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화 피가로의 비밀
아서에게 미스라가 한 걸음씩 다가간다. 미스라의 오른손에 검붉은 빛이 모여 오즈의 표정이 초조한 듯 흔들린다. 나는 순간적으로 미스라의 손을 잡았다.
미스라: 잠깐, 위험하잖아요.
미스라, 기다려 주세요! 뽑힌 마법사의 수가 줄어들면 '거대한 재앙' 을 이기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러면 정말 세계가 망해버린다구요!
미스라: ……확실히.
오웬이 지루한 듯 입을 삐쭉거렸다.
오웬: 떠내려가기 쉬운데.
미스라: 오웬도 곤란하잖아요. 세계가 망하면 저희도 죽어요.
오웬: 뭐, 그렇지만……. 모처럼의 기회니까 손이랑 발 정도는 받아두는 게 어때?
미스라: 저는 당신처럼 인체를 모으는 취미는 없어요.
오웬: 나도 없어. 이 눈은 우연히 마음에 든거라고. 그런데 오즈의 팔이라면 갖고 싶네.
아서: 오즈 님의 팔을 어떻게 할 셈이지!?
오웬: 등이 가려울 때 쓸래.
미스라: 그거 편리하네요.
오웬: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을까.
아서: 지금 해달라고 하면 돼! 오즈 님은 해주실 거다. 나도 어렸을 때 몇 번이나…….
오즈: 아서……. 아서, 이제 됐다. 가만히 있어.
아서: 하지만, 오즈 님…….
오즈: ……'복스노크'
오즈는 작은 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직후, 새로운 사람의 그림자가 출현한다. 남쪽의 마법사 피가로였다.
피가로: 어라? 오즈, 네가 부른거야?
오즈: ……흐아암……. 약한 마법이라면, 어떻게든 쓸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졸려…….
피가로: 야, 사람을 불러놓고 하품하지 마.
모두가 두려워하는 오즈에게 피가로는 싹싹하게 꾸짖었다. 갑자기 호출된 것에 동요하지도 않는 피가로에게, 오즈가 말했다.
오즈: 일시적으로 마력을 잃고 있다. 미스라와 오웬으로부터 아서를 지켜라. 너라면 할 수 있겠지, 피가로.
피가로: …….
……피가로라면 할 수 있다……? 남쪽의 마법사들은 힘이 약한게 아니었나요……?
오즈: 피가로는 북쪽의 마법사다. 나보다 오래 살고 있지.
에……!?
나는 놀라서 피가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놀란 건 이 자리에서 나뿐인 것 같아. 아서도 미스라들도 알고 있는 것 같다.
피가로: 너 말이야…….
피가로가 오즈를 향해 투덜거렸다.
피가로: 이렇게 매번 내 슬로우 라이프를 방해하는 건 그만두지 않을래?
오즈: 슬로우 라이프란.
피가로: 느긋하고 평온한 생활 말이야. 전의 현자님께 들었어. 알겠니, 오즈. 나는 선량한 일반 시민이고 싶어. 남쪽나라에서의 나는 그냥 좀 축 쳐진 아저씨야.
오즈: 축 쳐진 아저씨란.
피가로: 루틸이나 미틸은 내 과거를 몰라. 피가로 쌤은 아무것도 못하니까, 라면서 뭐라고 해주는거야. 최고지?
아서: 피가로 님은 뭐든지 잘하는 분이세요!
피가로: 고마워, 아서. 여전히 아서는 귀엽네. 괴팍한 남자에게 자랐는데.
피가로는 아서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 나를 돌아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피가로: 아아, 현자님에게도 알려졌네. 의지할 데 없는 청년 풍미로 소박하게 다가갔는데.
오즈: 현자에게 다가간 것인가…….
아서: 현자님께 다가가셨나요?
2화 달콤한 때
저기, 의지할 데 없는 청년이라던가, 소박하지 않았어요……. ……제대로 박력 있고 무서웠었는데…….
피가로: 거짓말이지. 다시 공부해야겠네. 겁줄 생각은 없었어. 미안해.
주눅 들지 않고 사과하며 피가로가 미스라들을 마주보았다. 진찰 전 의사처럼 팔을 걷어붙인다.
