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클로에: 와앗, 괜찮아!?
기세가 너무 붙어서 바닥에 쓰러져 버린 곰인형에게 클로에가 달려간다. 인형은 양손을 바닥에 대고 벌떡 일어나더니 빙글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우리를 손짓하고 등을 돌려 걷기 시작한다.
어디론가 안내해 주는 걸까요?
클로에: 아마도……. 일단 쫓아가보자!
화이트: 그래서.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란?
피가로: 저택에 있는 사역마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아마 액재의 영향이겠지만…… 그렇다고 쳐도 술이 너무 잘 되어 있어요. 집 주인은 돌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이만큼의 수를 따르게 하려면 반드시 그 근원이 되는 매개체나 술자가 있어야 하는데.
샤일록: 저택 어딘가에 현저하게 장의 질서가 흐트러져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저희가 느끼고 있는 기색은 아마 거기에…….
피가로: 그렇다고는 해도 사역마가 너무 많아서 기척을 잘 못 찾겠어요. 결계인가 뭔가로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저택의 밖까지 피해가 미칠지도 몰라요. 얼른 매개체를 찾아서 정화하죠.
화이트: 호호호, 역시 그대들도 눈치채고 있었나.
스노우: 내버려두면 인형이 움직이기 시작한 정도의 소란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스노우 / 화이트: 둘의 말대로 매개체를 찾아서 신속하게 정화해야 하네.
히스클리프: 으음…….
시노: 히스, 이제 됐어. 그냥 책장이잖아. 아무것도 없다고.
히스클리프: 잠깐만. 조금만 더. 이 안쪽에서 묘한 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아.
곰인형의 뒤를 쫓으면 히스클리프와 시노가 책장 앞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라? 히스. 시노.
시노: 현자들인가. 그쪽은 뭔가 찾았어?
아뇨……. 아까 피가로들과 보고를 했는데 눈에 띄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클로에: 이 아이가 방으로 안내해 줬어. 히스들은 뭐 찾은 거 있어?
히스클리프: 응. 이 책장 말인데…….
히스클리프가 올려다본 것은 벽에 끼워 넣는 타입의 책장이었다. 전문서 같은 두툼한 책들이 즐비해있다.
시노: 히스는 책장 안쪽에서 묘한 기척이 느껴진다는데. 너희들은 어때?
클로에: 으음, 딱히…….
루틸: 나도 신경쓰이는 느낌은 안 들어.
히스클리프: 그러면 내 기분 탓인가…….
히스클리프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자 책장 앞에서 걸음을 멈춘 인형이 깡충깡충 뛰기 시작했다.
시노: 뭐야. 받고 싶은 책이라도 있는 건가? 자, 내가 도와줄게.
시노가 허리를 둡혀 인형의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안아 올렸다. 인형은 오른손을 들고 갈색 등표지를 향해 손을 뻗는다. 책을 빼내는 순간 안쪽에서 소리가 나고 눈앞의 책장이 옆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클로에: 이건…… 숨겨진 문!?
루틸: 안쪽으로 이어지는 것 같은데 어둡네. 게다가, 왠지…….
시노: 아아, 싫은 느낌이 들어. 이게 히스가 말한 기척인가?
히스클리프: 우리끼리 가는 건 위험해. 서둘러 피가로 선생님들을 불러…….
샤일록: 이 낌새는…….
그때 샤일록들이 달려왔다. 어른들의 등장에 젊은 마법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화이트: 장의 질서가 불안정해져서 이치가 혼란스러워지고 있군.
스노우: 교묘하게 마법으로 가려져 있었으면 여기 봉인이 뜯기는 것도 시간문제.
화이트: 틀림없이 이 앞에 매개가 되는 존재가 있다.
피가로: 어떤 적이 덮칠지 몰라. 모두들, 우리 곁에서 떠나지 마.
피가로의 말에 모두 표정을 다잡는다.
화이트: 현자여, 손을.
화이트…….
화이트가 나에게 내민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손바닥은 작은데 몸채로 감싸져 있는 듯한 큰 안도감이 있었다.
화이트: 자, 모두. 문 앞으로 가도록 하지.
펼쳐지는 어둠을 향해 모두가 한 발짝 내딛는다. 순간 흐물흐물 시야가 일그러졌다. 롤러코스터 꼭대기부터 곤두박질친 것처럼. 몸이 뜨는 것 같은 느낌을 화이트의 손을 꼭 잡고 넘어간다.
…….
점점 감각이 돌아오고 나는 천천히 손에 힘을 뺐다.
여기는…….
창문도 불빛도 없는 어슴푸레한 공간. 어둑어둑한 어둠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둘러본다. 갓 만든 인형의 손발이 책상 위에 나란히 놓여져 있고, 옷장에는 인형들의 옷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혹시, 리라 씨의 아틀리에……?
클로에: 뭘까……. 누군가가 보고 있는 것 같은, 침착하지 않은 기분이 돼…….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따끔따끔 살갗을 찌르는 듯한 느낌에 손에 힘을 넣어버린다.
화이트: 현자.
화이트에게 불려져서 시선을 떨어뜨린다.
(……아…….)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던 것은 꿀을 흘린 듯한 금빛 눈동자. 어둑어둑한 어둠 속에서도 알 수 있는 그 빛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으면, 살갗을 찌르는 듯한 감각이 이상하게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화이트: ……좋아. 안색이 돌아왔군.
화이트. 감사합니……. ……!
클로에: 지금 안쪽에서 뭔가 소리가…….
저도 들렸어요……. 어쩌면 리라 씨의 사역마가 있는 걸지도…….
