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모두 저택을 나와 잠시 길을 걷는다. 주위에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파우스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파우스트: 어떻게 생각하지?
오즈: 소년을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보았다. 교묘하게 기척을 감추고는 있지만, 그것은 확실히 바르시의 기척이었어.
젊은 마법사들: ……!
마법사들의 얼굴이 굳어진다. 팽팽한 실타래가 치듯 그 자리에 긴장이 감돌았다.
미틸: 하지만 …… 훈장은 엄중히 봉해져 있다고 리카르도 씨가 말했었죠.
시노: 아아. 바르시도 거기서 자고 있는게 아니었나?
파우스트: 강한 술수로 봉인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낌새를 살피려 해도 단편적으로 느껴지는 정도일 뿐. 핵심적인 것은 얻지 못했어.
샤일록: 정령이 좋아하는 말을 늘어놓은 영창과 피의 제물……. 봉인 자체가 지극히 강한 것이라 그가 말했던 그것이 오래 술을 유지하고 있던 요인이었겠지만…….
무르: 그것도 마음의 휴식일 뿐. 어떤 순간에 다시 힘을 얻는다면 절대 깨어나지 않을 거라는 법도 없어. 예를 들면, 그 달의 영향이라든가!
아서: 그러면, 봉인에 '거대한 재앙' 의 영향이……?
화이트: 아직 정확하게는 말할 수 없네. 그 아이가 시노의 물음에 동요했을 때 기척이 강해졌지만.
오즈: 그 아이는 이미 피를 주고 있다고 말했었다. 굶주린 바르시가 그의 피의 맛을 찾아 더듬는 것일지도 모르지.
저…….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나는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바르시는 달콤한 향기와 이상한 소리로 인간을 유혹하는 거죠. 기분 탓인가 싶을 정도로 한순간이었지만, 아까 저택에 있었을때…….
화이트: 설마, 느낀 건가?
아마도요. 이명과 비슷한 소리와 꿀 같은 향기가 났어요. 여러분은 뭔가 느끼지 않았나요?
시노: 나는 딱히.
미틸: 저도…….
아서: 저도입니다. 바르시는 인간의 피를 즐겨 찾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자님께만 들렸을지도…….
무르: 그 이명은 계속 들으면 감각이 마비되고 매혹되는 바르시의 울음소리야. 살짝 들렸을 정도라면, 지금은 상황을 지켜보는 느낌인가?
화이트: 파우스트가 저택에서 오즈를 제압한 것은 정답이었네. 소년의 마음이 불안정해지면 바르시에게 틈을 보이게 되니.
오즈: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서 봉인할 곳을 찾을 건가?
샤일록: 리카르도에게 이야기를 제대로 들었으면 합니다만…….
다양한 의견이 몰려들었다가 되돌아온다. 파도 같은 그것에 미틸과 함께 혼란해 하고 있는데, 이윽고 아서가 말을 꺼냈다.
아서: 이 거리에서는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어. 연속으로 피해를 입는 사건……. 목 언저리에 물린 듯한 상처를 입는다, 라고.
그건…….
아서: 오늘 아침에도 사건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일단 그 장소나 과거의 현장을 더듬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원래부터 묘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소행이 아니라 마물 사건의 종류일지도 몰라요.
미틸: 설마, 그게 바르시의……?
오즈: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상처의 목적이 살상이 아니라 흡혈 때 생긴 것이라면.
무르: 확실히, 리카르도 외에 표적이 되는 사람이 없다고도 할 수는 없네. 이미 다른 사람의 피를 빨 정도 갉아먹은 누군가가 있다면, 조만간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옥이 될지도!
시노: 책에서 읽은 것과 같은 재난이야……. 파우스트.
파우스트: 알겠어. 나눠서 조사하자. 몇 명은 저택으로 돌아가고, 남은 자들은 사건의 흔적을 따라가도록 하지.
미틸: 이쪽이 3번대로……. 이 길 끝에 꽃집이 있다고 했죠.
화이트: 오, 간판이 나와있구먼. 이제 곧 가게 문을 닫을 것 같은데.
오즈: 그 소년이 이야기했었던 오늘 아침 피해자의 주소인가.
아서: 네. 3번 거리의 꽃집 아이가, 심한 부상을 입었다고……. 아아, 거기 부인. 잠시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꽃집 안주인: 어머…… 어서오세요. 못 보던 알굴이네. 미안하지만 이제 문을 닫았어. 아들이 다쳐서 간병을 해야 하거든.
미틸: 그 아드님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서…….
아서: 우리는 지금 이 거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조사를 하고 있거든.
꽃집 안주인: 조사……. 실례지만, 당신들은 자경단이 아니지?
화이트: 미안하구먼. 우리는 현자의 마법사일세. 어느 소식통으로부터 이 거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조사하고 있네. 협조해 주겠나?
꽃집 안주인: 무슨! 그 유명한 현자님의……!? 그런 거라면 저도 부탁하고 싶을 정도예요. 자, 이쪽으로 오세요.
꽃집 안주인: 어이, 깨어 있니?
꽃집 청년: ……일어나 있어. 이야기도 들렸고. 자, 들어와.
아서: 쉬고 있는데 미안해. 당시의 일을 조금이라도 듣고 싶어서.
아아……. 저야말로 이런 모습이라 죄송합니다. 막 일어난 참에 어지럽거든요.
화이트: 힘들겠구먼. 그 고통을 가볍게 해주마.
에……. 지금 뭘 한 거야? 너, 마법사였나?
화이트: 아아. 몸 상태는 어떤가?
미틸: 이것도 괜찮다면……. 진통제예요. 마법의 효과가 떨어지면 드세요. 달콤한 맛으로 만들어져서 마시기 편해요.
고마워……. 조금 편해졌어. 그런데 미안해. 쇼핑하러 나갔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침대에 있었다는 느낌이야. 솔직히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화이트: 흠. 보이지 않은 적인지, 사각지대를 찌른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오즈: ……상처를 보여봐라.
괜찮지만, 별로 기분 좋은 건 아니야.
아서 / 미틸: ……!
화이트: 이건…….
오즈: …….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엇갈린 주민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과거에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에 왔다.
파우스트: 이 근처에도 바르시의 기색이 역력하군.
그러면 역시…….
샤일록: 일련의 사건에 바르시가 관련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겠지요.
시노: 봉인이 아직 살아 있다면, 다른 바르시가 거리 밖에서 왔을 가능성은?
무르: 바르시는 총명한 마법 생물이야. 자신보다 강한 것이나 봉인의 기미가 있는 장소에는 접근하지 않지.
파우스트: 그렇게 되면, 역시 버나드 가의…….
시노: ……냄새가 나.
에?
시노: 피 냄새다! 저쪽이야.
날카롭게 외치던 시노가 해질녘 거리로 달려나간다. 어느새 해는 저물었꼬, 하늘은 석양으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윽……!
