐기셨다니 다행이에요.
시노: 히스는 좀 더 자신을 자랑해. 오늘 밤, 넌 최고로 멋있었어.
시노도 멋있었고 다들 너무 멋있었어요! 저, 오늘 밤을 평생 잊지 않을거에요.
네로: 하하, 현자씨. 너무 흥분하면 잠 못 자게 될거라고.
파우스트: ……그래서, 의식의 유래는 알아냈나?
스노우: 음. 지금 오웬이 연못의 신령과 얘기 중일세.
화이트: 보아하니 그대들의 춤은 연못의 신령도 만족한 모양이군.
오웬: ……듣고 왔어.
브래들리: 오. 냉큼 말 좀 해봐.
미스라: 그 의식으로 액재의 상처는 나아지나요?
오웬: 옛날에 무서운 힘을 가진 자가 북쪽에서 찾아와서 천둥을 쳐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고 있었대.
……천둥?
오웬: 그게 내가 들은거야. 이 근처도 망할 뻔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마법사가 춤을 추면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되돌아왔다는데. 인근 마을은 전멸 되었지만, 행복의 마을은 무사하게 끝났기 때문에 만삭 의식이 재앙을 물리치는 잔치라고 전해지게 된 것 같아.
…….
10화
스노우, 화이트. 북쪽에서 온 천둥번개를 내리게 한 무서운 것은 혹시…….
스노우: ……아아. 아마도 세계 정복을 하려고 했었던 오즈구먼.
화이트: 힘이 너무 센 탓에 오즈와 '거대한 재앙' 이 섞여버린 거겠지.
스노우: 실제로 그 무렵의 오즈는 재앙 같은 것이 아니었나.
화이트: 오즈쨩, 신바람이 났었지.
브래들리: 어이어이, 잠깐 기다려! 그러면 우리가 힘들게 춤춘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거냐!
오웬: 진짜 최악…….
미스라: 하아, 역시……. 그렇게 간단한 얘기 일리가 없죠.
미, 미스라. 아쉬운 결과였을 수도 있지만 마을을 태우는 것만은……!
미스라: ……뭐, 됐어요. 이 마을 식사는 맛있었으니까 태우지 않고 남겨둘게요.
(다행이다……!!)
파우스트: 의식이 상관 없다면 왜 이 마을은 '거대한 재앙' 의 피해를 한 번도 입지 않았지? 그저 우연일 수도 있는건가?
미스라: 글쎄요? 시골이라서 그런 거 아닌가요.
스노우: 아쉽긴 하지만 정말 그냥 우연이었겠지.
화이트: 행복의 마을이 아니라 행운의 마을이었구먼.
브래들리: 잘도 말하네, 영감.
화이트: 호호호! 뭐, 희귀한 체험도 할 수 있었고. 좋은 추억은 만들었네.
스노우: 그렇구먼. 우리 애들이 축제에서 춤을 춘다는 건 보통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일세.
오웬: 당연하지. 그런 거 명령받으면 말 끝내기 전에 케르베로스의 먹이로 만들어버릴거야.
하지만 오웬의 춤은 정말 멋있었어요. 가장 어려운 역할이었는데도 완벽했고, 움직임이 선명했었거든요. 무엇보다 오웬이 그 역할을 맡아줬기 때문에 축제 준비가 무사히 잘 되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오웬: ……그래. 그럼 현자님은 나에게 답례를 잔뜩 해줘야겠지?
달콤한 것 맞죠?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요. 마법서에 돌아가면 준비할 테니까, 조금 더 오늘 밤의 소감을 얘기해도 되나요?
오웬: 하? 안 들을건데.
안 들어줘도 되니까 얘기하게 해주세요! 정말 멋있었다고요!
미스라: 제가 들어드릴까요. 어차피 오늘 밤 잠도 못 잘 것 같은데.
미스라도 정말 최고였어요! 당신이 나오는 순간 공기가 바뀌어서 깜짝 놀랐어요. 온몸으로 미스라의 강함과 두려움을 느끼면서 오싹오싹 떨렸어요. 세계를 압도한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최고로 쿨하고…….
미스라: 현자님이 무슨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이거 칭찬하는거예요?
스노우: 호호호! 틀림없이 칭찬하고 있는 걸 거야. 기뻐해 두면 되겠지.
화이트: 그대가 이 정도로 찬양 받을 기회도 그렇게 많지 않을테니까.
미스라: 뭐, 그럼 나쁘지 않네요.
시노: 현자, 나와 히스의 소감도 말해봐. 밤새 칭찬해 줘.
히스클리프: 시노! 현자님을 곤란하게 하지 마.
스노우: 사이가 좋다는 것은 아름답구먼.
화이트: 스노우 쨩, 우리도 춤을 추고 현자에게 칭찬 받고 싶지 않아?
스노우: 하지만 우린 이대로일세. 잠깐 밖에 나갈 수는 있어도 춤을 추는 건 역시 어려워.
화이트: 하아..... 역시, 기묘한 상처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네.
스노우: 그렇구먼……. 일단 내일 아침이 되면 춤 출까?
화이트: 응! 빨리 아침이 되지 않으려나.
브래들리: 아니, 그러면 만월의 춤이 아니게 되잖아.
스노우 / 화이트: 현자 쨩에게 칭찬받으면 그걸로 돼!
여러분, 신세 많이 졌습니다.
주민: 이쪽이야말로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게요.
히스클리프: 에마, 앞으로도 열심히 해.
에마: 응! 블랑셰가 준 기술, 잘 이어갈게.
히스클리프: 고마워. 다음에는 클로에도 데리고 올게.
에마: 그럼 나는 그 사람도 좋아할 만한 예쁜 천을 잔뜩 만들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에마: 정말 고마워! 잘 있어!
에마: (모두는 꼿꼿이 서서 만삭의 춤만큼이나 환상적이고 예뻤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춤추는 그들은 정말로 아름다웠어. 하지만 그건 외모가 예뻐서 그런 것 만이 아니야……. 그들이 춤을 진지하게 마주해 준것이 하나하나의 동작에서 느껴졌어. 그래서 진정한 감동을 느꼈던 것이겠지. 아마 마을 사람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아.)
에마: (나도 입어준 사람이나, 봐준 사람에게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정성스러운 의상을 만들고 싶다. 그걸 위해서라도 그들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눈에 잘 새길거야. 그렇게 좋은 걸 잊을 리가 없지만 조금이라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싶어. 시골뜨기인 우리들을 멸시하지도 않고, 소중한 축제를 지켜준 멋있고 상냥한 마법사들의 모습을.)
에마: 그럼 나, 베 짜러 갈게.
주민: 에, 벌써? 오늘도 하루종일 일만 했잖아? 조금 쉬는게 어때.
에마: 쉬다니 시간 아까워. 내년 축제를 위해 더더욱 예쁜 직물을 만들어야지. 다음에 여기에 와주실 마법사님들에게 딱 맞는 근사한 걸!
주민: 하하. 그거 큰일이네.
에마: 나는 그 만삭의 의식을 계속 미래까지 전하고 싶어. '거대한 재앙' 의 빛에도 지지 않을 정도로 반짝반짝 거렸던 마법사들의 꿈같은 춤의 광경을, 그분들의 다정함을, 우리의 전통을 간직해 준 따뜻한 마음씨를 꼭 전달할거야.
에마: ……맞다! 무늬로 해서 짜볼까. 마법사들에게 구원 받은, 행복한 마을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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