피가로: '폿시데오'
피가로가 주문을 외우자 주위가 밝아졌다. 어둑어둑한 경치 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물체가.
스노우 / 화이트: 이건…….
시노: 현자, 히스. 내 뒤로…….
시노: 뭐…….
클로에: 뭐야…… 이거…….
루틸: 모, 모르겠어. 괴물인지……. 아니면, 그냥 큰 인형인지…….
………….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에 말이 나오지 않는다. 소리를 내려고 뻐끔뻐끔 입을 움직여도 입에서 나오는 것은 전력 질주 후와 같은 거친 숨소리.
(뭐…… 뭐야…… 이거…….)
모르겠어. 눈앞의 물체는 애초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아. 아아, 안되겠어. 안 돼. 도무지 모르겠어. 인체의 구조를 무시하고 크게 굽은 등. 어깨에서 난 팔의 피부가 벗겨지고, 뻥 뚫린 동공. 기가 기가 기가 기가, 고장난 레코드 같은 소리를 내며…… 머리가 치켜올라져 라벤더 색의 긴 머리가 흔들린다. 눈알이 튀어나온 듯한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
샤일록: 장의 질서를 어지럽힐 정도의 존재라고는 생각했습니다만…… 설마 이만한 것이 도사리고 있었다니…….
샤일록, 저건 대체 뭔가요……? 저택에 있는 인형이나 여기 있는 인형들과도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은 저도 알지만…….
긴박감이 감도는 가운데 유독 곰인형이 '그것' 과 가까워진다.
앗……!
루틸: 안 돼. 그쪽으로 가면!
인형을 향해 손을 뻗는다. 하지만 '그것' 이 더 빨랐다. 삐걱삐걱소리를 내며 팔이 치켜든다. 이상한 방향으로 구부러진 손가락이 콕콕 울리고 이윽고 축 늘어졌다. 그러던 도중, 인형이 볼을 비벼댔다. 내가 인형을 들어올렸을 때와 똑같은 몸짓. 하지만 그때보다도 더 사랑스럽고, 더 의지할 수 있는…….
???: …….
바다처럼 맑은 푸른빛 눈동자가 곰인형에 쏠린다.
시노: 적이 아닌가……?
클로에: 모르겠어……. 하지만 나에게는 저 물체에 인형이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
어리광…….
그것을 찬찬히 본다. 라벤더 색 긴 머리. 바다처럼 맑은 푸른빛 눈동자.
아…….
그렇다. 우리는 그것과 똑같은 인형을 인형극으로 본 지 얼마 안 됐다.
설마, 리라 씨인가요……?
젊은 마법사들: !?
젊은 마법사들이 숨을 삼킨다. 하지만 피가로나 샤일록, 스노우와 화이트는 놀라지 않았다. 화이트는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내가 리라 씨가 아니냐고 말했던 '그것' 을 올려다본다.
화이트: ……형용하기는 어렵지만 리라의 영혼의 종말이라고나 할까. 아마도 리라는 영혼을 인형에 담아두려고 했던 거겠지.
7화
시노: 영혼을 인형에……? 그런 게 가능한가.
화이트: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금지술일세. 결코 손을 대서는 안되는 영역에 리라는 손을 댔고…… 실패했다.
스노우: 자신이나 누군가의 영혼을 이어주는 일은 본래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불사에 대한 도전. 신비한 힘을 가진 마법사도 세상의 이치에 어긋날 수는 없지.
피가로가 리라 씨에게 한 걸음 다가간다.
피가로: ……아아, 심하네. 영혼까지 엉망진창이 됐어.
샤일록: 비뚤어진 기술이 액재의 힘으로 더욱 혼돈에 빠졌군요. 이래서는 육체가 죽었어도 마음이 죽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어째서 이런 일이…….
화이트: 글쎄. 지금으로서는 진상은 어둠 속이지만…….
스노우: 리라는 인형들을 사랑했다. 자신의 반신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화이트: 그 녀석은 믿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언젠가 긴 생을 마감한 뒤에도 사랑하는 인형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육체가 돌이 되어도 영혼이 소멸되지 않으면 끝을 모르는 인형과 함께 영겁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루틸: 리라 씨…….
루틸의 목소리가 애절하게 울린다. 짙은 녹색 눈동자가 흔들리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루틸: ……정말 좋아하는 것과 계속 함께 있고 싶었다. 그저 그것 뿐이었군요.
지그시 눈을 감는다. 기도하듯 가슴에 손을 얹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히스클리프: 어린 소녀같은 순수한 소원이, 이런 형태로…….
히스클리프가 슬픈 듯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얼굴도 창백했다.
시노: …….
시노는 눈앞의 이형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붉은 눈동자와 슬픔과 연민을 비추면서. 돌이 된 후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한 마법사의 영혼을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화이트: 본래라면 마법사의 오랜 수명을 금술로 충당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뜻밖의 사고로 그 꿈은 무너졌네.
스노우: 술수가 어중간한 채 영혼만 묶이고 마음대로 영혼을 떼어낼 수도, 소멸시킬 수도 없다.
화이트: 영혼에 칼날이 꽂혀 있는 것과 같지. 피는 나지 않지만 상처는 퍼져 나간다.
스노우: 막을 수도 없다. 그러나 상처가 벌어져 치명상을 입어도 소멸되지도 않는다. 영겁의 괴로움만이 주어지는 걸세. 그것이 세상의 이치에 어긋난 금술의 대가.
클로에: 그런…….
클로에가 얼굴을 끌어당기며 오열을 쏟아낸다.
클로에: 히, 우윽……. 으……. 그런, 그럴 수가……!
