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비극도, 희극도 함께
……인조 마법사……?
무르: 네.
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머리 위에서 푸른 밤에 별이 흘러간다. 질문을 하려던 순간, 그가 시선을 던졌다. 뭔가를 발견하고 입꼬리가 벌어진다. 자세히 보니 하얀 안개 같은 것이 식물원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무르: 아무래도 당신의 마법사가 미궁의 출구를 발견한 것 같군요.
아……. 샤일록들이?
무르: 네. 어떤 등장을 할지 기대되는걸.
무르는 내 옆에 나란히 서서 서커스를 즐기는 관객 같은 대사를 했다. 서쪽 마법사의 등장은 이랬다. 속이 뻥 뚫리는 듯한 청량한 냄새를 풍기며 하얀 안개로 나무 사이를 감돈다. 하얀 안개가 낀 공기는 반짝반짝 작은 빛을 내며 선명하게 칠해져 가는 듯했다. 느닷없이 정면에 있는 큰 나무줄기에서 삐죽삐죽 긴 다리가 돋아났다. 그 다음에 파이프를 든 손이나 새장이 든 손이. 마지막으로 바느질통을 안은 팔.
풍경을 담은 무르의 벽에서 벗어나듯 서쪽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시원한 눈매를 치켜올리며 샤일록이 묻는다.
샤일록: 현자님. 무사하신가요.
네. 걱정 없어요.
클로에: 다행이다! 같이 걷다가 갑자기 현자님이 나무로 변해서 말라버렸다고!
라스티카: 환혹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 후였습니다.
무르: 내가 눈치챘어! 훌륭해?
천진난만하게 웃는 무르를 바라보며 영혼의 조각인 무르는 농담조로 내게 귓속말을 했다.
무르: 그는 유능합니다. 역시 내 본체다워.
나도 모르게 나는 표정을 굳혔다. 샤일록이 영혼의 조각인 무르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란 눈망울로 처참히 여겨지는 것이 영혼의 무르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무르: 여어.
샤일록: …….
무르: 기술에서 연기는 속임수야. 그런데 나의 속임수를, 너의 파이프의 연기가 풀어버렸어. 훌륭해.
샤일록: 마음에도 없는 칭찬은 그만두세요.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현자님을 빼앗기다니. 비웃음을 당하는게 낫겠어요. 빈정거림보다 더 신랄한 찬사를 쏟는 지독한 사람.
샤일록은 억울한 듯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기에 나를 걱정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영혼의 조각인 무르는 눈을 깜빡이고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웃는다. 그는 매우 즐거워 보였다.
무르: 가끔 네가 연하인 것을 떠올리게 돼. 당연히 기분이 좋아지지.
샤일록: 입 다무세요. 무르, 보라색 조각을 찾죠. 그건 당신의 것이니까요.
무르: 나의 것?
무르: 나의 것?
샤일록: 당신은 영혼의 조각 중 하나. 당신을 저의 무르에게 먹이겠습니다. 무르를 되찾기 위해…….
무르: 무르라니 어느 쪽? 나, 먹히는 거야?
무르: 내가 너의 것일지도 몰라. 아니면 다람쥐의…….
샤일록: 동시에 말하지 마세요.
무르: 먼저 하세요.
무르: 먼저 하세요!
무르: 고마워. 그러면……. 한 가지 제안이 있어. 현자님도 들어주시겠나요?
네, 네.
무르: 친애하는 서쪽의 마법사들. 당신들도.
라스티카: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무르 하트 공. 저는 라스티카 페르치라고 합니다.
클로에: 나는 클로에 콜린즈. 무르와는 이제 친구야! 그래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네…….
당황하는 클로에에게 영혼의 조각의 무르는 익살스럽게 한쪽 눈을 감았다.
무르: 금방 익숙해질 거야. 잘 부탁해. 라스티카, 클로에.
라스티카와 클로에는 미소지었다. 오늘 만난 영혼의 조각의 무르를 둘 다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샤일록만이 아직 경계를 풀지 못한 채 마도구인 파이프를 겨누고 있다. 내가 영혼의조각인 무르에 완전히 안심하고 있는 탓일지도 모르지만, 여유없이 팽팽하고 짜릿한 샤일록은 어딘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샤일록: 제안이라는 건 뭐죠?
무르: 너는 영혼의 조각을 모아 무르를 되찾으려 하고 있어. 나를 거기에 있는 무르에게 주어 하나로 만들 생각이지.
샤일록: 네.
무르: 하나가 돼!
무르: 나는 자유를 빼앗긴 불쌍한 영혼의 조각……. 너의 계획을 거부할 방법은 없어. 하지만 잠깐의 시간을 주지 않겠니? 그곳에 있는 무르와 하나가 되기 전에 세계를 보여줬으면 해.