도착한 곳은 인기척 없는 골목이었다. 새빨간 하늘 아래 시레끼는 듯한 피 냄새가 가득하다. 털을 곤두세우는 사쿠 쨩과 마법사들의 등에 감싸지며 나는 두려움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건물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핥짝핥짝 거리면서 무언가를 핥는 듯한 생생한 소리가 메아리친다. 소리를 낸 곳은 골목 안 쪽. 붉은 하늘 아래, 어둑어둑한 어둠 속에 거무스름한 사람의 그림자.
시노: 어이. 거기서 뭐하고 있어……?
시노가 말을 걸자 사람의 그림자가 고개를 든다. 쓰고 있던 후드가 사르르 떨어졌다. 칙칙한 붉은 머리와 짙은 회색 눈동자가 허망하게 흔들린다.
……!
그것은, 입가를 새빨갛게 물들인 리카르도 씨의 모습이었다. 큰 소리를 내려고 했을 때, 시노가 내 옆을 달려간다.
파우스트: 시노. 그만둬!
시노: 리카르도! 정신 차려. 그 녀석을 놔!
시노가 어깨를 흔들자 리카르도 씨가 숨을 멈추고 눈을 깜빡였다. 바르르 입술을 떨며 자신의 손을 본다.
리카르도: 윽……!? 콜록, 콜록……!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그는 들고 있는 젊은 팔을 내던졌다. 샤일록과 무르가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가 피 젖은 목 언저리에 손수건을 갖다 댄다.
샤일록: 아가씨,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불쌍하게도. 의식이 없군요.
무르: 맥은 아직 괜찮아. 치료하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야.
샤일록: 목에 난 상처는 이빨 자국인가요……. 씹은 다음에 찢어진 모습이에요.
리카르도: 나……. 또…….
파우스트: 리카르도. 입 안을 보여줘.
파우스트는 당황하는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더니 주저 없이 그 턱을 잡았다. 핏방울이 떨어지는 입술에 손가락을 끼우고 안을 들여다보며 살짝 눈썹을 치켜올린다.
리, 리카르도 씨는 괜찮은가요? 어디 다쳤다든가…….
조심조심 말을 건네는 가운데, 붉게 물든 치열에 빛나고 뾰족한 것이 보였다.
시노: 송곳니……?
파우스트: 바르시의 간섭을 받은 자에게는 특징이 있어. 사람의 피를 먹기 쉽도록 짐승 같은 송곳니가 자라지. 아직 다 자라지는 않았지만, 이 상태라면 시간문제다. 리카르도, 이대로는 몸을 빼앗길 거야. 너희 집안이 대대로 봉해온 바르시에게.
리카르도: ……!
소년의 눈동자에 절망의 빛이 오른다. 파우스트는 돌아보며 외쳤다.
파우스트: 오즈. 오즈, 있나!
한 박자 후 골목 너머로 오즈의 모습이 나타난다. 조금 전 헤어진 마법사들과 같이.
오즈: ……역시.
미틸: 으윽, 이 냄새……!
화이트: 이미 마의 손에 걸려있었나…….
7화
아서: 리카르도!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났을 줄은.
아서와 미틸은 경악에 질린 채 시노와 리카르도 씨에게 달려갔다.
아서: 그 아가씨는 괜찮은가!? 심한 출혈이야…….
미틸: 저, 저, 응급 처치를 할게요! 상처를 보여주세요……!
어린 마법사들이 열심히 목소리를 내는 가운데 화이트는 리카르도 씨의 앞으로 나아갔다. 역광 속에서 보름달 같은 금빛 눈동자가 얕게 숨을 쉬는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다.
화이트: 흔들리고 있는 사람의 아이여. 오늘 아침도 먹었다는데, 건조함을 억제하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온 건가. 지금이야말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때일세. 마음이 급할수록 깊이 빠져들고 말 거다.
리카르도: 아……. 아아아…….
샤일록: 괜찮습니다, 리카르도. 호흡을 깊게 하세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리카르도 씨의 몸을 반듯하게 눕히면서 샤일록이 주문을 외운다.
샤일록: '인비벨'
마법의 빛이 리카르도 씨를 덮고, 잔뜩 동요하던 그의 표정이 살짝 풀리면서 호흡도 문득 깊어졌다.
무르: 이쪽은 나에게 맡겨. '에아뉴 랑블!'
무르가 주문을 외우자 다섯 명, 열 명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에? 환상? 게다가 이 사람은…….
아서: 이 아가씨와 같은 얼굴이야…….
무르: 자, 환상의 아가씨들. 거리의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고와! 덤으로 의사와 자경단을 데리고 와 줘!
환상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제히 달리기 시작한다.
샤일록: 이건……. 필요 이상으로 거리가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요?
무르: 그럴지도! 하지만 빠른 것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지.
파우스트: 하지만 살았어. 이제 남의 눈에 띄기 전에 장소를 옮길 수 있으니. 무르, 샤일록, 미틸. 핏자국의 처치와 아가씨를 부탁해.
무르: 오케이!
미틸: 맡겨주세요!
샤일록: 무사히 그녀를 인도하면 합류하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리카르도 씨, 만약을 위해 후드를 쓰고…….
파우스트: 오즈, 부탁한다.
오즈: '복스노크'
눈을 감고 다시 떴을 때, 우리는 낯익은 방에 있었다. 뿌옇게 먼지를 뒤집어쓴 버나드 가문의 저택 거실이다.
시노: 리카르도……. 리카르도. 숨 좀 제대로 쉬어.
리카르도: 나…… 나……. 내가…….
파우스트: 이렇게 된 건 처음이 아니군. 몇 번째지?
리카르도: ……모르겠어. 물었을때 정신차린 적도 있고, 피를 흘리고 있는 중이나, 나중에 알아차리는 경우도 있고…….
말을 뚝뚝 끊으면서 리카르도 씨는 자신의 손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아직도 생생한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화이트: ……시노가 느끼고 있었다는 피 냄새, 잘못 맡은 건 아니었던 것 같군. 충고를 한 당사자가 관련되어 있었으니.
그러면, 지나가던 괴한의 정체는…….
오즈: ……시노, 아서. 소년의 소매를 걷어봐라.
시노: 소매? 이렇게?
리카르도: 시, 싫어…….
아서: 미안해, 리카르도. 만질게.
거침없이 고개를 흔드는 리카르도의 손을 잡고 시노와 아서가 닳은 소매를 걷어올린다.
파우스트: 이건…….
파우스트가 작게 숨을 삼키며 나도 모르게 할 말을 잃었다. 그의 가느다란 팔에는 억지로 찍어낸 듯한 생생한 상처가 여러 개 남아있었다. 시노와 아서도 눈을 부릅뜬 가운데, 화이트와 오즈는 얼굴색을 바꾸지 않았다. 작게 숨을 몰아쉬고 화이트가 물었다.
화이트: 그대, 봉인된 장소에 가본 적이 있군.
현자 / 시노 / 아서: 에…….
화이트: 거기서 피를 몇 번이나 바친 거지? 그 상처, 더 이상 당주의 의무 같은 범주가 아닐세.