숨쉬기가 힘들다. 가슴을 누르면서 숨을 쉰다. 얕은 호흡이 점차 진정되고 그러나 꽉 조이는 듯한 가슴의 답답함은 가라앉지 않는다. 여기 와서 많은 인형들을 만났다. 생전의 리라 씨와 인형들의 생활이 엿보이면서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런……. 어째서, 이런 일이…….)
삐걱삐걱 소리가 나면서 리라 씨가 꺾인 오른쪽 다리를 움직이려고 한다.
루틸: 아……!
딱딱 소리가 나면서 다리 관절이 빠졌다. 오른쪽 다리였던 것이 화려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러간다. 곰 인형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몇 배나 되는 크기의 그것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리려고 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모습에 가슴이 꽉 조였다.
화이트: 내가 죽은 후 한 번 리라를 찾아간 적이 있네. 죽은 뒤에도 함께 있는 우리에게 선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지. 어떻게 해서 영혼을 이었냐며 드물게 의욕적으로 물어봤지만…….
말을 끊고 화이트가 리라 씨를 올려다본다. 그 눈동자에는 연민도 멸시도 없었다.
화이트: 함께 있는 것에 너무 집착한 결과로군. 남의 말을 할 처지도 아니지만 지나친 집착은 몸을 망치는 법이지.
그때, 문 쪽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피가로: 사역마 인형들인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리라 씨의 팔이 살짝 올라갔다. 인형들을 손짓하듯 늘어진 손가락을 어색하게 움직인다. 들여다보던 인형들이 차례로 눈이 무너져 내리며 리라 씨에게 달려간다. 다시 처진 팔을 뛰어오르기도 하고 기어오르기도 하면서 피부가 벗겨진 텅 빈 곳에서 가지런히 손을 얹는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커다랗게 뚫려버린 구멍을 스스로 막아 리라 씨에게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피가로: 봉인이 풀리고 이 방이 드러나면서 드디어 주인과 재회할 수 있게 됐네.
감동적인 상봉 장면이다. 그런데도 괴롭고, 슬프고, 가슴이 아프다.
리라의 이형: …….
도려낸 파란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천천히 깜빡였고, 투명한 물방울이 뺨을 적셨다.
리라의 이형: ……줘.
금이 간 입술이 떨린다. 얇게 벌어진 입으로부터 상처가 난 이빨같은 것이 보였다. 딱딱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난다. 이빨 같은 것이 닿을 때마다 희끄무레한 것이 흘러넘쳐 간다.
리라의 이형: 부……. 줘……. 붓……. 줘…….
리라의 이형: 부숴……. 줘…….
삐뚤어진 목소리 같은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진다. 그 목소리에 화답하듯 구멍을 막던 인형들이 이번에는 리라 씨의 팔 관절 쪽으로 손을 뻗는다.
루틸: 아아, 팔 관절이 빠졌어……!
땅에 떨어진 한 개의 팔. 이어 인형들은 방금까지 막고 있던 구멍을 향해 자신의 주먹을 내리쳤다. 도자기 파편이 튀면서 리라 씨의 팔이 조금씩 사라져 간다.
클로에: 아무리 리라 씨의 명령이라고 해도, 이런 건 너무 슬퍼……!
클로에가 비통한 목소리를 냈다. 지체하지 않고 루틸이 아틀리에에 새로 들어온 인형을 멈춰세운다.
루틸: 이쪽으로 오면 안돼!
두 팔을 벌리고 인형을 들어올렸다. 인형은 루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계속 몸부림친다.
리라의 이형: 부……. 줘…….
리라 씨의 파괴를 바라는 소리 같은 목소리에 루틸이 안아 올린 인형이 그의 팔을 향해 주먹을 내리친다.
루틸: 윽…….
루틸, 괜찮아요!?
루틸: 네, 괜찮아요. 아…….
루틸이 팔 안의 인형을 보고 깜짝 놀라는 목소리를 냈다. 팔의 힘이 풀린 순간의 틈으로 인형은 스르르 구속에서 벗어난다.
클로에: 내가……!
인형 앞에 두 팔을 벌리고 가로막은 클로에가 인형의 눈동자를 쳐다본다.
클로에: ……이 인형……. 울고 있어…….
클로에의 말에 나는 인형을 보았다.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리라 씨에게 향하려 한다. 리라 씨의 팔을 파괴한 인형들도 울고 있었다. 울면서 다른 팔로 달려가다가 인형들의 머리에서 철썩철썩 소리가 난다. 삐걱삐걱 팔이 번쩍 들렸고, 잡힌 인형들이 허공에 떴다. 뚝, 하고 역겨운 소리가 난다. 도자기의 파편이 흩날렸다. 뒤늦게 인형들이 부서졌다는 것을 알았다.
젊은 마법사들: …….
지나친 광경에 말문이 막힌다. 리라 씨가 부숴달라고 바라고, 인형들이 소원을 이뤄주고, 그 소원의 대가로 사랑하는 주인에게 부숴진다. 사랑하던 인형에게 자신을 부숴달라고 한다. 사랑하던 인형을 본인의 손으로 부순다.
(사랑하는 인형들과 영원히 함꼐 있고 싶다. 그걸 바랐던 결말이, 눈앞의 광경이라니…….)
처음 리라 씨를 봤을 때 이상의 혼란으로 몸과 생각이 멈췄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문을 통해 인형들이 하나 둘씩 무너져 내린다.
리라의 이형: 부……. 줘…….
리라 씨의 소원을 들어주듯 팔에 인형들이 몰려든다. 기어오르는 인형들을 리라 씨가 뿌리치고 인형들이 벽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온 힌형들에게 이번에는 리라 씨가 팔을 들어올렸다. 모여 있떤 인형들이 한데 뭉개져 부서졌다. 리라 씨의 주위가 새하얗게 되어 간다. 내려 쌓이는 눈처럼.