피가로: 어쨌든, 이번 건은 그냥 이걸로 해. ……어디 보자, 미스라들의 상대였나?
미스라: 싫은 남자가 튀어나왔네요…….
피가로: 나도 싫어. 너도 오웬도 만만치 않고,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까…….
아서: 피가로 님은 젊으세요!
피가로: 고마워, 아서. 열렬한 성원이 있다면 피가로 님, 힘내볼까.
피가로가 입꼬리를 올린다. 미스라가 찌르르 살기를 뿜었다. 그때…….
미틸: 피가로 선생님!
루틸: 피가로 선생님 계신가요?
남쪽의 형제가 나타나면서 피가로가 멈췄다. 갑자기 맥빠진 목소리로 상냥하게 돌아본다.
피가로: 무슨 일이야?
미틸: 케이크가 나왔어요!
루틸: 피가로 선생님이 정말 좋아하시는 밤이 잔뜩 올려져 있었어요! 같이 드시지 않겠나요?
피가로: 아싸! 먹을래 먹을래!
오즈: ……. 너, 지금의 삶의 방식에 의문은 없는건가.
피가로: 시끄럽네. ……라는 이유로, 힘이 못되어서 미안하네.
오즈: ……밤 때문에 떠날 것인가?
피가로: 밤 따위는 상인을 덮치면 손에 들어와. 저 아이들의 정성에 보답하기 위해서야. 나는 착하고 상냥한 남자니까. 너도 미스라랑 잘 지내봐. 케이크를 나눠먹기도 하면서 말이야. 우정이나 애정은 좋은거라고.
루틸: 피가로 선생님, 현자님들과 얘기하고 계셨나요?
피가로: 괜찮아, 이제 끝……
루틸: 괜찮으시다면 여러분의 몫도 이쪽으로 옮길까요?
아, 아뇨. 저희들은…….
오웬: 케이크가 있구나?
와앗……! 갑자기 바로 뒤에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오웬: 먹을까.
루틸: 그럼 가져올게요. 아, 오즈 님과 아서 님, 미스라 씨는요?
오즈: 아니.
아서: 나는 됐어.
미스라: 가리비 껍데기가 아니라면 먹을게요.
아서: 역시 맛없었구나.
미스라: 전에 똑같이 생긴 걸 먹었을 때는 달고 부드럽고 맛있었는데. 수확 시기에 따라 맛이 다른가요.
아서: 아아! 그건 마들렌이다. 하녀들에게 운반을 시키지.
오웬: 케이크, 나는 잔뜩 먹을래. 큰 접시에 갖다 줘.
루틸: 알겠습니다. 단 걸 좋아하시나봐요.
오웬: 응.
미틸: 뭘 제일 좋아하시나요? 있다면 가져올게요.
오웬: 빨간 과일을 폭삭 으깨서 설탕을 듬뿍 넣고 보글보글 끓인 갓 나은 상처 같은 식감의 녀석.
미틸: …………에……?
3화 교차하는 과거
루틸: 잼이 아닌가요?
미틸: 아, 아아. 과연. 알겠어요.
오웬: 크림도 좋아해. 미끈미끈하고 말랑말랑한 놈. 다른 것으로 비유하면……
미틸: 비, 비유할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오웬: 그걸 입 안에 가득 넣고 싶어. 입이 다물면 나와가지고 튀어나올 정도로.
미틸: 알겠어요…… ……북쪽의 마법사는 역시 무서워요……. 마음이 안 맞는 것 같아…….
루틸: 그런 말은 하면 안돼. 그리고…….
미틸: 그리고……? 뭘 보고 계시나요, 형님. 미스라 씨한테 무슨 일 있나요?
루틸: ……어머님을 아시는 분일지도……. 나중에 물어볼게요. 그러면 모두들, 나중에.
피가로: 고마워. 루틸, 미틸.
오웬: 케이크래.
오웬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미스라도 덩달아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미스라: 밤이 되어도 따뜻하네요. 윗옷 안가져오길 잘한 것 같네.
오웬: 달콤한 럼주를 뿌려서 흠뻑 젖어있는 것도 좋아. 그건 뭐라고 부르는거지.