화이트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시노와 아서의 손을 느슨하게 내린 리카르도 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리카르도: 나도 기억이 잘 안나. 하지만, '거대한 재앙' 의 밤……. 이번 건의 피해가 컸었잖아. 그 장소가 무사할지 어떨지 걱정돼서……. 그리고 새벽 내내 이명이 너무 심하고 이상하게 달콤한 향이 나서, 몽롱하게 문을 열었어. 그때 이후로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정신을 차리면 거리에 나가서 사람의 피를…….
파우스트: ……그렇군. 무르와 오즈의 예상이 맞았어. 액재의 힘이 봉인에 틈을 만든 거겠지. 피를 바치고 있던 너의 기척을 찾아, 끌어당기고…….
화이트: 아아. 그때 피를 빼앗겼을 걸세. 그리고 그대도 남의 피를 찾게 되었다.
아서: 그러나 어째서 리카르도가 이렇게 상처투성이로…….
떨리는 등을 문지르며 아서가 말을 걸었다. 그 옆에서 시노도 눈썹을 치켜세우고 걷어올린 팔뚝에 달려있는 상처에 눈을 떨어뜨렸다.
리카르도: ……봉인이 풀려가고 있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어. 내가 그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도. 공물이…… 내가 바칠 피가 부족한 거라고 생각했어. 사람을 덮칠 때마다 팔을 찢고 제단에 피를 바친 거야. 바르시의 갈증을 억제하기 위해. 하늘에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영창도 외쳤어. 조상이 주상한 것과 같은 말을…….
리카르도: 이 상처는 나의 의무지자 벌이야. 그렇지만…… 억제할 수 없어서…….
봇물 터지듯 그렇게 말하던 그가 붉은 머리를 바닥에 비벼댄다. 뉘우치듯 주먹이 바닥을 두드리고, 비통한 목소리가 높은 천장에 메아리쳤다.
리카르도: 몇 번이나 거리 밖으로 나가는 것도 생각해봤어……. 하지만 그러면 누가 바르시에게 피를 줘? 만약 봉인이 풀려서 나오기라도 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니 떠날 수가 없었어. 내가 먹이가 되어 거리를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됐어. 그게 당주인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런 나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리카르도 씨…….
리카르도: 이젠 싫어……. 더 이상, 이상해지고 싶지 않아……!
방금 전 그가 여기서 말했던 것들을 회상한다. 상냥하고 기특한 부모님과 자랑스러운 조상의 공적……. 그는 그것들을 혼자 저택에 남아 등불과 함께 책을 넘기는, 그저 한결같은 소년이었을 텐데.
오즈: '복스노크'
낮은 목소리로 오즈가 주문을 외웠다. 바닥을 두드리는 리카르도 씨의 손이 멈췄다.
오즈: 인간은 여리다. 뼈를 부러뜨리면 네가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할 일도 할 수 없게 되지. 그게 아니라면, 그것이 너의 소원인가.
리카르도: ……아…….
꾸중을 들은 리카르도 씨는 어깨를 떨었다. 오즈가 말린 주먹을 아서가 감쌌다.
아서: 리카르도. 너는 혼자서 힘을 다해왔어. 우리는 너를 탓하거나 하지 않아. 너도 자신을 비난하지 말아줘. 그렇지 않으면 너의 마음까지 상처받고, 피투성이가 되어버릴 거야.
리카르도: ……그만둬 주세요, 아서 님. ……저는, 당신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야.
화이트: 그렇다면 그 역할, 놓는 것이 좋네.
리카르도: 에……?
화이트: 사람이 아닌 것의 영향을 받아, 본래라면 그대는 이미 제정신을 잃었을 터. 그러나 멈춰 섰다. 그대는 잘해왔네.
그렇게 말하는 화이트가 리카르도 씨의 팔을 풀었다. 어린 용모와는 다르게, 노련한 표정으로 리카르도 씨에게 말한다.
화이트: 봉인을 유지하는 것은 원래 인간의 아이에게는 불가능하다. 그 역할마저도 우리가 모두 없애버려주겠네. 어떤가, 오즈.
오즈: 쉬운 일이다. 훈장에 봉인 되어있는 바르시를 소멸시키면 돼.
리카르도: 그 훈장을 소멸……. 대대로 이어온 일족의 긍지를……?
화이트: 어떻게 할 것인가, 버나드 가문의 당주여.
리카르도 씨는 화이트를 바라보고 오즈를 바라본다. 그 눈에, 매달리는 듯한 색이 몇 번이나 떠올랐다가는 희미해졌다. 피로와 억울함에 짓눌린 듯 벌겋게 젖은 입술이 떨린다. 거기에 정적에 빠지는 밤이슬 같은 소리가 났다.
시노: 정말로 그거면 되는 건가.
리카르도: ……시노…….
시노: 일족의 긍지를 지키는 것의 너의 몫이잖아?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마. 아무리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너는 도망치지 않았어. 말해줘. 이렇게까지 역할을 지킨 것은 나다. 가로채지 말라고.
그의 얇고 마른 어깨를 잡으며 시노가 묻는다.
시노: 너는, 너의 뜻으로 여기에 남은 거잖아. 아버지의 뜻을 이어 이 집의 명예를 버리지 않기 위해서. 영웅의 이름에 걸맞은 자신이 되기 위해서.
아서: ……할 수 있어, 리카르도. 너는 버나드 가문의 후예다. 그 이름을, 너는 사랑하고 있겠지.
리카르도: 맞아……. 나에게는 사랑했던 이름과 긍지가 있어. ……하지만…….
가냘픈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리카르도 씨의 몸이 흔들린다. 그는 그대로 다시 바닥에 엎드렸다.
파우스트: ……위험하군. 리카르도, 정신 차려!
파우스트가 그의 어깨를 잡고 강하게 흔들었다. 하지만 깊이 고개를 숙인 리카르도 씨에게서 흘러나온 것은 웃음소리였다.
리카르도: 후…… 후후…….
마음이 얽히게 되는 허탈한 미소. 질질 끌며 바닥을 기는 손이 방황하다가 어깨를 감싸 안는 시노에게 매달리듯 기우뚱거린다.
리카르도: 저기…… 시노가 날 구해줘. 네가 영웅이 되면 좋겠어.
그 목소리는 몹시 감미로웠다. 얇게 벌어진 그의 입술 틈으로 희고 뾰족한 그것이 아른거린다.
아서: 윽, 또……!
화이트: 안 돼. 바르시 녀석, 모습을 드러냈군!
따가운 공기 속에서 시노가 리카르도 씨의 턱을 잡았다.
시노: 그런 거, 나에게는 필요 없어. 너의 명예는 너의 것이다. 네가 해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리카르도: 거짓말. 갖고 싶잖아. 명예도, 이름도.
시노: 필요 없어. 나는 이 손으로 영웅이 된다. 이 손으로 쟁취한 명예를, 주군에게 바치는 거야.
꿰뚫는 듯한 눈빛이 허망한 회색 눈동자를 꿰뚫었다. 그대로 손을 뻗어 시노는 리카르도 씨의 팔을 잡았다.
시노: 리카르도 버나드. 조상이 봉인한 괴물 따위에 굴복하지 마.
그 순간, 리카르도 씨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한 뼘도 안 되는 빛. 그것을 놓치지 않도록 시노가 그를 쳐다보았다.