리라의 이형: 부……. 숴…….
리라 씨의 빠져버린 다리에 기대어 있던 곰 인형이 리라 씨를 올려다봤다. 가까스로 말려들지 않은 듯 하지만 곰 인형에도 도자기 파편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리 와.
인형을 향해 손을 뻗었다. 봉제 인형은 다시 한 번 리라 씨를 올려다보고는 우리에게 걸어온다.
8화
스노우: 본인의 뜻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사랑하는 인형들과 함께 썩어버리길 바라는 것 같군.
화이트: 함께 할 수 없다면 서로를 손에 넣고 함께 세상을 떠나는 것을 선택한 것이지.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해도, 소중한 인형들을 부수는 일 따위는 사실은 하고 싶지 않을 거예요. 의사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도, 리라 씨가 저렇게 눈물을 흘리는 이유이지 않을까요…….
피가로: 그녀의 소원이 무엇이든 지금의 상황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어. 인형이 부서져고 장난스럽게 결합되어 뒤엉킨 영혼을 구할 수는 없으니까. 이대로 내버려두면 리라는 영원히 이형으로 남아있을 거야. 그녀를 구하려면 오히려 영혼을 떼어내고 정화하는 수밖에 없어.
샤일록: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상당한 고통이 따르겠지만…… 인형을 모두 부수고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해를 가게 되면 그녀는 진짜 괴물이 되어버리겠죠.
시노: 종자가 주인을 부수려고 하다니, 종자의 이름이 없어진다고. 이 녀석들의 명예를 더 이상 훼손하고 싶지 않아. 뜯어낸 영혼은 내가 맡을게. 이 중에서 내가 제일 빠르니까, 고통받을 새도 없이 정화해줄게.
히스클리프: 나는 인형들이 리라 씨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할게!
클로에: 히스, 나도 도와줄게!
히스클리프: 클로에……. 고마워. 같이 인형들을 멈추자.
루틸: 현자님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루틸.
루틸: 결계를 세우는 마법은 피가로 선생님에게 배우고 있거든요. 그리고 이 마법도.
그렇게 말하자 루틸이 내 손을 잡으며 주문을 외웠다. 잡은 손에서 루틸의 따뜻함이 전해져 가슴이 조이는 듯한 괴로움이 조금씩 누그러져 간다.
루틸: 당신의 마음 전부를 마법으로 지킬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제 마력으로는 이게 고작이네요. 그러니까, 이 광경에 당신의 마음이 짓눌려져 버릴 것 같다면…….
루틸의 목소리가 떨린다. 하지만 이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번떡 들었다. 도롱도롱한 눈이 부드럽게 가늘어진다. 만약 내가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고 말하면 루틸은 나와 함께 도망쳐 줄 것이다. 나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저는…….
발밑에 기댄 인형을 본다. 사랑하는 인형들과 함께 살 수 없다면 서로를 부순다. 가슴이 찢어지는 광경이다. 그런데 이 아이는 도망가거나 하지 않는다. 인형이 버튼의 눈을 리라 씨에게 돌렸다. 모든 결말을 그 눈에 각인시키듯이.
루틸, 고마워요. 루틸은 이게 고작이라고 했지만 저의 마음은 가벼워졌어요. 어떤 결말을 맞이한다고 해도 도망치지 않아요. 제 눈으로 끝까지 지켜볼 거예요. ……이 아이와 함께.
루틸: 현자님…….
손을 꽉 움켜쥔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인다. 루틸이 안심한 듯 표정이 좋아졌다.
피가로: 루틸. 현자님. 게다가 모두…….
그렇게 말하고 피가로가 젊은 마법사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피가로: 마음씨 상냥한 너희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이것만은 말하게 해 줘. 이제부터 어떤 광경이 펼쳐진다고 해도 자신을 탓하지 말 것. 이건 구제야. 리라를 구하기 위해 너희들의 힘을 빌려줘.
피가로의 말에 젊은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스노우 / 화이트: 기다리게 했군, 리라여. 자, 이제 끝내도록 하지.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인형들이 리라 씨에게 향한다.
클로에: '스위스피시보 보이팅고크!'
클로에의 주문으로 인형들의 움직임이 멈춘다. 하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멈춰있던 인형들이 수의 힘으로 마법을 깨고 움직이려고 한다.
클로에: ……윽. 다시 한 번! '스위스피시보 보이팅고크!'
클로에: 이제 소중한 주인님을 부수는 슬픈 일은 하지 않아도 돼! 지금부터 우리가, 너희들도 구할 거니까……!
클로에의 비통한 목소리를 떨쳐내듯 한 인형이 달리기 시작한다. 흩어진 도자기 조각을 딛고 리라 씨의 다리를 향해 작은 손을 활짝 벌렸다.
클로에: 안돼……! 모처럼 예쁘게 만들어졌는데, 난폭한 짓을 하면 손가락이 부서져버려……!
히스클리프: '레프세바이브러프 스노스'
클로에: ……! 인형이 멈췄다……. 히스, 고마워!
히스클리프: 클로에의 마법으로 막을 수 없었던 부분은 내가 커버할 테니까 안심해. 둘이서 모든 사역마들을 멈추자!
클로에: 응!
스노우 / 화이트: '노스콤니아'
피가로: '폿시데오'
샤일록: '인비벨'
선생님 역의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자 리라 씨의 몸이 새하얀 빛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녀는 긴 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마치 아이가 짜증을 내듯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더니 한쪽 밖에 없는 팔이 치켜들어졌다. 동시에 크게 구부러진 키도.