나는 감회가 새롭다는 듯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 둘…… 무섭지만 왠지 적당하게 넘어가네……)
(어라……? 발코니 밑에 네로랑 누가 있는 것 같아……. 기분 탓인가……?)
브래들리: 쳇…… 모처럼 밥 먹으러왔는데, 방해하지 말라고. 무슨 일이야, 네로.
네로: 무슨 일이 있냐가 아니야. 풍문으로 현자의 마법사가 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언제부터 자유의 몸이 된건데. '거대한 재앙' 의 내습 시기 외에는 감옥에 갇혀 있던 게 아니었나.
브래들리: 맞아. 감옥에서 나와도 마법서에서 스노우와 화이트에게 감시를 당하고, 도망갈 틈도 없어.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탈출할 수 있었지.
네로: 어떻게.
브래들리: 재채기를 했더니 멀리 날아갔어.
네로: ……재채기?
브래들리: 아아.
네로: 엣취, 하는 녀석?
브래들리: 맞아.
네로: ……어이, 장난치지 말라고.
브래들리: 어처구니 없는 소리지만 진따라고! 그때부터 재채기를 할 때마다 어디론가 멀리 날아가버려.
네로: 실화냐…….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잖아.
브래들리: 칫…… 영문을 모르겠어……. 결국 오즈에게 끌려와 버렸잖아.
네로: 재채기라니…….
브래들리: 너희는 어때, 네로. 어느새 도적단도 해체돼버렸어. 네가 끌어나가는 줄 알았는데.
네로: 나는 벌써 발을 씻었어. 네 일에는 어울리지 않아.
브래들리: 그런 말 하지 마. 다시 같이 짜자. 여기서 벗어나서 한바탕 싸우자고.
네로: 말려들게 하지 마.
브래들리: 지금은 뭘 하고 있는데?
네로: ……동쪽에서 밥집을 하고 있어.
브래들리: 네가 밥집을? 아하하하!
네로: …….
브래들리: ……뭐, 나쁘지는 않나……. 네 밥은 맛있었으니까. ……쓸쓸해지지만, 뭐 좋아. 밥집이건 말집이건 알아서 해.
네로: ……그것 뿐이냐……?
브래들리: 뭐가.
네로: 발 빼면 죽이겠다고 했잖아.
브래들리: 밥집을 죽여봤자 소용없잖아. 나도 잡혔고. 지금은 현자의 마법사니까.
네로: …….
4화 마법 과학 병단의 날개
브래들리: 하지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네로: ……뭔데.
브래들리: 내가 잡힌 날 밤, 넌 어디에 있었어? 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난 잡히지 않았을 거야.
네로: …….
브래들리: 원망의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야. 계속 궁금했었어. 네 몸에 뭐가 있냐면서. 말해, 네로.
네로: ……나는…….
브래들리: 아하하! 어이어이, 왜 그래. 심각한 표정 짓지 마. 너 때문에 내가 잡힌 것도 아니고, 사실을 듣고 싶을 뿐이야.
네로: …….
브래들리: 네로……?
그림 속의 스노우 / 화이트: 꺄아아!
브래들리: …………!? 아파……! 위에서 그림이 내려왔어!
네로: 스노우, 화이트……?
그림 속의 화이트: 우리라고 좋아서 내려온게 아닐세!
그림 속의 스노우: 오웬에게 던져진거다. 불평이라면 오웬한테 말하게나!
브래들리: 칫……. 오웬 녀석, 기분 나쁘니까. 언젠가 죽여버리겠어…….
네로: 그런가. '거대한 재앙' 의 상처로 그림 속에 들어가 버린거지…….
그림 속의 스노우: 불편한걸세……. 으음……!?
그림 속의 화이트: 하늘을 봐라. 네로, 브래들리!
네로: ……? 저게 뭐야……? 날개가 있는 마법사……!?
브래들리: 아니……. 하늘을 나는 녀석들, 마법사가 아니야…….
그림 속의 스노우: 중앙의 마법 과학 병단이겠지.
브래들리: 마법 과학 병단……?
그림 속의 화이트: 마나석을 동력원으로 해서 기계로 마력을 제어하는 무리들일세.