시노: 힘을 보태줄게. 바르시를 쓰러뜨리자고. 진의의 훈장은 어디에 있지?
회색 눈동자에 깃든 것은 아직도 바람에 날리는 촛불의 불꽃처럼 위태로운 빛이다. 그래도, 어두운 밤을 밝히는 확실한 버팀목이 된다.
리카르도: ……알았어. 안내할게.
8화
리카르도: 어두우니까 발 밑을 조심해.
미틸과 합류한 우리는 리카르도 씨를 뒤따르면서 비밀의 통로를 걷고 있었다.
아서: 지하에 이런 넓은 공간이 있었다니……. 밖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리카르도: 이곳은 대대로 당주에게만 전해지는 곳입니다. 저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배웠어요.
리카르도: ……도착했다. 이곳에 훈장이 잠들어 있어.
그곳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예스럽고도 엄숙한 넓은 방이었다. 광활한 바닥에는 신기한 모양의 마법진 같은 것이 유난히 크게 그려져 있고, 가장 안쪽에는 훌륭한 재단이 있다.
무르: '거대한 재앙' 의 느낌이다! 봐, 저기!
저건, 삽화에 나왔던 것과 똑같아…….
시노: 진의의 훈장……. 진짜다.
미틸: 그런데 가운데의 보석이 검고 탁하네요…….
화이트: 봉인의 기술에 구멍이 나있는 표식이니. 완전히 깨지지는 않았지만 시간도 별로 없어 보이는군.
샤일록: 더 늦기 전에 이곳에 도착해서 다행이군요. 무르가 그를 끈질기게 쫓아다닌 것도 운이 좋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무르: 우연히 지갑에 있는 돈이 많아진 것도!
파우스트: ……리카르도. 한 번 더 확인하지.
훈장을 바라보던 파우스트가 리카르도 씨를 향해 돌아섰다. 시노와 나란히 선 그에게 조용한 목소리가 들린다.
파우스트: 너의 의기는 조상 못지않다. 바르시에게 맞설 각오는 되어 있나? 예전 선조들처럼.
리카르도: ……저 훈장은, 이 집과 거리의 자랑이야. 이렇게까지 지켜온 것을 내 대에 잃어버릴 수는 없어. 그릇을 깨지 않고 퇴치하려면 한 번 놈을 소환해서 풀어야해. 소환에는 봉인한 당사자나, 그에 가까운 피가 필요하지. 내가 할게.
시노: 잘 말했어.
아서: 아아. 역사 있는 명가의 당주라는 희망이야. 오즈 님, 화이트 님……. 저는 그의 긍지를 지키고 싶습니다. 위험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맞서고 싶어요. 어떨까요?
미틸: 저도…… 같이 싸우고 싶어요.
저도 부탁드릴게요. 훈장을 부수지 않고 퇴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오즈: 도와주지 말라는 뜻인가?
화이트: 호호호…….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그대들,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좀처럼 듣지 않으니. 모르는 사이에 엉뚱한 짓을 당해서는 안 될 텐데. 눈이 닿는 범위라면 봐주도록 하겠네. 할 수 있는 만큼 해내는 것이 좋다.
오즈: 하지만…….
화이트: 힘을 주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젊은이들은 감히 주위의 험한 길을 택하고 싶어하는 법이지.
오즈: ……판단한 내가 하겠다. 알겠나, 아서.
아서: 네!
파우스트: 그렇다고는 해도 다행히 여러가지 갖추어져 있으니까, 의식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겠지만…….
오즈: 공물인가.
화이트: 바르시는 고위 마법 생물일세. 응당한 것이 필요하겠지.
리카르도: 응……. 산 인간이나, 대형 동물으로…….
미틸: 살아있는 인간을 제물로!?
꽤 대규모 의식이네요……. 공물이 될 사람에게 위협은 없나요?
무르: 우리 하기 나름인가? 미끼가 될지, 제물이 될지. 먹히기 전에 마무리를 지었으면 좋겠는데.
오즈: 그렇다면 적당한 사람을 골라오지.
에에!?
화이트: 잠깐 오즈 쨩. 역시 그건 납치니까.
오즈: 곧 해가 진다. 이 자리의 질서가 무너지게 되면 나는 마법을 쓸 수 없어.
시노: 뭐, 적당히 하면 되지. 이 근처의 녀석에게 말을 걸어서…….
……저기!
일제히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린다. 떨릴 것 같은 손을 누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제가 하는 건 어떨까요?
시노: 하?
오즈: 네가……?
리카르도: 그, 그런.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건…….
아무것도 모르는 다른 사람을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하는 것보다는, 제가 하게 해줬으면 해요.
파우스트: 안 돼. ……아니, 확실히 신뢰 관계가 있는 사람이, 대비하기 쉽긴 하겠지만…….
아서: 어떻게 해서든 진짜 인간이 아니면 안되는 걸까? 내가 현자님으로 변해보는 건…….
샤일록: 다른 누군가가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현자님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 지 모릅니다.
미틸: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고, 절대로 안전하다고도 할 수 없는데…….
화이트: 그렇게 되면 마법관의 마법사들에게도 무슨 말을 들지 모르네.
하지만 소환 의식은 모두가 진행해주는 거죠? 그러면 괜찮아요.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누구보다도 믿으니까요. 모두가 옆에 있으면 몸도 마음도 아깝지 않아요. 다른 사람보다도 제가 적임일 거예요.
솔직한 마음을 말로 하자면 마음 속을 바람이 불어가는 것 같았다.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지거나, 신기하다는 반응을 하거나. 그런데 그 눈빛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꽃을 보는 것처럼.
화이트: 꽤 귀여운 말을 들어버렸구나. 이렇게까지 신뢰받아서는 어쩔 수 없군.
시노: 제법 좋은 말을 하게 되었잖아.
샤일록: 밤에 길들여진 눈이 부실 정도의 신뢰군요.
아서: 알겠습니다……. 당신이 향해주신 그 마음에, 반드시 응해 보이겠습니다.
무르: 현자님의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뒤집혔네!
파우스트: …….
파우스트. 제가 해도 될까요?
파우스트: ……미안해. 너에게는 손해보는 역할을 하게 만들어 버렸군. 반드시 우리가 지켜주겠다. 도와줄래?
물론이에요!
화이트: 그러면 사크리피키움, 이쪽으로. 현자를 지키는 역할 중 수호의 기술을 강화하는 걸세, 오즈.
오즈: 아아.
화이트: 모든 재앙, 사악함, 마음의 방황을 현자에게서 멀리하라.
화이트: '노스콤니아'
오즈: '복스노크'
두 사람이 주문을 외우자 사쿠 쨩은 따뜻한 빛에 휩싸였다. 작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반사한다.
화이트: 현자를 부탁하네.
사쿠 쨩이 두둥실 날아와 다시 내 어깨에 앉는다. 그것을 신호로, 파우스트가 지시를 내린다.
파우스트: 그러면 시작하도록 하지, 리카르도.
리카르도: 네……. 현자님, 위험한 역할을 맡아줘서 고마워. 반드시 성공시킬게.