……윽.
숨을 삼켰다. 구부러져 있었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족히 2미터는 넘는 크기다.
리라의 이형: 아……. 아…….
발버둥치듯이 리라 씨의 팔이 하늘을 가른다. 다음 순간, 무언가가 총알처럼 날아와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루틸: ……리라 씨의 손가락이…….
루틸의 목소리에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그의 결계에 튕겨져 나간 거대한 손가락 같은 것이 가로놓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날 것 같아 살짝 손을 뗐다. 옆에 있는 루틸을 본다. 루틸의 눈동자도 비통하게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파란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올려다본다.
화이트: 리라.
스노우: 리라여.
화이트: 어째서 저항하지. 그대가 원하던 것이 아닌가.
스노우: 그 모습은 그대가 원했던 모습이 아니네. 그래서 부서지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노출된 눈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리라의 이형: …….
자신을 감싸고 있는 마법의 빛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크게 흔든다.
(혹시…….)
함께할 수 없다면 함께 세상을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무섭고 힘들고 사실은 싫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처음부터 원했던 것은 처음부터 단 하나.
스노우: 참극이로군. 이 녀석은 이제 리라면서 리라가 아닌데도. 여기 있는 것은 복잡하게 연결된 영혼의 작은 부분과 마음의 한 조각 뿐. 그런데 이렇게까지 집착을 보이다니.
연민과도 비슷한 목소리였다. 화이트가 리라 씨를 올려다보며 입김을 내뿜는다.
화이트: 막상 죽음에 직면하니 삶에 집착하게 된다. 생물의 본능이지. 이형이 되더라도 사랑하는 것과 함께 살고 싶다. 그것이 소원인가.
마치 자신에게 묻는 듯한 말투였다.
화이트: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에는 변함이 없네. 영혼을 떼어내고 정화한다.
리라의 이형: …….
리라 씨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파란 유리구슬에 불꽃 같은 것이 깃든다. 펄펄 끓는 솥에 장작을 지피듯 활활 불길이 타오른다. 증오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리라의 이형: 아……. 아……. ……!
……!
리라 씨의 통곡같은 소리가 들려 저택 전체가 떨린다.
클로에: 윽……. 인형들의 힘이 갑자기 강해졌어……!?
히스클리프: 안돼. 억제할 수 없어……!
발이 묶여 있던 인형들이 마법을 깨고 클로에들에게 덤벼들려고 한다.
시노: ……'맛차 스디파스!'
샤일록: '인비벨'
클로에: 인형들이 튕겨나가졌어…….
시노: ……용서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히스클리프: 시노…….
시노가 억울한 듯 큰 낫의 자루를 움켜쥔다. 쉽게 적을 분쇄할 수 있는 그 칼날은 최대한 인형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시노 자신도 조금은 인형들에게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의 옆에 선 샤일록 또한 클로에를 돌아보았다.
샤일록: 용서해 주세요, 클로에. 당신도 괜찮나요?
클로에: 샤일록……. 으응, 사과하지 말아줘. 도와줘서 고마워. 그런데 왜 우리를…….
피가로: 우리가 리라를 공격했기 때문에 주인을 지키려고 맞선 거야. 클로에와 히스클리프는 공격하지 않았지만 마법으로 인형의 행동을 억제하고 있었지. 이제 손님이 아니라 좋지 않는 침입자라고 판단한 걸지도 몰라.
피가로의 말을 긍정하듯 바닥에 흩어진 도자기 조각들이 ㄷ둥실 떠오르며 칼떼처럼 마법사들을 에워싼다.
피가로: '폿시데오'
돌진해 온 무수한 파편들이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친 것처럼 순식간에 부서졌다.
9화
시노: 너희들은 내가 지켜.
큰 낫을 들고 시노가 앞장선다. 그런 그와 나란히 선 것은 파이프를 그을리는 샤일록이었다.
샤일록: 시노. 아까처럼 파편까지도 조종하게 되면 사방에서 공격을 가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당신의 등은 저에게 맡기세요.
시노: ……틀림없이 어른이 지켜줄테니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을 줄 알았어.
샤일록: 의욕에 불타는 젊은 싹은 지켜보고 싶어지는 성격이라. ……나머지는 피가로 '선생님' 을 조금 따라해볼까 하고.
피가로: 하하, 과연.
시노: 그러면 내 등은 맡기지, 샤일록.
샤일록: 네.
그리고 시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시노: '맛차 스디파스!'
다시 덮쳐오는 인형을 큰 낫으로 찢어버리고 날아오는 파편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선풍적인 바람처럼 격렬하고 가볍게.
샤일록: ……그래. 당신은 그대로 자유롭게 움직이세요. '인비벨'
시노의 등 뒤에 닥친 위협은 흔들리는 자연이 모두 잡아갔다. 인형도 도자기 조각도 전부. 나비처럼 요염하게.
리라의 이형: 아아……!
짜증나는 목소리를 내며 리라 씨가 큰 다리를 내리친다. ……화이트들을 향해. 하지만 화이트는 공격을 받으려는 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스노우: 화이트……?
화이트: '노스콤니아'
화이트가 주문을 외웠다. 관절이 빠지면서 버팀목을 잃은 다리가 허공에 녹듯 사라진다.
리라의 이형: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증오와 선망. 질투와 동경.
화이트: …….
화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팔이 내려쳐진다. 다리와 마찬가지로 팔도 허공으로 사라졌다.
화이트: 내가 부러운가. 그대와 마찬가지로 나도 죽었지. 그런데도 왜 자신은 소멸해야 하는 거냐면서. 왜 나처럼 살지 못하냐고.