그림 속의 스노우: 자 그러면, 허물어진 중앙의 탑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루틸: 현자님, 오즈 님. 저걸……!
아서: 저건 우리 나라의 마법 과학 병단…….
빈센트: 현자의 마법사에게 부탁하려고 했지만, 기적이 아니라 희극밖에 보여주지 못하더군.
오즈: …….
빈센트: 우리의 마법 과학 병단의 힘을 보여주지.
중앙 나라의 사람: 아……! 마법사다……!
중앙 나라의 사람: 아니, 아니야……. 저건 마법 과학 병단이 아닌가? 서쪽 나라에서 기술을 배웠다고 하는.
중앙 나라의 사람: 뭘 하고 있는 거지. 혹시 중앙의 탑을 고쳐주는 건가?
중앙 나라의 사람: 그러면 고맙지만……. 매일 눈에 익은 경치가 다르다는 건 아무래도 쓸쓸하니까.
니콜라스: 이렇게까지 심한 참상이었다니……. 나는……. 아니, 내가 반드시 복구하고 말겠어.
중앙 나라의 사람: 니콜라스 님!
중앙 나라의 사람: 마법 과학 병단의 대장 니콜라스 님이다!
니콜라스: 중앙의 탑까지는 복구할 수 없지만, 성 주위의 문이라면 마법 과학 병단의 힘으로 충분히 복구할 수 있다. 봐라! 이것이 마법 과학 병단의 힘이다!
중앙 나라의 사람: ……와아……! 대단해! 마법 같아……!
중앙 나라의 사람: 이게 과학이라고 하다니 놀랍군! 과학이 있다면 마법사는 필요없어!
중앙 나라의 사람: 아하하하! 그만 두라고! 마법사 패거리들은 그렇게 힘을 내서 퍼레이드까지 했었는데!
중앙 나라의 사람: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미틸: 저것이…… ……마법 과학 병단의 힘……. ……뭔가요? 과학이라니…….
루틸: 글쎄……. 나도 잘…….
샤일록: ……얼마나 기분 나쁜지…….
샤일록의 조용한 목소리에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아득한 하늘 아래를 바라보고 있다.
5화 일그러진 기적
기분, 나쁜가요……?
샤일록: 기분 나쁜 걸요. 통증을 수반하지 않는 쾌락에는 브레이크가 듣지 않습니다. 마법사처럼 마음을 쓰지 않고 사람처럼 몸을 쓰지 않고 돌의 힘으로 소원을 이룬다면……. 모래밭에서 노는 아이처럼 인간들은 세상을 다시 만들겠죠.
무르: 뭘 보고 있어? 대단한 거? 재밌는 거?
샤일록: 당신에게 있어서는 대단하고 재밌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보세요, 세기의 천재 무르. 당신이 발명한 마법 과학 기술이 일그러진 기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무르가 발명한……?
샤일록: 그렇습니다. 마나석을 동력으로 한 마법 과학 기술을 발명한 것은 예전의 그였죠. 물은 철학가자 발명가, 천문학자, 광물학자, 지적 욕구의 괴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파헤진 세계의 비밀이 어떻게 세상을 바꿔놓을지는 관심 없는 사람이었어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난 말렸었는데.
무르: 잘 모르겠어!
샤일록은 무르를 쳐다보며 아이러니하게 웃었다.
샤일록: 그렇겠죠. 그래서 저는 당신이 싫었어요.
무르가 뭐라고 말을 꺼낸다. 그것을 가리듯 빈센트 씨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빈센트: 예정대로의 진행이다. 마법사들이 나설 차례는 없는 것 같군.
아서: ……숙부님. 그런 말투로 말씀하지 않으셔도…….
…….
정신을 차려보니 샤일록과 무르의 모습은 없었다. 대신 피가로가 가까이 서 있었다. 보기 드물게, 얌전한 상태로.
피가로: ……마법 과학 병단인가. 저런 물건이 늘어나면 곤란해져.
피가로…….
피가로: 이대로라면 마법사 사냥이 일어나고 말거야.
……마법사 사냥……?
피가로: 아아.
그건 무슨 뜻인가요?
피가로: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자. 여기서는 조금.
빈센트: 뭐지?