리카르도: 마법진 안에 공물을 넣으면 특수한 술을 준비해서 술잔을 나누는 거야. 술은 이, 피의 숙성주를……. 저택의 창고에서 가져왔어.
리카르도 씨가 술의 마개를 열자 주위에 뭐라 말할 수 없는 냄새가 풍겼다.
장수 마법사들: …….
파우스트: ……일단 술이니까. 어른들 중에 맡도록 하지.
장수 마법사들: …….
파우스트: 너희들……. 어쩔 수 없나. 내가 할게.
저기, 의식용 술은 어떤 맛인가요……? 독 같은 건 아니겠죠?
샤일록: 물론 몸에 영향은 없습니다. 하지만 비유하자면…….
무르: 현자님은 마법사 소환 때 비슷한 것을 마신 적이 있어. 장리의 고블렛에 솟아오른 검은 물 말이야!
아, 그때의……! 그렇다는 건…….
소환 의식의 기억과 동시에 끔찍한 맛의 기억도 되살아난다. 피 냄새가 나고 꽃 꾸로가 날생선, 그리고 허브와 치즈를 최악의 방법으로 혼합한 맛. 반사적으로 떨어버린 나를 향해 샤일록은 달콤하게 웃었다.
샤일록: 파우스트에게는 모든 것이 끝난 후 혀가 녹을 듯한 미주를 대접하도록 하죠. 오늘 밤은 특별 서비스입니다.
파우스트: 부탁하지. 네가 하는 술을 생각하면서 단번에 마실 거니까.
리카르도에게 술과 술잔을 받자 파우스트는 아서를 향해 돌아섰다. 안경 속의 맑은 보랏빛 눈으로 똑바로 응시한다.
파우스트: 아서, 너는 현자의 곁으로. 너는 중앙의 나라에서 태어난 왕자로, 초대 국왕인 영웅의 후예다. 급시에 정령들을 거느리기에는 네가 적임자겠지.
아서: 영광이다. 맡지.
파우스트: 그리고, 바르시가 나타난다면 시노가 공격을 해 줘.
시노: 내가? 오즈가 아니어도 되는 건가.
무르: 나도 시노가 적임이라고 생각해!
석벽에 늘어선 책장을 보며 무르가 말한다. 그가 마주보는 벽의 한 면에는 오래된 철제 무기들이 늘어서 있었다.
무르: 남아있는 서적을 보면 바르시를 가장 먼저 공격한 것은 철의 무기야. 아직 해명되지 않은 것도 많은 종족이지만, 아마 약점 중 하나로 철이 있어. 즉, 시노의 쇠의 낫과 마법으로 찢으면 잘 승화될 거야!
시노: 좋네. 그렇다면 내가 낫의 맛을 마음껏 맛보게 해주지.
파우스트: 그러면…… 의식을 시작하지.
마법진에 들어가는 사람은 리카르도 씨와 아서, 파우스트, 시노, 그리고 나. 다른 마법사들은 의식을 보좌하기 위해 마법신을 둘러싸듯 사방에서 자리를 잡는다. 미틸의 곁에는 화이트가 바짝 다가갔다.
엄숙하게 소환 의식이 시작된다.
9화
파우스트: 바치지. 바르시에게 제물과 피의 숙성주를.
파우스트가 드높게 선언하고 제단 위에 마련된 두 잔에 피의 숙성주를 따랐다. 파우스트가 술잔 하나를 집어 다른 하나에 가볍게 닿은 뒤 목을 확 젖혔다.
그의 목이 움찔움찔 떨었다. 입에서 붉은 액체가 피부를 흘러타고 내려온다. 마치 파우스트가 피를 흘린 것 같았다.
다음 순간,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늠름한 표정의 리카르도 씨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제단에 걸린 진의의 훈장을 마주하고 품에서 칼을 꺼내 익숙한 몸짓으로 팔을 베었다. 리카르도 씨의 피가 제단에 떨어졌다. 그가 이어서 말을 했다.
리카르도: 그대, 피와 악몽의 주인이여. 쇠고랑 속에서 어는 허무의 송곳니여.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그 힘을 보여라. 나, 이 피로 선서한다. 너를 이곳에서 풀어주겠다!
높이 솟구치는 리카르도 씨의 등을 보며 마법사들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인간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정령이 좋아하는 말을 하다 보면 드물게 모여드는 경우가 있다고. 인간인 그에게 있어서는 주술 정도의 것. 그래도조상들이 남긴 말은, 그에게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시노: '맛차 스디파스'
아서: '파르녹턴 닉스지오'
파우스트: '사티르크나도 무르크리도'
화이트: '노스콤니아'
미틸: '오르토니크 세토마오졔'
오즈: '복스노크'
샤일록: '인비벨'
무르: '에아뉴 랑블'
리카르도 씨가 외친 말에 이어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운다. 순간, 방이 정적에 휩싸였다. 그러나 진의의 훈장 중심에 우뚝 솟은 보석의 거무스름함이 흔들린 것 같았다.
리카르도: ……!
그곳에서 마치 유령처럼 검은 안개가 질질 기어간다.
파우스트: 모습을 드러냈군……. 성악한 괴물 녀석.
오즈: '복스노크'
지체없이 오즈가 주문을 외우가, 실내 가득히 빛이 퍼진다.
오즈: 이 방에 결계를 쳤다. 바르시가 이 방 밖에 나갈 일은 없어.
무르: 안개가 덩어리가 되었다……! 바르시의 부활이야!
샤일록: 천장으로 도망쳤어요! 위와 아래로 고속으로 벽을 기어서…….
미틸: 뭐, 뭐야 저거. 징그러워……!
화이트: 괜찮네, 미틸. 이곳에서 떨어지지 말게나.
파우스트: 저 녀석……. 마치 벽을 기어다니는 것 같아.
아서: 출구를 찾고 있는 건가?
시노: 유감이군. 너는 이미 결계에 갇혔어.
질질 모양을 바꾸면서 검은 안개는 돌담을 기어다닌다. 그때, 급격히 주변 공기가 무거워졌다.
……!
갑자기 귓속에 울리는 소리에 눈썹을 찡그린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그리고 뱃속이 숨이 막힐 정도로 달콤한 꿀 같은…….
리카르도: ……이 녀석……!
똑같이 이변을 느꼈는지, 머리를 누른 리카르도 씨가 크게 팔을 흔든다. 그의 피가 다시 제단으로 흩어졌다.
리카르도: 내 피라면 바쳐주겠어. 다른 사람에게는 손대지 마……!
사크리피키움: …….
그러자 어깨에 앉은 사쿠 쨩이 내 목에 꼬리를 감았다. 불쾌한 기색이 희미해지고 내 등에 아서의 손이 감긴다.
아서…….
아서: 여기에 있습니다. 현자님이 믿어주신, 저희들이.
아서의 밝은 파란색 눈동자. 마치 맑은 아침 하늘을 올려다보는 기분이 든다. 순간, 배 속까지 자연스럽게 공기가 차오른다.
아서: 당신의 손을 잡고 있어요. 이 손을 결코 놓지 않겠습니다.
네…….!
파우스트: 온다. 조심해!