세계를?
무르: 네, 현자님. 지금의 세계는 어떻게 식물이 분포하고 있는지 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무르와 동화해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저의 감상이 아닐지도 모르죠. 그때의 저는 식물에 눈을 돌리지 않을지도 모르고요. 무르는 흥미대상이 많으니까요. 정신없이 시선을 움직이며 휴식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으니.
무르: 부디, 현자님. 당신의 여행 동행을 허락해 주시지 않겠나요?
영혼의 조각인 무르는 연기가 돋보일 정도로 크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입을 열기보다 클로에가 빠르게 눈을 동그랗게 뜬다.
클로에: 우리와 함께 해준다는 거야?
무르: 네.
라스티카: 훌륭해! 무르는 세기의 천재입니다. 그 본체와 영혼의 조각이 동행자로. 아주 믿음직스러운 일이에요, 현자님.
라스티카의 말이 맞다. 기억이나 지식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지만 무르는 대천재. 영혼의 조각을 무르에게 먹이지 않고 함께 동행하면 의지할 수 있는 지식인이 둘이 된다.
그렇네요. 저는 찬성이에요. 샤일록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샤일록: 저는 반대입니다.
무르: 이런.
무르는 미소지었다. 샤일록은 완강한 반발을 그에게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려움이나 경계, 배려. 다양한 감정을 흔들며 조심스럽게 위험한 친구를 살피고 있다.
샤일록: 당신은 현자님에게 있어서 총명한 조언자, 최선의 인도자가 될지도 모르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파멸의 안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샤일록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샤일록: 현자님. 북쪽의 쌍둥이……. 스노우 님과 화이트 님에게 일어난 비극은 알고 계시겠죠. 천지가 갈라져도 헤어지는 일이 없을 것 같던 영원한 세월을 살던 그들. 그들이 서로 죽이게 된 것은 무르의 사소한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나도 알고 있었다. 항상 함게였던 스노우와 화이트. 그런 그들을 본 무르가 스노우에게 물었다고 한다. 고독을 알고 싶지는 않은가? 스노우는 고독을 추구했고, 화이트는 그가 떠나는 것을 거부해 이윽고 서로를 죽였다. 그리고 스노우 혼자만 살아남아 화이트는 유령이 됐다. 나는 불안함을 느껴 무르를 힐끗 쳐다보았다. 무르는 변함없이 미소지었다. 그 태도는 도도해 보이기까지 했다.
샤일록: 오해가 없도록 말씀드리지만, 무르는 결코 타인의 파멸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흥미를 향해 안을 들여다보고, 순수한 지적 호기심으로부터 파헤쳐 분석하려고 하죠. 선의도 악의도 없습니다. 그런 성격입니다. 화이트 님을 죽게 하고, 이 세계의 본연의 자세를 일변시킨 천진난만하고 무책임한 탐구심. 흉기 같은 그것이 현자님에게 향했을 때, 비극이 일어날지 희극이 일어날지…….
무르: 둘 다 일어날 거야. 친구가 되는 거니까.
……친구…….
무르: 네. 호기와 흥미를 향해 대화를 거듭한다면, 그것은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나는 처음 만난 무르가 생각났다.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 살며시 마음속이 흔들린다. 여러 광경을 떠올리며 많은 감정이 밀려왔다. 낯선 물건뿐인 신기한 세계. 이 세계에서 살아가며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되고 싶다.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의 마음에 성실하게 응하고 싶다.
나는 무르에게 파헤쳐질지도 몰라. 하지만 나도 무르를 파헤칠지도 몰라. 무르의 말대로 친구가 되는 거니까. 비극도 희극도 함께 경험한다. 마법관의 모두와 그래왔던 것처럼.
……알겠습니다.
샤일록: 현자님…….
샤일록,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이 세상에서 당신이나 모두가 저를 받아준 것처럼 저도 이 무르를 받아들이고 싶어요.
샤일록에게 그렇게 말하고나서 나는 무르를 마주봤다.
함께 해주시겠나요?
무르: 기꺼이.
무르: 그러면 그 나무의 비늘에 있는 무르의 영혼의 조각을 주워서 휴대해 주시겠나요? 실체화할 수 있께 되었지만 자신의 의사로 이동할 수 없거든요.
나는 시키는 대로 나무의 비늘을 찾았다. 썩어가는 잎이나 나무 열매의 안쪽에서 빛나고 있는 퍼플 사파이어의 조각을 찾았다.
이걸로 괜찮을까요?
무르: 네. 주머니나 어딘가 떨어뜨리지 않을 것 같은 곳에 보관해 주세요.
아, 알겠어요. 어디를 꿰매야하나…….
클로에: 내가 나중에 해줄게. 그러면 이 무르는 현자님과 계속 함께있는 거야? 사쿠 쨩처럼?