피가로: 아닙니다, 왕제 전하.
히스클리프: 뭐지……. 잠깐 보고 올게.
시노: 아아.
메이드 소녀: ……저런 짓을 하면, 또 다시 무너져 버릴거야…….
시노: …….
메이드 소녀: 그야, 탑이 무너진 건 지진 때문이 아닌 걸…….
시노: 무슨 뜻이지?
메이드 소녀: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시노: 기다려.
메이드 소녀: …….
시노: 무서워하지 마. 안 잡아먹어. 맛있는 파이를 먹어서 배가 부르니까.
메이드 소녀: 파이, 맛있었나요……?
시노: 아아.
메이드 소녀: 저희 어머니가 구우셨어요……. 저희 어머니는 조리장에 다니셔서.
시노: 너희 어머니는 천재다. 전해드려.
메이드 소녀: 네……. 후후, 기뻐하실 거예요.
시노: 그래서? 탑이 뭐라고?
메이드 소녀: 저 탑이 무너진 건 지진 때문이 아니에요. 지진 같은 건 없었어요. 저, 봤다구요……. 묘지에서 나온 커다란 그림자가, 언덕을 올라가서 탑에 얽힌 것을.
시노: 그림자?
메이드 소녀: 네……. 거대한…… 새의 그림자요.
6화 새의 그림자를 따라
히스클리프: 새의 그림자? 구름 그림자를 잘못 본 거 아니야?
시노: 다른 몇 명에게도 물어봤지만 지진은 못 느꼈다고 했어. 탑을 무너뜨린 무언가가 있었을 거야.
히스클리프: 어디 가, 시노.
시노: 묘지의 상태를 살피러.
히스클리프: 지금부터!?
시노: 아아. 모두 여기서 머무를 거잖아. 아침에는 돌아올게.
히스클리프: 혼자 가면 위험해.
여러분, 방이 준비가 되었대요. 히스, 시노. 무슨 일인가요?
시노: 탑을 무너뜨린 괴물의 정체를 알아내고 올게.
괴물……? 역시 지진이 아니었구나…….
히스클리프: 현자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셨나요?
제 세계에는 지진이 잦았어서……. 보통 탑이 무너질 정도의 지진이 있으면 가까운 지역도 많이 흔들리거든요. 그런데 전혀 못 느꼈어요. 하늘을 날고 있는 동안의 일이었다고 해도, 사람이나 동물의 상태로 알 수 있었을텐데.
시노: 메이드는 묘지에서 나온 새의 그림자가 탑에 얽혔다고 했어.
오래된 생물이라면 스노우나 화이트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시노: 물어보고 와. 그럼, 다녀올게.
히스클리프: 기다려!
시노: 뭐야.
히스클리프: ……위험하잖아. 같이 갈게.
시노: 히스가? 한밤 중에? 묘지에? 마법사면서 귀신이 무서운 주제에?
히스클리프: 시끄럽네.
둘만 가면 걱정이에요. 저도 함께 할게요.
히스클리프: 현자님이야말로 위험해요.
시노: 너는 도움이 안되잖아.
히스클리프: 시노.
시노: 위험합니다, 현자님. 얌전히 침대에서 주무시고 계셔주세요.
그러면 누군가가 곁에서…….
파우스트: 아직도 방에 안 갔었나. 파티는 끝났을텐데.
네로: 당신이 낮잠 자는 동안에 말이지.
히스클리프: 파우스트 선생님. 네로.
시노: 어디에 있었어?
파우스트: 식료고에.
네로: 밥을 못 구해서. 네로에게 빼내온 술로 이제 저녁 반주를 할 참이다.
히스클리프: 둘이서?
네로 / 파우스트: 설마.
파우스트: 혼자서.
네로: 혼자 즐긴다. 저녁 반주는 그런 거야.
동쪽의 마법사는 정말 혼자를 좋아하네요……. 파우스트, 네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죄송하지만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네로: 에에……?
파우스트: 싫은데.
…….
시노: 괜찮아. 나랑 히스가 갔다 올게.
히스클리프: 시노, 기다리라니까! ……그럼, 현자님, 선생님, 네로. 안녕히 주무세요.
파우스트: 어디에 가는 거지.