파우스트가 튕기듯 외친다. 순간, 벽에 꿈틀거리는 안개로부터 가늘고 붉은 실이 튀어나왔다.
(방 안이 실에 싸여져 가고 있어……?)
그것은 순식간에 방을 뒤덮었다. 우리들이 고치 안으로 들어가버린 것처럼.
시노: 리카르도, 현자. 마법진 밖으로 손가락 하나도 꺼내지 마. 저 실은 바르시의 촉수야. 건드리면 피를 뺏겨.
파우스트: '사티르크나도 무르크리도!'
마도구의 거울을 빛내 파우스트가 뻗어온 실을 튕겨냈다. 붉은 위협은 불꽃이 지듯 사라진다.
무르: 이런. 이쪽도 왔네!
샤일록: 무대는 저쪽입니다. 실수하지 않도록.
무르는 뒤로 공중제비를 하며 실을 피하고 샤일록은 춤을 추듯 우아하게 몸을 내젓는다. 그들의 의상 자락에 반짝이는 빛이 깃들었는가 하면, 번뜩임과 함께 그것을 되받아쳤다.
오즈: 서서히 결계를 좁히지. 시노, 공격의 과녁을 좁혀라.
오즈의 말과 동시에 방 전체를 덮고 있던 빛이 우리를 좁히듯 서서히 줄어들었다.
무르: 도망갈 곳을 잃어간다는 거지! 그물로 고기 잡듯이!
화이트: 미틸, 저 안개에 마법을 쓰는 걸세. 명확하게 파악할 필요는 없다. 마법진의 중앙으로 유도하는 거네.
미틸: 알겠습니다. 해볼게요! '오르토니크 세아르시스피르쳬!'
화이트: 나도 놀아주도록 할까. '노스콤니아!'
화이트가 주문을 외우자 튕겨지는 듯한 속도로 마법으로 태어난 빛의 구가 튕겨져 나갔다. 수정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빛의 구가 튕긴다. 붉은 실은 마법진의 중앙으로 튕겨져 나갔다.
아서: '파르녹턴 닉스지오!'
아서의 손바닥에 빛의 방패가 출현한다. 내 눈앞에서 튕겨져 불꽃이 튀었다.
파우스트: 지금이야. 시노!
시노: 맡겨둬!
시노의 날카로운 외침이 지하실에 울려퍼진다. 저항하듯 붉은색 실이 증식했다. 두 손으로 목을 조르려는 듯 시노를 향해 간다.
리카르도: 시노……!
리카르도가 식은 땀을 흘리며 소리치는 가운데, 시노는 빗자루에 걸쳐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붉은 위협과 스쳐 지나가는 사이, 시노의 큰 낫이 그 모습을 포착했다.
(벤 건가……!?)
하지만 안개는 직전에 궤도를 바꿔 칼날을 피했따. 그 순간, 시노의 목덜미에 붉은 빛이 진다. 하얀 목에 희미하게 달린 선 같은 상처.
시노. 부상이……!
시노: 흥. 꽤 하잖아.
낫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시노의 눈빛이 천장 가까이에서 내려다보이는 안개를 쏘아본다. 벽을 기어가는 붉은 실이 시노의 다리를 엮어내듯 다시 날아왔다.
아서: 오른쪽이야!
아서의 목소리에 반응해 시노가 크게 뛰어든다. 그 틈에 파우스트의 마법의 빛이 안개를 잡는다. 시노가 큰 낫을 휘두르고 그것을 두 동강 내어 베었다. 그러나, 확실하게 칼날에 닿았을 그것은 두 쪽으로 갈라져 원래의 형태로 되돌아간다.
미틸: 그럴 리가. 분명히 낫에 닿았는데!
오즈: 액재의 영향으로 힘이 강해졌어. 아마도 한 번에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무르: 저 검은 안개는 바르시의 핵이야! 저걸 멈춰야 돼. 안 그러면 실 공격도 멈추지 않을 거야!
샤일록: 이쪽도 꽤 공격을 걸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좀처럼 약해져서는 안되겠네요.
시노: 그렇군……. 고집이 센 녀석이네. 좋아. 네가 지칠 때까지 몇 번이고 찢어주겠어!
휘두른 칼날에 사방팔방에서 뻗는 실이 얽힌다. 그들은 핵인 안개를 지점으로 삼아 활개를 치듯 시노의 몸을 벽을 향해 던졌다. 하지만 그는 가볍게 착지했다. 거기서부터 무릎을 크게 튕겨, 다시 하늘에서 큰 낫을 고쳐 잡았다. 과감하게 도전하는 시노를 나도 마법사들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안에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리카르도: 으…… 으윽…….
리카르도 씨가 목을 누르고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이마에 떠오른 땀이 뚝뚝 떨어졌다.
리카르도 씨……!
파우스트: 어이. 정신 차려!
달려온 파우스트가 그 등을 바치고 무릎을 꿇는다. 거친 호흡을 반복하는 리카르도 씨의 입가에는 방금 전과 같은 굵은 송곳니가 어른거린다.
아서: 리카르도. 송곳니가……!
파우스트: 리카르도를 통해 피를 찾고 있어……. 이건 몰아붙이고 있다는 증거군.
화이트: 아아, 이제 곧 끝나는 싸움일세. 따라가면 안 되네. 인간의 아이여!
리카르도: ……윽……. 괜찮아.
느릿느릿 고개를 드는 입가에 떠오르는 것은, 참다 못한 질긴 미소다. 그러나 회색 눈동자는 어디까지나 나이에 걸맞게 무구하게 맑았다.
리카르도: 시노가 저렇게 열심히 해주고 있는데, 내가 꺾일 수는 없잖아.
시노: ……흐응.
시야의 가장자리에 리카르도 씨를 사로잡았는지 시노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코웃음을 쳤다.
시노: 바르시, 너의 상대는 나다. 결착을 내자고!
아서: 가세하지!
아서가 소리쳤다. 친구의 어깨를 감싸 안는 듯한 상냥하고 힘을 주는 목소리로.
아서: 중앙의 정령들이여. 힘을 다오! 나의 친구이자 미래의 영웅에게, 최대한의 가호를……!
아서: '파르녹턴 닉스지오!'
주문과 함께 아서와 그 주변에서 청렴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빛은 곧 시노에게도 깃들었다. 몸과 낫이 서서히 빛을 내기 시작한다. 검은 안개는 마법진 중앙 상공에 몰려 빛에 겁을 먹듯 수축했다. 움직임이 봉쇄된 것처럼 와들와들 꿈틀거리는 그것을, 시노가 꿰뚫듯이 바라본다.
시노: 사람의 피를 마시고, 그 녀석의 몸 전부와 운명을 짓밟는 괴물……. 그런 것 따위에 나는 굴복하지 않아. 살아있는 한 기어오르겠어. 너 따위가, 방해하게 두지 않아!
미래를 개척하듯 시노가 낫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고, 안개를 형성하는 형태가 여리고 덧없는 실처럼 무너져 간다. 그리고 와르르 부서지는 모습은 발버둥치는 바르시의 단말마 같았다.
파우스트: 모두들, 주문을! '사티르크나도 무르크리도!'