내 목덜미에 타고 있는 검은 고양이를 닮은 사역마를 가리키며 클로에가 물었다.
무르: 과연. 저도 휴대되는 자각을 가지고 휴대되기 쉬운 사이즈가 될까요. 즉, 그 사역마와 같은 정도의 크기가 되어 어깨에 오르는 겁니다.
라스티카: 그건 좋은 아이디어네요. 여기 무르와 구별도 잘 되고. 어때, 무르?
라스티카는 무르를 돌아보았다. 영혼이 부서진 고양이처럼 천진난만한 본체의 무르를. 커다란 뿌리에 쪼그리고 앉아 무르는 가만히 샤일록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르: …….
샤일록은 눈을 내리깔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윽고 무르의 시선을 눈치채고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샤일록: 무슨 일인가요, 무르.
무르: 샤일록은 나와 저쪽의 나. 어느 쪽이 좋아?
샤일록은 눈을 크게 떴다. 무의식중으로 마도구인 파이프를 땅에 떨어뜨렸다. 쭈그리고 앉은 무르의 발 밑으로 샤일록의 파이프가 굴러간다. 아름다운 은세공이 달빛을 되받아 빛났다. 달이 아닌 샤일록을 올려다보며 무르가 삐친 듯 입을 구부린다.
무르: 어느 쪽이 좋아? 오늘 밤은 조각을 주지 않을 거야?
샤일록은 달보다 더 창백해졌다. 무르는 개의치 않고 주인에게 다가가는 고양이처럼 어리광 부리는 몸짓으로 그의 한쪽 다리를 잡았다. 파이프를 집어들고 칭찬을 받으려고 웃으면서 샤일록을 올려다본다. 샤일록은 비틀거렸다. 영혼의 조각의 무르가 아연실색하게 중얼거린다.
무르: 샤일록……. 너……. 나에게 무슨 자아를 심어놓은 거니.
그 어조는 감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재밌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변덕스러운 무르다운, 밤바람 같은 홀가분함. 그에 비해 부인하는 샤일록의 목소리는 밤의 어둠을 가르는 비명같았다.
샤일록: 아니에요! 나는……. ……이런 것을 원한게 아니라…….
무르: 파이프, 필요없어? 내가 가져가버릴 거야. 숨겨버릴 거야!
가늘고 나긋나긋한 나무에 엉겨붙는 섬뜩한 담쟁이처럼 쭈그리고 앉은 무르가 샤일록의 팔에 손을 뻗는다. 샤일록은 파이프를 받지 못했다. 이마 사이를 누르며 고민하고 있다. 이마에 맺힌 흐트러진 머리카락의 힘줄이 흰 도자기에 달려가는 금처럼 슬프고 아름다웠다.
무르: 저기, 샤일록 …….
샤일록: ……안 돼, 무르. 더 이상 저에게 말 걸지 말아주세요.
샤일록은 무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벗겨내듯 말했다.
2화 그저, 다시 한 번
무르가 놀란 모습을 지었다. 왜 혼이 나는지 모르는 어린아이같은 얼굴이다. 영혼이 부서진 날부터 무르는 샤일록의 보살핌을 받으며 그와 함께 살아왔다.
샤일록: 이제부터……. 필요 이상 관여하지 마세요.
무르: 에?
샤일록: 쓸데없는 걸 저에게서 얻지 마세요. 당신에게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
무르: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샤일록: ……당신을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어요……. ……그저, 다시 한 번…….
더 이상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쉰 입김이 애타게 흔들린다. 영혼의 조각인 무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샤일록과 그를 올려다보는 무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어떤 식으로 비칠까. 비극으로 보이는가, 희극으로 보이는가.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며 영리한 눈동자를 빛낸다. 사랑하는 달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영혼의 조각의 무르는 고했다.
무르: 뭐, 그렇게까지 시리어스가 될 필요는 없지. 쌓기에 실패했다면 다시 한 번 무너뜨리면 돼. 달에 가까워지면 영혼이 부서진다. 결과가 판명된 사건이니 재현하기는 쉽겠지?
무르는 돌아서서 샤일록에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름대로 위로도, 농담처럼으로도 들렸다. 신랄한 비아냥일지도 모른다.
샤일록: …….
샤일록은 무시무시하고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듯한 눈빛으로 무르를 노려보았따. 이렇게 분노를 자아내는 샤일록의 모습은 처으모밨다. 무서웠지만 나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 타는 듯한 생생한 감정이 스멀스멀 들여다보이는 샤일록은 드물다. 확실히 그로서는 친구의 영혼의 조각을 수집하고 있던 것을 본인에게 차화된 것이다. 화가 나야 마땅하지. 영혼의 조각의 무르도 웃음을 지우고 정색했다. 항복을 표시하듯 두 손을 든다.