리라 씨의 움직임이 멈춘다. 화이트를, 스노우를, 그리고 무수한 사역마들의 잔해를 보고 있다. 스노우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간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섰다.
스노우: 리라. 그대는 우리처럼 될 수 없네. 나는 화이트를 죽였다. 울고, 또 울고, 화이트의 영혼을 필사적으로 연결했지.
화이트: 우리는 쌍둥이이기 때문에 영혼의 기질이 비슷하다. 더욱이 우리는 2천 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보낸, 영혼의 반신일세. 그러므로 나는 망령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겠지. 어떤 것들은 아무리 바라도 얻을 수 없다. 리라, 그대는 우리처럼 될 수 없어.
보여주듯 손과 손을 맞잡았다. 두 얼굴이 리라 씨를 쳐다본다.
리라의 이형: 아……. 아…….
두 팔이 있었다면 그녀는 분명 얼굴을 가렸을 것이다. 죽어서 여전히 함께 있는 두 사람을 동경했다. 이 저택에서 사랑하는 인형들에게 둘러싸여 영원한 시간을 사는 꿈을 꿨다. ……하지만 꿈은 꺠졌다. 철저하게 흔적도 없이.
리라의 이형: 아…………!
삐걱거리는 소리에 고막이 떨렸다. 책상에 있던 바느질 도구가, 옷장에 장식되어 있던 옷이, 공중을 난무한다.
시노: 현자!
시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바느질 도구가 마구 뿌려져 안에서 가위가 튀어나온다. 순간, 모두의 안색이 변했다.
!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가위가 나를 향해 날아온다.
루틸: 현자님!
루틸의 외침 소리.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 결계가 깨진 것이라고 머리가 이해했을 때는 루틸에게 감싸지듯이 안겨지고 있었다. 흔들리는 옅은 금발 머리 너머로 그의 등을 꿰뚫려는 예리한 칼날이 보인다.
(싫어, 싫어, 싫어)
뭍으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헐떡인 내 시야에는 칼과는 다른 무언가가…….
루틸: ……윽.
충격을 각오하고 루틸이 눈을 질끈 감는다.
루틸: ……에? 어, 어라? 아프지 않아…….
끌어안고 있던 손을 놓고 루틸이 등 뒤를 돌아본다.
루틸: ……! 아아, 이런 일이……!
루틸이 소리를 질렀다. 루틸이 어깨 너머로 보고 나도 작게 소리를 질렀다.
곰 인형…….
바닥에 구른 곰 인형의 배에 깊숙이 재단 가위가 꽂혀있다.
화이트: ……그대, 현자에게 손을 댔군.
화이트의 주변을 감도는 공기가 변하는 것을 알았다.
화이트: 원래대로라면 가차없이 영혼을 뜯어내고, 그것보다 더 심한 고통을 주고 싶지만 그대의 사역마가 현자를 지켰네. 그러므로 그쪽은 용서하지.
화이트가 유유히 미소짓는다.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리라 씨 쪽인데, 역전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화이트: 우리를 동경하고 꿈이 깨진, 어리석고 불쌍한 인형사 리라여. 그대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신세를 졌지. 그 답례로 지금 여기서 묻어주겠네. 그대들은 영원히 함께일 것이다.
화이트: '노스콤니아'
화이트가 주문을 외운다. 화이트의 눈동자와 똑같은 금빛 알갱이가 리라 씨의 몸을 감싸안는다.
리라의 이형: 아, 아, 아, 아아, 아아, 아아아아아아……!
귀를 막아버리고 싶어지는 비통한 외침.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팔도, 화이트를 걷어차는 팔도, 그녀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사역마 인형들도 눈앞의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샤일록: ……같은 서쪽의 마법사로서, 적어도 사라지기 전에 선물을.
샤일록: 조금이라도 당신의 통증이 누그러지길 바라며. '인비벨'
조용히 기도하는 듯한 샤일록의 주문. 빛나는 나비가 리라 씨를 감싸는 빛에 녹아든다.
리라의 이형: 아………………. 아, 아아………….
점점 멀어지는 리라 씨의 외침. 거기에 깃든 괴로움의 빛이 금은 옅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이기심일까.
리라의 이형: …….
모두가 침을 삼키며 지켜보는 가운데, 금빛의 빛은 빛을 더해 완전히 리라 씨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반짝반짝 모든 것을 감싸는 빛의 베일. 아무것도 모른 상태였다면 환상적인 광경으로 넋을 잃었을 것이다.
화이트: 잘 가게나, 리라여.
리라의 이형: ……!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비명과 함께 금빛 빛이 났다. 동시에 리라 씨의 몸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튀어나온다.
시노: '맛차 스디파스!'
지체하지 않고 시노가 공중을 날며 큰 낫을 내리친다. 저승사자를 떠올리게 하는 동작인데도 눈앞의 검은 구름을 가르는 그는 전사처럼 보였다. 흩어진 검은 입자는 새하얀 눈처럼 그 모습을 바꾸었고, 이윽고 공중에 녹아 사라졌다. 순간, 이형이 크게 소리를 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역마 인형들도 실이 끊어지듯 줄줄이 바닥에 쓰러져갔다. 그리고 울고 싶을 정도의 고요함이 아틀리에를 감쌌다. 그때, 바닥에 나뒹굴던 곰인형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부드러운 촉감과는 이질적인 단단하고 날카로운 칼날은 변함없이 그대로다.
(빼주고 싶지만…….)
사람처럼 피가 뿜어져 나오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망설여진다. 또 다른 아픔을 이 아이에게 주는 것 같아서.