네로: 중앙의 나라는 치안이 좋다고는 하지만, 밤의 모험은 아직 이르지 않나?
히스클리프: 사실은…….
파우스트: 정말이지……. 왜 내가 이런 일에 어울리지 않으면 안 되는거야.
히스클리프: 죄송합니다, 선생님.
네로: 아이들만으로는 위험하다고 현자 씨가 말하기 전에 말했던 건 당신이잖아. 귀찮음을 잘 타는 사람치고는 진지하네.
파우스트: 동행하고 있는 너도 말이지.
두 분 다 친절하세요.
네로: 당신까지 따라올 건 없었는데. 현자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높으신 분들께 혼날 것 같아.
높으신 분은 누구인가요?
네로: 오즈라던가, 스노우나 화이트?
죄송해요……. 성밖의 세상도 보고 싶어서.
파우스트: 따분한 경치겠지. 밤에는 거의 사람이 나다니지 않아.
어둡네요…….
파우스트: 그렇지. '거대한 재앙' 을 기피하면서도 '거대한 재앙' 의 빛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형편이 좋은 생물이라는 거야.
시노: 묘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히스클리프: 시노, 혼자서 먼저 가지 마!
파우스트: 큰 소리를 내지 마, 히스. 죽은 사람이 깨어난다.
히스클리프: ……네…….
7화 영웅답지 않은
네로: 뭐야, 무서운 건가? 네가 죽인 녀석들이 여기에 묻혀 있어?
히스클리프: 안 죽여…….
네로: 그러면 무서워 할 필요 없잖아.
파우스트: 시노, 어디로 가는 거지.
시노: 저 언덕도 묘지 아닌가?
파우스트: 아니야. 저 곳은 처형의 언덕이다. 죄인이 처형되어 묻히지.
히스클리프: 처형의 언덕…….
시노: 죄인이라니? 도적이라던가?
네로: 그렇네……. 채워줄 수 있을 만큼 고마운 얘기지.
파우스트: 도적이나 살인, 그리고…… 시대의 정의가 되지 못한 자들.
시노: 정의가 되지 못한 자들……. 영웅답지 않은 자가 죄인?
파우스트: 그래.
시노: 어째서.
파우스트: 어째서일까.
시노: …….
파우스트: 간다, 날 따라와. 나에게서 떨어지지 말고.
레녹스: …….
루틸: 레녹스 씨, 잠이 안 오나요?
레녹스: 루틸……. 조금 그리워서 말이야.
루틸: 그리워……? 이 성에 오신 적이 있나요?
레녹스: 아주 먼 옛날에.
루틸: …….
레녹스: 간다, 날 따라와. 나에게서 떨어지지 마. 그렇게 얘기하며 계속 달리고 있던 사람의 등을, 계속 쫓고 있었어……. 이상의 시대를 목표로 하여…….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루틸: ……레녹스 씨…….
루틸: ……아……. 저 초상화는…… 옛날의 왕의 모습일까요?
레녹스: 알렉 그랑벨 초대 국왕…….
레녹스: ……당신은 어째서, 단 하나 뿐인 친구였던 마법사를 화형에 처해버리셨나요…….
밤의 묘지는 무섭네요…….
히스클리프: 알 것 같아요…….
시노: 밤의 묘지에서 무서운 것은 망령보다는 무덤 도둑이야. 걔네들은 뭐든지 파헤쳐서 팔테니까. 들키면 무덤에 생매장 당하고.
히스클리프: 만난 적 있어?
시노: 아아. 처음에는 식인인 줄 알았어.
파우스트: ……이 묘지에도 무덤 도둑이 나왔을지도 모르겠군.
에…….
파우스트: 망쳐놨어.
네로: 진짜다……. 갈아엎은 흔적이 있네…….
히스클리프: 너무한 짓을……. '거대한 재앙' 이 와서 모두가 고생하고 있을 때…….
시노: 읏차…….
히스클리프: 시노! 무덤 속에 들어가지 마!
시노: 봐. 장물엔 손 안 댔어. 진주도 금도 남아있다.
네로: 그러면 뭘 위해서…….
파우스트: 시신은?
……에……?
파우스트: 관 속에 시신은 들어 있는가.