무르: 별로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었어.
신통치 않은 대답에 샤일록이 노골적으로 낙담했다.
샤일록: 무르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아요. 당신은 조각 중에서도 기묘하군요.
무르: 어떤 식으로?
샤일록은 고개를 돌렸다.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중얼거린다.
샤일록: ……상냥해.
샤일록의 말에 나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뭐라고 할까, 호의라고나 할까. 애정을 느낀다고나 할까…….
클로에: 알아! 왠지 분위기가 부드러운 느낌이 들어…….
라스티카: 우호적인 느낌이 드네. 지금까지의 무르의 조각들도 그들 나름대로 우호적이었지만.
영혼의 조각인 무르는 등을 뻗었다. 폼을 잡는 몸짓으로 모자를 잡는다.
무르: 감격스럽네. 많은 사람과 만나봤지만, 상냥하다는 말을 들은 적은 별로…….
샤일록: 별로?
무르: 거의 없어서.
샤일록: 그렇겠죠.
무르: 나는? 나는 상냥해?
샤일록: …….
무르: 물론이야. 자신감을 가져.
그때, 우리 머리 위로 새가 지나갔다. 비틀비틀 불안정하게 몇 번이고 선화하여 돌아온다.
클로에: 저 새……. 그레고리 아니야……?
라스티카: 정말이네. 이 식물원을 찾고 있는 걸지도 몰라. 새는 밤에 눈이 잘 안 보이니까.
라스티카는 검지 손가락을 점잖게 불으며 손가락 피리를 울렸다. 새소리를 닮은 소리가 울려퍼진다. 그러자 하늘을 나는 새가 이쪽으로 내려왔다. 그가 헤매지 않도록 나는 목소리를 높인다.
그레고리! 그레고리!
그레고리: 현자님……. 현자님!
하늘을 나는 것은 역시 그레고리였다. 극채색의 예쁜 날개가 흙에 범벅이 되 너덜너덜해져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레고리.
그레고리: ……릴리아나에게 살해당할 뻔했어!
에……!?
그레고리: 릴리아나는 릴리아나가 아니야! 누군가가 그녀인 척 하고 있어! 아니면 조종당하고 있는 겁니다! 현자님, 제발 도와주세요! 새의 모습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다시 한 번……. 저의 사랑하는 릴리아나를 보고 싶어요……!
샤일록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밤바람의 행방을 찾는 듯 라스티카가 시선을 옮긴다. 눈빛 끝에 있던 것은 빠진 그레고리의 날개였다. 두둥실 바람에 날아간다.
라스티카: 다시, 한 번만…….
클로에: ……라스티카……?
나는 그레고리의 더러움을 털어내고 팔 안에 그 몸을 끌어안았다. 애틋하고 마음이 끊어질 정도로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 만약 이 세계에서 떠날 날이 온다면 나도 생각하게 될까. 그저 한 번만 더 보고 싶어.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
……괜찮아요, 그레고리……. 중간에 내팽개치거나 하지 않아요. 당신과 릴리아나 씨가 서로 웃고 있는 모습이, 나도 보고 싶으니까.
그레고리: 현자님…….
그레고리의 눈동자가 젖어 별빛을 튕겨낸다. 그레고리로부터 이야기를 듣자 이런 깊은 밤에도 불구하고 릴리아나 공주는 외출을 한 것 같다. 행선지는 서쪽 나라의 왕궁. 우리는 코르테제 성으로 돌아와 아침을 기다렸다가 떠나기로 했다. 수다스러운 서쪽 마법사들인데 이상하게 다들 말이 없었다. 가슴의 주머니에 무르의 영혼 조각을 넣는다. 그러자 영혼의 조각의 무르는 손바닥만한 크기가 되어 내 가슴 주머니에 파고들었다.
무르: 실례. 같은 얼굴의 인물이 두 명이면 눈에 띌 테니까요.
그레고리: 뭐야? 또 이 근처 주민이 늘었나?
사크리피키움: …….
가슴 주머니에 영혼의 조각의 무르. 오른쪽 어깨에 사쿠 쨩. 왼쪽 어깨에 그레고리. 얼굴 주위의 밀도가 증가했다.
그레고리: 일단 잘 부탁해. 코르테제 성에서 일하고 있는 그레고리다.
무르: 무르 하트다. 지금은 구직 중이라고 해야 할까.
내 턱 앞에서 악수가 이루어졌다. 사쿠 쨩도 잠깐 참여해서 귀여웠다. 코르테제 성으로 돌아가려고 하기 전, 갑자기 클로에가 내게 말했다.
클로에: 저기, 현자님……. 나, 조금만 여기에 더 남아서 켈빈을 찾아도 될까?