화이트: 주술의 잔재로 움직였던 것이니 곧 그 녀석도 움직이지 않게 될 것이다.
……왜 이 아이는 저를 감싸줬을까요?
스노우: 그 아이의 몫일세. 손님인 그대를 지키려고 한 것이겠지.
화이트: 초대한 손님을 다치게 하면 손님을 대접하는 사명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사명…….
시노: 이 녀석은 역할을 다했다는 거잖아. 그러면 상을 줘야지.
천천히 무릎을 꿇은 시노가 인형을 들어올린다.
시노: 현자를 잘 지켰어. 훌륭해.
위로하듯, 찬양하듯, 시노의 손이 인형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이윽고 그는 그 손을 천천히 아래로 이동시켜 꽂힌 가위를 덥석 쥐었다.
시노: 아무리 아픈 상처라도 사명을 다하고 난 상처라면 자랑스럽지. 분명 나으리도 칭찬해 주실 거야. 나 역시 주인을 섬기는 몸으로서 너를 칭찬할게. 네가 움직이지 않는 그때까지.
그리고 잡은 손을 힘껏 잡아당긴다. 재단 가위가 빠지고 인형의 배에서 솜이 튀어나왔다.
10화
히스클리프: 네가 있었기 때문에 책장의 장치를 풀고 숨겨진 방을 찾을 수 있었어.
클로에: 리라 씨나 너의 동료들을 구할 수 있었던 것도 네 덕분이야!
루틸: 현자님을, 나를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시노: 들었어? 이만한 공을 세운 너는 대단한 녀석이야. 같은 입장으로서 너를 존경한다.
봉제 인형이 시노를 올려다본다. 시노의 뺨에 손을 뻗으려고 했으나 팔이 실이 끊어지듯 쳐졌다. 그 손을 자신의 뺨에 대고 시노가 미소짓는다.
시노: 잘 자.
움직이지 않게 된 인형을 바닥에 구른 리라 씨의 얼굴 옆에 늘어놓는다. 크게 무너진 그녀의 입가가 부드럽게 터진 것처럼 보였다.
극장의 지배인: ……그 리라가. 그런…….
리라 씨의 저택을 떠난 우리는 보고차 인형 극장에 돌아왔다. 보고를 들은 지배인은 크게 숨을 내쉬더니 애처롭게 목소리를 떨었다.
극장의 지배인: 그녀는……. 리라는, 계속 혼자서 괴로워하고 있었군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젊은 마법사들도 마찬가지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말이 안 나와서 시선을 떨어뜨린다.
극장의 지배인: 아아……. 그런 얼굴을 하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와주지 않았더라면 리라는 계속 그 고통 속에 있었겠죠. 그러니 근의 영혼을 구해주신 여러분은 부디 가슴을 펴주세요.
상냥하게 미소지은 지배인은 어딘가 먼 곳의 그리운 경치를 보는 듯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극장의 지배인: 리라는…… 정말 인형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직접 만든 인형을 어루만지면서 나도 언젠가 이 아이들처럼 썩지 않는 아름다운 인형이 되고 싶다며. 그리고 인형들과 계속 살고 싶다고 했죠. 말하는 미소는 마치 소녀처럼 가련하고, 그러면서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녀는 인형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눈을 돌려주지는 않았습니다만…… 배우로서의 자신이 아닌 인형이라는 예술을 통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을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극장의 지배인: 리라가 보기에는 사랑하는 인형들을 무대로 데려가기 위한 인간을 원했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새로운 꿈과 많은 행복을 받았으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지배인은 멋쩍게 웃었다.
클로에: ……지배인 씨는 리라 씨를 정말 좋아했구나.
극장의 지배인: 좋……!? 아니, 그런! 그녀처럼 멋진 여성에게 제가 마음을 두다니. 그런, 그런……!
시노: 얼굴이 빨개졌어.
클로에: 아, 아니, 딱히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니야! 다만, 지배인 씨는 인간인데 마법사인 리라 씨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싶어서.
극장의 지배인: 아하하……. 그렇군요. 리라에 대한 좋아가 사랑인지, 정인지……. 무슨 뜻인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확실히 저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50번 말을 걸었떤 중 한 번, 인형이 아니라 저를 향해 대답해 준 것만으로 너무 기뻐서 리라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을 정도로요.
그리고 그는 수줍은 웃음을 쓸쓸한 미소로 바꾸며 무대를 본다.
극장의 지배인: 저는 그녀의 최후는 사랑하는 인형에게 배웅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대본을 썼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진정한 소망이었던 인형들과 긴 시간을 살아가는 이야기 쪽이, 리라는 더 기뻐했을지도 모르겠군요.
클로에: 지배인 씨…….
(리라 씨는 많은 인형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그 역시 리라 씨를 생각하는 사람이었구나…….)
모두가 이곳에 없는 그녀를 생각하며 무대 위를 바라본다. 루틸만이 홀로 무언가를 떠올리듯 천장 너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루틸: ……영혼이 정화된 후, 리라 씨였던 인형이 웃는 것처럼 보였어요.
루틸: 이야기같은 아름다운 이별은 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자신이 사랑했던 인형과 인형에 둘러싸여 떠난 그 순간에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고……. 그래서 분명 지배인 씨의 연극도 기뻐해줬을 거라고 생각해요. 멋대로 생각한 건 죄송합니다. 리라 씨의 최후의 표정이라도 전하고 싶어서…….
극장의 지배인: ……윽. 충분합니다……. 너무 충분할 정도예요……!
눈시울을 누르자 지배인이 작게 오열을 쏟아냈다.