시노: 확인해보지.
네로: 무겁잖아. 도와줄게.
히스클리프: 관을 여는 건가요!? 돌아가신 분이 자고 있는데…….
파우스트: 그 말대로다, 히스. 죽은 사람에게는 깊이 사과해 두지. 내가 기도해 놓을게. 그런데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서, 확인해 줘.
신경 쓰이는 일이라니…….
파우스트: 우리 마법사는 마음이나 자연의 신비의 힘을 쓴다. '거대한 재앙' 도 그 중 하나다. '거대한 재앙' 이 다가올 때 그 신비의 힘도 더해지지. 세계가 위협받고 있는데 조심성 없을 수도 있지만, 그 시기를 노려 의식을 치르는 사람도 많아.
히스클리프: ……'거대한 재앙' 의 힘을 빌려서 무슨 의식을 치룬 사람이 있다는 건가요……?
파우스트: 그래.
시노: ……이건…….
8화 묘지에서 방황하는 영혼
히스클리프: 어…… 어때.
시노: 허공이다.
히스클리프: 허공……?
네로: 관 속에는 뼈 한 조각도 없어. 다른 무덤들도 어쩌면 다 똑같을지도…….
시노: 몇 가지 확인하고 올게.
히스클리프: 나…… 나도 도울게.
시노: 무리하지 마. 너 관에 안 닿아도 돼. 현자님과 함께 있어.
히스클리프: ……알았어…….
네로: ……싫은 바람이네…….
파우스트: 망령들이 노하고 있군. 착각하지 마. 우리는 너희를 털러 온 게 아니야.
휘휘 하고 섬뜩한 바람이 분다. 눈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사람의 얼굴을 한 하얀 안개가 묘지를 넘나들고 있었다. 파우스트가 눈꺼풀을 감는다.
파우스트: '사트리크나도 무르크리도'
기도하듯이 조용히 주문을 외우자 그의 수중에 낡은 거울이 나타났다. 밤과 달빛을 엄숙하게 비춘다.
파우스트: 진정해라, 방황하는 영혼들이여. 밤의 정적에 편안하기를.
휘휘 하고 탄식하듯 묘지와 나무들이 흔들리고 있다. 천천히 바람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파우스트: …….
시노: 파우스트, 몇 개 조사해봤는데 전부 없었어.
파우스트: 그런가.
네로: 이쪽도야. 장물은 어떡할래?
파우스트: 장물?
네로: 값나가는 물건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어. 임자도 저승에 있는데, 안 털 이유가 없잖아?
파우스트: …….
네로: 아, 농담농담.
파우스트: 질이 나쁘군.
히스클리프: 추앙 받을거야, 네로!
네로: 미안미안.
시노: 나는 네로에게 찬성이야. 죽은 사람에게 금화를 줄 바에야, 굶은 아이에게 주면 되는데.
히스클리프: 죽은 자의 추억이 담겨있는 거야. 죽은 후에도 그 사람들 거라고. 그러니까…….
히스클리프: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
파우스트: 네로, 그 자리에서 뛰어봐.
네로: 안 훔쳤어!
시노: 저거 아니야? 봐, 저기 목줄이 떨어졌어.
히스클리프: 목걸이.
시노: 목걸이가.
파우스트: 시노, 기다려. 가까이 가지 마.
시노: 어째서.
파우스트: ……조금 전까지는, 거기에 없었어.
신음 소리를 내면서 바람이 빠져나간다. 밤하늘에 빛나는 달이 빛을 더했다. 햇빛을 받아 꽃피는 식물처럼 목걸이에 달린 보석도 빛을 더해간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목걸이는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시노: 조심해, 현자.
에……?
시노: 셔우드의 숲과 같은 느낌이야. 섬뜩할 정도로 힘이 넘쳐.
파우스트: '거대한 재앙' 이 이 세계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영향이곘지. 망했을 것이 되살아나고, 잊혀졌을 것이 이름이 떠올려지고, 풍화되었을 집념이 재연된다. 그것들은 '거대한 재앙' 의 힘을 얻고 폭주하기 시작해.
……!