켈빈은 식물원에서 만난 마법사다. 아무도 모르는 라스티카의 과거를 아는 눈치였다. 라스티카의 과거를 마주하겠다고 결심한 클로에의 눈동자에는 강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클로에: 오늘 밤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제대로 찾고 싶어. 나를 위해서라도.
그런 거라면 저희도 같이 남을게요.
샤일록: 맞아요, 클로에. 사양하지 마세요.
클로에: 으응, 괜찮아. 현자님도 모두 피곤할 거고 이 근처라면 안전할 것 같으니까…….
라스티카: 그러면 내가 같이 남을게.
라스티카가 미소를 지었다. 클로에의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본다.
라스티카: 클로에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거지?
클로에: 응.
라스티카: 켈빈 씨였나? 어떤 사람이야?
클로에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순간 망설임을 떠올리면서도 제대로 라스티카를 다시 바라본다.
클로에: 옛날의 라스티카를 아는 사람.
라스티카: 옛날의 나?
클로에: 응……. 라스티카가 잊어버린 옛날의 일을 아는 사람.
라스티카: …….
클로에: 있잖아, 나……. 라스티카의 과거가 궁금해. 그래서 켈빈과 이야기하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 오늘 밤 남아서 찾고 싶어. 그래도 괜찮다면 어울려줘.
밤바람이 불더니 꽃 냄새가 났다. 클로에가 손가락 끝을 움켜쥐고 무의식적으로 비비고 있다. 기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잔잔한 라스티카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미소가 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두려워서.
라스티카: 당연히 상관없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라스티카는 웃었다. 클로에는 안심한 듯 작은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라스티카는 말을 이어갔다.
라스티카: 그런데 어째서 옛날의 나에 대해 알고 싶은 거니?
클로에: 어째서라니……. 그런 건 당연하잖아.
클로에의 목소리는 약하게 흔들렸다. 도둑질을 의심받은 아이처럼 상처받고 당황하고 있었다.
라스티카: 어째서?
클로에: 왜냐하면……. 왜냐하면, 라스티카는 어린시절의 나를 알잖아. 나도 알고 싶어.
라스티카: 아아, 그런가. 그렇구나.
클로에: 알고 싶어. 뭐가 안 돼?
이제 라스티카가 놀라움을 표시할 차례였다. 클로에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클로에: ……뭐가 안 돼? 함께 여행을 해온 스승님에 대해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싶어. 라스티카에 대해서 전부 알고 있다고……. 안심하면서 보고 싶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언제까지 함께 있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윽, 행복한 시간이 끝나지 않아도 되는 건지…….
클로에는 오열하며 고개를 숙였다. 손등으로 눈을 닦고 나서 째려보듯이 식물원을 바라본다.
클로에: ……정말이지……. 여기서 우는 거 두 번째야. 이 장소, 싫어질 것 같아.
무르: 그거 슬프네.
무르: 불꽃놀이 볼래? 힘이 나?
라스티카는 몸을 숙여 클로에를 들여다보았다.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소원이나 희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라스티카에게 있어서 어릴 적부터 함께 여행을 해온 클로에가 특별했으면 좋겠다.
라스티카: 미안해, 클로에. 나는 옛날의 나를 몰라도 곤란하지 않았으니까……. 너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어.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구나.
클로에는 눈살을 찌푸렸다. 젖은 채로 있는 솔직한 눈빛이 애처롭고 사랑스러웠다.
클로에: 어째서 상냥하게 대해주는 거야? 그런 말을 하면 나도 사실은 곤란하지 않아.
라스티카: 그러면 어째서? 지금의 나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클로에: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나, 제멋대로 말하고 있는 거야……? 알고 싶을 뿐인데 …….
영혼의 조각의 무르가 미소 섞인 말을 했다.
무르: 욕심쟁이네.
고양이 같은 무르가 눈동자를 반짝인다.
무르: 당연한 욕구지!
샤일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수에 찬 등에 달빛을 받고 있다. 누군가가 이 세상을 완벽하게 알 수 있다면, 이 마음은 흔들리지 않고 편안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까. 천리안의 신처럼.
3화 물의 달, 거울의 꽃
피가로: ……하아……. ……하…….
새하얀 어둠 속, 자신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급격히 체온이 뺏기고 사고하는 힘마저 약해져 간다. 방한에는 불충분한 얇은 천의 옷을 끌어안고 힘껏 자기 자신을 감싼다. 쏟아지는 눈을 망연히 올려다본다. 이것이 사람인가. 이 얼마나 취약하고 덧없는 생물인가. 기분에 따라 날씨를 바꿔버리는, 마신 같은 남자도 있는데. 만약 이 날씨가 오즈의 기분이 나빠서 생긴 것이라면, 지금이라면 필사적으로 비위를 맞춰줄 수 있따.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이제, 시간에 못 맞추는 건 싫어.