화이트: 리라의 저택은 정화해 두었네. 이제 이변이 일어나는 일은 없겠지.
스노우: 인형의 잔해 같은 것은 그대로 두었지만, 그것도 우리 쪽에서 처분하는 편이 좋겠나.
극장의 지배인: 아뇨, 제가 책임을 지고 매장을 할 테니 맡겨주세요. 저택도 계속 제가 관리하겠습니다.
피가로: 이제 극의 마지막에서 인형들이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겠지.
극장의 지배인: ……혼란스러워하는 관객이나 낙담하는 관객도 나오겠죠. 저희는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에 인형들에게 눈물을 흘리는 마법을 걸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인형들을 인간처럼 움직이게 하는 기술 뿐이에요.
샤일록: 하지만 그 기술로 서쪽 나라의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극장이 되었다. 당신들이라면 반드시 헤쳐나갈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도 멋진 인형극을 계속해서 부디 그 이름을 전세계에 떨쳐주세요.
클로에: 저기, 만약 괜찮다면 그 연극을 또 보러와도 괜찮을까? 리라 씨가 남겨준 인형들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모습을 앞으로도 지켜보고 싶어.
극장의 지배인: 네, 부디. 다음에는 다른 현자의 마법사 분들과 함께 와주세요. 현자님. 현자의 마법사 여러분. 다시 한 번, 리라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배인은 우리의 얼굴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깊이 숙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석양이 부드럽게 방을 비춘다. 의뢰를 해결하고 며칠이 지났다. 이전의 의뢰로 배운 지식이나 이 세계의 일을 현자의 서에 써넣어 간다.
(많은 사역마에게 사랑받은 마법사……. 스노우와 화이트는 사역마는 몇 번이나 바꿔치기를 해도 효과가 있어 재생하는 마법 도구와 같다고 했었지.)
리라 씨가 만든 많은 인형들이, 곰 인형의 모습이 뇌리에 되살아난다.
(하지만 리라 씨는 사역마에 애정을 가졌어. 함꼐 살며 가족같은 시간을 보내고, 그 결과 집착했지. ……만약 나에게 사역마가 있다면,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편이 좋을까. 마음에 들고 귀여워 해버리면, 만약 무슨 일이 생길 때 괴로운 경험을 할지도 모르고…….)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타이른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랑하는 것의 형태를 하고 있다면……. 나는 언제까지 애착을 갖지 않고 있을 수 있을까.
스노우: 음……. 사랑스러운 거라면 아이는 어떤가?
화이트: 음. 나는 아이를 정말 좋아하네. 그러면 아이로 할까.
스노우: 겉모습은 어떻게 하지? 무심코 쓰다듬거나 응석부리고 싶어지는 귀여운 것을 좋아할 것 같군.
화이트: 예를 들면 나 같은?
스노우: 맞아. 화이트 쨩 같은!
피가로: 핸섬이라는 선택지는 없나요?
화이트: 피가로.
스노우: 오오, 샤일록도 함께인가.
샤일록: 우연히 만났거든요. 두 분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나요?
스노우: 현자에게 줄 선물 상담일세.
화이트: 그러면 피가로들에게도 물어봐야지.
스노우: 피가로. 그대로 사랑스러운 거라고 한다면 뭐가 생각나지?
피가로: 으음, 일방적으로 동물이나 그런 게 아닐까요? 현자님이나 어린 마법사는 작고 푹신한 것을 좋아하잖아요.
화이트: 흠. 확실히. 샤일록은 어떤가?
샤일록: 저는 모든 것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해서요. 어느 하나를 고르는 것은 어렵지만……. 굳이 말하자면 변덕스럽고, 장난을 좋아하고, 손이 많이 가는 것일까요.
스노우: 와아, 수준급 답변!
화이트: 사랑스러운 걸 얘기했는데 왠지 섹시한 기색!
스노우 / 화이트: 그러나 일리가 있을지도 모르네.
화이트: 그러고보니 현자는 동물……. 고양이를 좋아했군.
스노우: 게다가 고양이는 변덕스럽고 장난을 좋아하고 손이 많이 간다고 들었네.
화이트: 고양이 자체를 사역마로 만드는 것은 안되니 고양이 비슷한 걸로 만들까.
스노우: 그것을 현자의 사역마로 하자.
피가로: 사역마? 그게 현자님께 드리는 선물인가요?
화이트: 음. 이번 건으로 매일의 임무에서도 현자에게 위험이 미치는 것을 재차 실감했네.
스노우: 마법사가 많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항상 현자의 편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화이트: 현자는 사역마에 동경이 있다고 말했으니 그게 사랑스럽다면 더 좋아하겠지.
샤일록: 현자님을 지키는 것이라면 저는 찬성입니다만…….
피가로: 애착이 가지 않는 조형으로 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지난 번 임무 때도 상당히 마음이 지친 것 같고요.
화이트: 애착을 가진다고 해서 현자는 리라처럼 되지 않네.
스노우: 현자는 똑똑한 아이일세. 쉽게 없어지는 것들에 애착을 갖거나 하지 않아.
피가로: ……그렇네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저희가 잡을 수도 있고요.
샤일록: 네. 저희의 현자님을 잃을 수 없으니까요.
스노우: 곁에 있으면 짧은 교제라도 그 사람의 기질을 알 수 있다.
화이트: 지혜롭고 상냥하며 이별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있지만, 집착하여 망치는 인간은 아니지.
스노우: 자, 그렇게 결졍됐다면 몇 가지 시험 삼아 만들어볼까.
화이트: 사랑스러운 외모에 현자를 지키는 사명을 부여한…….
스노우 / 화이트: 사크리피키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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