순간, 목걸이에서 빛이 뿜어졌다. 눈부신 빛이 묘지를 비추고 폭풍처럼 거센 바람이 몰아친다. 날아갈 뻔했을 때, 네로가 나를 안고 뛰어올랐다. 나무 위에 착지해서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9화 목걸이가 내뱉는 원망
네로: 현자 씨, 괜찮아?
네로! 죄송해요! 고맙습니다!
네로: 천만에.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높으신 분들에게 혼나니까. 저것보다 그쪽이 더 무서울 뿐이야.
나는 나뭇가지 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목걸이의 빛은 일곱 가지 색으로 물결치며 거대한 눈알처럼 부풀어 올랐다. 묘지 전체를 짓누를 듯한 휘황찬란하고 큰 빛이다. 사정없이 날뛰는 바람과 빛을 받으며 시노가 주문을 외웠다.
시노: '맛차 스디파스'
그 순간, 그의 수중에 그의 몸집에 맞지 않을 정도로 큰 낫이 출현했다. 뒤숭숭하고 흉악하지만 순수한 은빛 칼날의 빛은 시노 그 자체였다.
히스클리프: 시노……!
시노: 맡겨둬. 내가 할게.
말하자마자 시노는 화끈한 빛처럼 뛰어들었다. 저승사자처럼 가볍게 큰 낫을 휘두르고, 순식간에 빛을 가르고 있다.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빛은 점점 약해져 갔다. 마지막 남은 보석을 부수기 위해 시노가 힘차게 큰 낫을 쳐든다.
시노: 이걸로 끝이다. 좀 더 얌전한 목걸이었다면 마님에게 선물로 드리는건데. 아쉽지만 너는 버르장머리가 없어.
……윽.
시노의 큰 낫이 밤바람을 가르며 목걸이의 보석을 베어버린다. 보석은 산산이 부서져 무수한 빛을 내면서 소멸되어 갔다. 달빛을 받으며 큰 낫을 메고 있는 시노의 모습만 남았다.
네로: 꽤 하네, 너.
네로가 감탄하자 시노는 득의양양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시노: 뭐 그렇지.
히스클리프: 여전히 무모한 짓을 하지, 시노는…….
시노: 불평하기 전에 칭찬하라고. 가신에게 있어서 주군에게 칭찬받는 것이 기쁨이자 양식이니까.
히스클리프: 그런 말, 어디서 배운거야?
시노: 비밀. 파우스트, 너도야. 선생님이잖아.
파우스트: 잘 했다. 하지만 마무리가 허술해.
시노: 마무리가 허술하다고?
파우스트가 시노를 향해 손바닥을 갖다댔다. 직후, 시노의 뒤쪽에서 그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온 파편이 공중에서 움직임을 멈춘다.
시노: ……!
놀란 시노가 돌아보는 것과 파우스트가 손가락을 올리는 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찰칵, 하고 울려퍼지는 소리와 함께 파편들이 모래처럼 무너져 간다.
파우스트: 그렇지?
시노: ……칫…….
히스클리프: 야, 혀 차지마. 그 전에 감사합니다잖아.
시노: ……고마워.
파우스트: 흥…….
파우스트는 작게 웃은 뒤 둔착하게 눈동자를 찡그리며 바람에 휩쓸리는 모래를 눈으로 쫓았다. 목걸이에 깃든 무엇인가에 말을 걸듯이 조용히 말을 자른다.
파우스트: ……사라지는 것이 좋다. 너의 원망이 얼마나 깊을지, 너의 분노가 얼마나 심할지……. 나만큼은 아니겠지.
……파우스트……?
파우스트: ……혼잣말이다. 돌아가지. 새의 그림자는 못 찾았지만 수확은 있었어. 현자, 뒷일은 맡기겠다.
네. ……에!?
파우스트: 난 히키코모리야. 수수께끼 풀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다른 마법사들에게 부탁해.
시노: 어째서. 내일도 조사하자.
히스클리프: 아, 저도 조사해 보고 싶어요. 선생님도 도와주실 수 있나요?
파우스트: 하? 싫은데.
네로: 뭐, 내일 높으신 분들께 보고드리기로 하자. 오늘 밤은 돌아가고.
시노: ……알았어.
이렇게 우리는 묘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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