미스라: '아르시무'
브래들리: '아도노포텐슴!'
그림 속의 스노우: 해냈나!?
그림 속의 화이트: ……! 방향을 전환했어! 도망칠 생각일세! 녀석들을 놓치지 마!
미스라: 당연하죠. 먼저 실례할게요.
브래들리: 기다려! 내 사냥감이다!
그림 속의 화이트: 실웨스여! 우리를 데리고 가게나!
실웨스: 하, 하지만……!
브래들리: 너는 여기서 기다려. 실웨스, 저 끝에는 뭐가 있지?
실웨스: 모르겠어……. 하지만 이 건물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라면 아마…….
브래들리: 아마도. 뭐?
실웨스: 지하수로로 이어져 있을 거야.
브래들리: 지하수로인가. 스노우, 화이트. 너희는 이 녀석이랑 기다려.
그림 속의 스노우: 음……. 답답하지만 알겠네.
그림 속의 화이트: 브래들리여. 저 자들에게 북쪽의 마법사의 힘을 똑똑히 보여주게나.
브래들리: 말할 필요도 없지.
브래들리: (하지만 저 녀석들은, 생물이 맞나……? 생물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야…….)
브래들리: ……여기가 지하수로인가……. 음……?
미스라: …….
브래들리: 미스라. 그 녀석들은?
미스라: 말 걸지 마세요. 지금 낌새를 살피는 중이에요. 만나자마자 공격했더니 요격도 하지 않고 사라졌어요. 흥. 엉거주춤한 녀석이네요.
브래들리: 저 녀석들은 도대체 뭐야? 망령? 사역마?
미스라: 말 걸지 말라고 했잖아요.
브래들리: 혼잣말이야.
미스라: 하? 거짓말이죠? 지금 저에게 말 걸었죠? 무조건 그렇죠?
브래들리: 알았어 알았어! 정신 산만하게 하지 마! 집중해!
미스라: ……'아르시무'
브래들리: 위험하잖아! 찾았으면 찾았다고 말해!
미스라: 찾았어요.
브래들리: ……! 공간이 흔들린다……!
미스라: 어디론가 이동할 생각이네요. ……그렇게 두지 않을 거지만요! '아르시무'
브래들리: ……!
브래들리: ……. ……북쪽 나라인가……. 아까 떠난 지 얼마 안됐는데.
브래들리: ……흥. 나왔군. 놀아주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온몸이 타는 듯이 뜨겁다. 온몸이 극심한 통증으로 삐걱거리고 있었다. 힘이 잘 안 들어가. 눈을 뜨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피할 수 없는 고통에 휩싸이면서도 어딘가 편안한 마음도 있었다. 어둠 속으로 질질 끌려 들어가는 듯한 무서운 졸음이 덮친다.
파우스트: (시노……. 시노는 도망칠 수 있었을까……. 네로와 히스는…….)
파우스트: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 과연……. 물의 달, 거울의 꽃이지. 구할 수 없다는 것의 비유야. 너는 내성을 거울에서 찾고 있지만, 해석과 사고를 넓히면 응용이 효과가 있어. 반사……. 있는 그대로를 되받아치는 것이지.
???: 하하……. 결벽하고 고집이 센 너에게 어울리는 술수라고 생각하지만.
레녹스: 파우스트 님 ……!
파우스트: …….
퍼뜩 눈을 떴다. 어둑어둑한 어둠 속에서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낯익은 장신의 체구가 지하수로를 빠져나와 가로막고 있는 유귀를 향해 간다. 레녹스다.
레녹스: '포세타오 메유바'
그는 빗자루를 출현시키더니 좁은 지하수로 안에서 재주껏 뛰어들었다. 통나무로 대문을 파괴하듯 기세를 몰아 자신의 빗자루를 지하수로의 유귀에 부딪치려 한다. 무리다. 그 공격은 닿지 않아. 장대한 팔과 갈고리 손톱으로 잘려나가게 될 거야. 즉석에서 판단했다. 하지만 레녹스의 목적을 깨닫는다. 공격은 닿지 않아도 시간을 벌 수 있다.
파우스트: (아직, 승기가 있어.)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핏물이 돌기 시작했다. 레녹스의 모습을 보고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이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는 편리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생각을 멈추고 비틀거리며 반신을 일으켰다.
파우스트: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이제 마력이 없어. 마도구도 없어. 마지막 내기다. 이 마법이 성공한 것은 과거에 단 한 번 뿐이지만 …….)
파우스트: ……. ……!
레녹스: 윽……!
갈고리손톱으로 도려내 레녹스가 땅에 내동댕이쳐진다. 곧 그는 일어서서 불사의 병사처럼 덤벼들었다.