화이트: '노스콤니아'
미틸: '오르토니크 세아르시스피르쳬!'
샤일록: '인비벨'
무르: '에아뉴 랑블!'
오즈: '복스노크'
시노: '맛차 스디파스!'
아서: '파르녹턴 닉스지오!'
다른 마법사들도 차례로 주문을 외운다. 마법의 빛이 터질 때마다 공기가 가벼워진다. 이윽고, 안개가 섬광을 내뿜으며 큰 소리를 내면서 부서졌다. 눈꺼풀에 빛의 진상이 아른거리고 문득 온몸이 편안해졌다.
……!
조심조심 눈을 떴다. 잘게 부서진 마나석이 비오듯 쏟아진다. 마법진은 빛을 잃었고, 훈장의 중심에 박혀 있던 보석도 금이 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주위는 여전히 어둡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보다는 확실히 공기가 다르다.
끝난…… 건가……?
어느 사이에 바닥에 내려온지 낫을 아래에 둔 시노가 돌아본다. 피부를 약간 피로 더럽힌 채,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시노: 아아.
리카르도: 하아, 하아……. 정말로……?
아서: 리카르도, 해냈네. 장의 질서가 돌아가고 있어.
파우스트: 의식은 성공이다. 바르시는 사라졌어. 시노도, 아서도, 리카르도도 잘 해줬다.
위로하는 듯한 파우스트의 말에 팽팽하던 실타래가 느슨해져 간다. 긴장을 푼 소년들의 품으로 마법진 밖에서 미틸이 달려왔다.
10화
미틸: 해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엄청 멋있었어요!
샤일록: 미틸도 잘 해냈습니다. 훌륭했어요.
무르: 두근두근거렸어! 이 방이 통째로 고치에 삼켜지는 줄 알았어!
오즈: 아서. 부상은…….
아서: 여기저기 살펴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멀쩡해요!
다행이다……! 모두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화이트: 호호호. 우선은 그대 자신의 무사함을 기뻐하면 좋으려만.
저는 괜찮아요. 모두가 지켜줬으니까……!
완전히 평온해진 공기 속에서 모두의 표정도 풀려 간다. 그때,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무언가가 빛났다.
……?
무르: 어라어라?
내가 소리를 내기 전에 그곳으로 달려간 것은 무르였다. 쭈그리고 앉아서 집어올린 그것을 횃불의 빛에 가져다댄다.
화이트: 마나석의 조각이구먼.
시노: 마나석? 바르시의?
아서: 아니야. 이 기척은…….
파우스트: 설마…….
퍼뜩 뭔가 생각난 듯 소리를 지른 파우스트가 제단 아래 떨어진 보석을 줍는다. 그리고 무르가 든 마나석을 건드렸다.
파우스트: ……역시 그런 거였나. 아마도 버나드 가문의 조상은 마법사다.
어린 마법사들: 에!?
리카르도: 조, 조상님이……!? 하지만 그런 건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았는데? 이거 봐! 당시 조상님 본인의 수기인데…….
시노: 준비성 좋구나, 너.
무르: 보석에 남은 기술의 여운과 이 마나석……. 아주 조금이지만 같은 기척이야. 남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 남긴 걸수도 있어. 본인의 의식을 완성하는 것과 맞바꾸어 여기저기 부서졌다면 납득이 가지.
샤일록: 과연……. 확실히 그렇다고 한다면 여러 가지 이해가 가는군요.
오즈: 인간의 손으로는 신기한 이치에 간섭할 수 없다. 지식과 기량, 매개가 있었다고 해도 정령을 거느릴 수 없으면 봉인의 의식을 행할 수 없어.
파우스트: 리카르도. 수기를 보여줘.
리카르도: 아, 응…….
샤일록: 무르. 그 마법을 쓸 수 있나요? 사물의 기억을 보는 마법이요.
무르: 좋아! '에아뉴 랑블!'
무르가 주문을 외우자 책자의 페이지가 훌훌 넘어간다. 희미하게 빛을 내뿜은 그것을 고양이 같은 눈동자가 응시했다.
무르: ……너를 닮은 청년이 있어. 이 책자를 놓고 제단을 향해, 아까 네가 했던 것처럼 피를 흘리고……. 영창을 외워 마법진이 빛났어.
화이트: 호오…….
힘을 잃은 듯 사르르 떨어지는 수기를 화이트가 받았다. 어린 마법사들과 리카르도 씨도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화이트: 이 수기를 보아하니…… 당시의 당주는 자신이 마법사라고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지극히 힘이 약했던 걸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봉인 의식을 행하려 했던 정의로운 마음과 용감한 신념에 중앙의 나라 정령이 힘을 보탰다. 그는 이때 처음으로 마법을 사용한 것이겠지.
아서: 마법사인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봉인의 의식을 행하려고…….
시노: 성공할 가능성도 적은데? 그런 이야기가 가능하나?
샤일록: 드물기는 하지만 없는 이야기는 아니겠죠. 자신이 마법사인 줄 모르는 사이에 약속을 어기고 마력을 잃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한 힘의 유무는 의외의 종이 한 장일지도 모릅니다.
무르: 목숨과 맞바꾸어 봉인이 이뤄졌다면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던 것도 수긍할 수 있을지도 몰라! 뭐니뭐니해도, 엄청난 기개와 각오의 소유자인걸!
화이트: 역시 그대의 조상은 중앙의 땅에 태어난 자로군.
화이트가 고개를 돌린 끝에 리카르도 씨가 눈동자를 깜빡인다. 그런 그에게 무르가 마나석을 건넸다.
무르: 마침 텅 비어버린 진의의 훈장, 가운데가 비어보이지 않아? 가공해서 채워보면 멋져보일지도!
리카르도: 이것이 마나석……. 초대 버나드 가문의 당주의…….
리카르도 씨는 손바닥에 뒹굴고 있는 작은 보석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소중하다는 듯이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모두의 얼굴을 돌아보며 감격에 겨운 듯 고개를 숙였다.
리카르도: 모두들…… 정말로 고마워. 당신들이 힘을 보태주어서 조상의 뜻을 이어 훈장과 거리를 지킬 수 있었어. 정말로,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시노: 고개를 들어. 너도 해낸 거잖아. 이건 영웅 버나드의 승리야.
리카르도: ……!
시노: 칭찬해줄게. 잘했어, 리카르도.
리카르도: ……응……!
고개를 끄덕인 리카르도 씨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자랑스럽고 명랑해 보였다. 안도로 풀린 그 입가에 더 이상 송곳니는 보이지 않는다.
저택을 나서자 주위에는 아직 황혼의 빛이 남아있었다.
꽤 오랜 시간 지하에 틀어박혀 있는 기분이었는데, 아직 해가 지지 않았네요.
아서: 네. 일몰 전에 수습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리카르도: 정말로 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런 만남의 방식이 되어 버린 것은 답답하지만…….
아서: 그것도 무슨 인연이었을 거야.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리카르도. 중앙의 나라에 이렇게 용감한 백성이 있어서 나는 자랑스러워.