파우스트: 하……. 하아……!
흐르는 피를 손바닥으로 퍼 발밑 수로에 뿌린다.
파우스트: '사티르크나도 무르크리도'
눈을 감고 주문을 중얼거리자 수로에 흩어진 핏자국은 마법진이 되어 빛났다. 속이 빈 곳에 손을 댄다. 손바닥 건너편에는 거대한 유귀를 향해 발을 내리치는 레녹스가 보인다. 아무것도 전하지 않았는데, 레녹스는 나의 의도를 모두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다. 귀신을 향해 도발하는 듯한 움직임을 반복하고 상처투성이가 되면서 공격을 계속해 나간다.
레녹스: ……큭……! '포세타오 메유바!'
지하수로를 흐르는 물이 내 손바닥 앞에 한 방울, 한 방울 빨려들어가듯 모여들었다. 바람이 불고 나를 중심으로 선풍이 일어나간다. 이윽고 물방울은 거미줄처럼 복잡한 무늬를 그리며 마도구와 흡사한 타원을 형성해갔다. 레녹스를 처치하려고 유귀가 갈비뼈를 삐걱거리며 푸른 빛을 모은다.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우스트: ……레노……!
체력 소모가 심해 엎드려, 라고까지는 외치지 못했다. 하지만 짐작한 것처럼 레녹스가 육체를 수로에 내던진다. 유귀에서 창백한 섬광이 뿜어져 나온다. 무섭게 눈부신 푸른 섬광이 사정없이 내 몸을 관통하려 한다. 그 찰나, 주문을 외웠다.
파우스트: '사티르크나도 무르크리도!'
지하수로에서 모은 물방울이 마도구의 거울과 같은 경면으로 변한다. 눈이 번쩍 뜨이는 하얀 빛이 넘치고 엄청난 충격이 나를 덮쳤다. 하지만 유귀가 뿜어낸 창백한 섬광은 내 몸을 꿰뚫는 일은 없었다. 즉석의 마도구……. 지하수로의 물로 만든 거울에 빨려 들어간다. 그 자리를 마련하면서 서쪽 나라 땅에 흐르는 물로 만들어낸 탓인지 거울은 불안정했다.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거나 손바닥 정도로 축소하기를 반복하면서 어떻게든 유귀의 공격을 흡수해간다.
심한 충격 속에서 나는 몇 번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다. 서 있는게 신기할 정도야. 유귀에서 뿜어내는 섬광이 다하여 공격이 끝난다. 잠시, 주위가 정적으로 가득찼다. 직후…… 수경에서 똑같은 푸른 섬광이 뿜어져 나온다.
레녹스: ……! 경면 반사…….
처절한 충동을 느껴 배에서 떠다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발을 딛고 유귀가 날린 푸른 섬광을 똑바로 되받아치고 있었다. 몸부림치듯 삐걱거리며 지하수로의 유귀가 하얀 빛에 싸여간다. 그 윤곽이 무너져가는 것과 동시에 나와 시야는 어둠에 잠겼고 소리는 멀어졌다.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레녹스의 목소리였다.
레녹스: 파우스트 님……!
자신이 말을 하는지 안하는지 모른 채 입을 움직였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듯한 격통 속에서 등에 감긴 팔을 느꼈다. 차가워진 몸에 닿은 체온이 기분 좋아. 큰 손바닥을 움켜쥔다.
파우스트: ……시노를……. 부탁해……. 이 앞의……. 공간의 왜곡…….
레녹스가 뭐라고 외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너무나도 슬프다. 아직, 해야 할 말이 잔뜩 있는데…….
4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설원에서
시노: ……윽, 히스……! 어디 있어!? 히스……! 이 근처에 기척이 느껴져 ……. 죽지는 않았을 거야. ……히스……!
히스클리프: …….
시노: 히스……! ……인간 모습으로 돌아왔어……. 상처투성이잖아……. 기다려. 지금 마법으로 따뜻하게 입을 옷을……. '맛차 스디파스!'
히스클리프: ……윽…….
시노: ……괜찮아! 내가 꼭 구해줄게! 네로나 다른 녀석들은 어디 있지? 사람을 모아 파우스트를 구하러…….
날씬한 청년: …….
시노: 너……! 괜찮아!?
날씬한 청년: ……아……. ……사…… 살려줘…….
시노: ……!? ……설마……. ……!
시노: (여기까지 따라온 건가! 아니면 새로운 녀석!? 나 혼자서는 쓰러뜨릴 수 없어! 네로는 어디야!? 히스…….)
시노: (진정해, 진정해……. 히스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히스를 지키는 것이 내 몫이다. 약속했어. 지키겠다고. 여기서 쓰러지면 파우스트에게 보일 얼굴이 없잖아!)