리카르도: 그런, 영광이에요……!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리카르도: 저…… 오늘 일을 기록해서 남겨둘 거예요. 다시 영웅담을 쓸 때가 됐어. '그때 당주에게 다가간 것은, 영광스러운 역할을 짊어진 현자의 마법사들이었다' 라고.
미틸: 그건, 저희도 영웅 전설의 일부가 된다는 건가요……!?
시노: 흐흥. 나쁘지 않네.
아서: 마법사와 인간이 손을 잡고 함께 위기를 구한 서적이 증가하겠네!
파우스트: 나는 사양해두지. 미안하지만 이 자리에 없었던 걸로 해 줘.
리카르도: 그래……? 꽤 수줍어하는구나. 그러면 조금 흐릿하게 적어놓을게. 게다가…… 나는 오늘 당신들에게 도움을 받았을 뿐만이 아니야. 자신 있게 너에게는 용감한 선대의 피가 흐르고 있어. 무슨 일이 생겨도 두려워하지 마. 자신을 믿고 맞서라고 적을게.
샤일록: 후후. 당신의 마음도 구할 수 있었다면 저희도 영광입니다. 젊은이의 미래를 여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면, 오래 사는 것도 나쁘지 않군요.
무르: 그래도 괜찮아? 너희 집은 마법사에게 의지하지 않고 공적을 남긴 전설로, 명가가 되었는데. 조상이 마법사였다. 오늘 일에도 마법사가 도와줬다고 역사에 남으면 전설이 스치지 않아?
리카르도: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모처럼 알게 된 일이니, 나는 사실을 전하고 싶어. 그리고 나, 조상님이 더 좋아졌어. 왜냐하면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지식과 기개만으로 맞서려고 했잖아? 엉망진창이지만, 실제로 그것으로 공적을 남긴 거야. 너무 멋있어.
시노: 좋은 얼굴이 됐네, 너.
리카르도: 시노 덕분이야. 그런 걸 보게 된다면 역시 떨린다고.
서로 웃는 소년들을 우리는 미소지으면서 지켜보았다. 이윽고 아서가 한 발 앞으로 나간다.
아서: 리카르도 버나드. 다시 한 번 너와 명웅의 거리의 구세주에게 경의를 표하지. 중앙의 나라의 마법사로서, 지금까지 이 도시의 평화를 지켜준 것에 감사의 인사를 전할게.
아서: 나는 오늘처럼 인간과 마법사가 손을 맞잡는 미래를 믿어. 혹시라도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소식을 보내줘.
리카르도: 감사합니다……! 이 얼마나 영광인지. 몇 권의 책에 엮어도 부족해! 하지만…… 한동안은 힘을 빌리지 않고 끝낼 것 같아요. 바르시의 마나석과 함께 좋은 것을 발견했으니까요.
무르: 좋은 거라니 뭐야?
시노: 금은보화인가?
아하하. 설마 그럴 리…….
리카르도: 후후. 사실은 맞아. 있었어!
어린 마법사들: 에에……!?
리카르도: 있었단 말이야. 보물이! 오래된 물건이라서 조상님이 만일의 경우를 위해 남겨준 것일지도…….
샤일록: 확실히……. 그 장소에는 적어도 수백년은 누군가가 들어간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그 방을 연다는 것은 즉, 일족의 위기였겠죠.
화이트: 후손을 생각해 보물을 남겨둔 걸지도 모르네. 총명한 일족이군.
리카르도: 응. 그래서 집을 구하고,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려고. 이제부터 똑바로 살 거야. 어머니도 가슴 펴고 마중 나가고 싶고.
화이트: 호호호. 이 젊은 나이에 그 마음씨라니, 역시 중앙 나라 태생인가.
샤일록: 부디 이대로 쑥쑥 자랐으면 하는군요.
리카르도: 에헤헤……. 고마워. 너희들이 그렇게 말해주니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아.
수줍은 모습으로 웃는 리카르도를, 마법사들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윽고 파우스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우스트: 곧 해가 지겠어. 우리는 이제 돌아가자.
아쉽지만 그렇네요.
리카르도: 아아, 조심해. 마음 내키면 또 놀러와!
시노: 아아. 레몬파이 사러 올게.
리카르도: 아하하! 뭐, 내킨 김에 오는 것도 좋아. 언젠가 어머니가 건강해지면, 애플파이를 대접할게!
시노: 기대하고 있을게. 잘 가!
리카르도 씨에게 작별을 고하고 우리는 저택을 떠났다. 이윽고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무렵, 파우스트가 시노에게 말을 걸었다.
파우스트: 시노. 목덜미를 보여줘.
시노: 목? 아까 미틸이랑 네가 치료해 줬잖아.
파우스트: 됐으니까.
시노: 쿠엑. 잡아당기지 마.
파우스트: ……역시. 생각보다 상처가 깊어. 잠시 자국이 남을 수도 있는데, 정말로 마법으로 치료하지 않아도 되나?
시노: 됐어. 이 상처는 오늘의 나의 훈장이니까. 파우스트, 오늘의 나도 잘했지.
파우스트: 그렇네…….
파우스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시노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눈이 부신 듯한 표정이었다. 석양이 두 사람에게 새빨간 윤곽을 드러낸다.
파우스트: 의식에서의 활약은 물론, 리카르도의 마음을 잘 지탱해 주었어. 네가 한 말이었기에 그를 진정시킬 수 있었을 거야. 고맙다.
시노: 그렇군. 다른 거는?
아서: 바르시를 해치운 역할도 시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어. 몸놀림도, 과감히 맞서는 모습도 역전의 용서 같았어! 나도 질 수 없네.
시노: 흐흥, 뭐 그렇지.
파우스트와 아서, 시노가 나란히 간다. 건국의 영웅과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영웅의 후예. 그리고 분명 멀지 않은 미래에 영웅이 될 존재.
(……아아, 눈부신 등이네…….)
시노: ……아!
미틸: 왜 그러나요, 시노 씨?
시노: 레몬 파이를 잊고 있었어. 넉넉하게 샀는데 저택에서 다 먹었잖아. 마법관에 가져갈 만큼 아직 못 샀어.
아서: 그러고 보니……!
한 입 사이즈라 먹기 쉬웠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화이트: 듣고 보니 스노우의 츄러스도 아직 못 샀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미틸: 지, 지금이라도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요?
샤일록: 가게 자체는 해질녘까지 하고 있을 겁니다. 상품이 다 팔리지 않았다면 말이죠.
무르: 일단 가보자! 하루에 두 번 다과회를 할 수 있을지도!
미틸: 서두르죠!
시노: 뛰어!
파우스트: 사건이 일단락된 줄 알았는데, 정신 사납군.
무르: 파우스트랑 오즈도 같이 뛰자! 준비, 시작!
오즈: 왜 나까지…….
아서: 아하하, 저희도 가죠. 카인과 리케의 몫을 확보해야지!
무르와 아서에게 등을 떠밀려 우리도 시노의 뒤를 따랐다. 연보라빛으로 물드는 거리에서는 달콤한 제과점 냄새와 함께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영웅의 가슴에 빛나는 훈장 같았다.
나도, 그도, 취한 이 경치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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