시노: ……좋아! 상대가 되어주지!
히스클리프: ……윽……. 아……. ……시노…….
시노: 으으으으윽……! '맛차 스디파스!'
히스클리프: ……! 시노……!
미스라: '아르시무'
히스클리프: ……! 미스라……!
시노: ……미스라…….
미스라: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요. 너덜너덜하잖아요.
시노: 윽……. ……살았다……. 지금이라면 네 신발 끝에 키스할 수도 있어.
히스클리프: 뭐…….
미스라: 이상한 짓은 하지 마시고 거기 비키세요. 미안하지만 그 녀석은 제 사냥감이라서요. 다음에야말로 제 수정해골로 얼음 조각을 만들어 먼지로 만들어드리죠.
시노: 조심해……! 갈비뼈 부분에서 섬광을 뿜어낸다고!
미스라: 문제 없어요. 정면으로 상대해드리죠. '아르시무'
시노: ……!
날씬한 청년: ……우윽…….
키가 작은 신사: 헉……. 하아……! 추워! 얼어죽을 것 같아……! 너, 괜찮나!?
날씬한 청년: ……네. 다행이다. 무사하셨군요. ……! 저 붉은 머리의 청년은……!?
키가 작은 신사: 모르겠네……. 저 정체 모를 뼈 괴물과 정면으로 맞서서…….
날씬한 청년: 대단해……. 수정해골이 저 녀석의 섬광을 부수고 있어……! 혹시 그 붉은 머리의 청년은 전설의 마법사…….
시노: 미스라다. 너, 목숨을 건졌네.
날씬한 청년: 미스라……. 북쪽의 마법사 미스라!?
키가 작은 신사: 미, 미스라라고……!?
시노: 맞아. 미스라가 이긴다. ……이길 수 있지!?
미스라: 당연하죠. 아까는 일부러 당한 거예요.
시노: 당했어? 네가!?
미스라: 안 당했어요. 하지만 만만치 않다고요, 이거. 현자의 마법사의 절반은 이 녀석에게 죽을 거예요.
시노: …….
히스클리프: ……오토마타……. ……기계장치의 마법사……. 노바가…….
시노: 움직이지 마, 히스! 심하게 다쳤어.
히스클리프: 시노……. ……그 녀석은 노바가 만든 거야. 노바를 만났구나. 네로는? 파우스트 선생님은 어디에 있어?
시노: ……미스라! 서둘러줘! 너에게 부탁할게 있어!
미스라: 저를 사역할 셈인가요?
시노: 파우스트와 네로가 죽어가고 있다고!
히스클리프: ……!? 그런……!
미스라: ……알겠습니다. 서두르죠. '아르시무'
브래들리: …….
나는 장총을 겨누면서 뼈 괴물을 멀리서 관찰했다.
브래들리: 3, 2, 1…….
손가락을 올려 조금 전 설원에 설치한 마법진을 가동시킨다. 도적단에 있을 때 흔히 양동작전에 썼던 것이다. 무인 마법진이 작은 눈 토네이도를 만들어 무수한 얼음 찌꺼기를 날린다. 바보 같이 큰 괴물은 슬그머니 사라져 날아온 공격을 피했다. 거기까지는 상정이 끝난 상태였다. 한 박자 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녀석이 출현한다. 마법진 쪽을 향하면서 녀석은 푸른 빛을 모으기 시작했다.
브래들리: 1, 2, 3…….
섬광을 발할 때까지의 시간을 카운트한다. 4까지 빛을 모아 5에 쐈다.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녀석이 내뿜는 섬광의 거리를 관찰했다. 엄지손가락과 검지로 거리를 잰다.
브래들리: ……중거리라는 건가. 내 장총의 사거리가 더 길어.
즉, 원거리에서의 싸움이라면 내가 유리해진다. 조준을 정하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다. 바람의 세기를 계산하면서 손가락을 당긴다.
브래들리: '아도노포텐슴'
총탄은 머리에 명중했다. 데미지는 주어진 듯, 털썩하고 머리를 늘어뜨린다. 하지만 미스라가 말했떤 것처럼 후드 안에 느껴지는 반응은 없었다. 흠칫 몸을 기울이면서 그 녀석은 기묘한 자세로 균형을 잡았다. 바로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서 이쪽을 돌아보고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브래들리: ……들켰나.
총을 겨눈 채 상대를 관찰했다. 약점이 머리가 아니라면 역시 갈비뼈 속인가. 그곳에는 마나석 같은 것이 보였다. 갈비뼈를 겨낭해서 다시 한 번 방아쇠를 당긴다. 갈비뼈의 중심에 명중했지만 데미지를 받은 모습은 없었다. 기세를 늦추지 않고 직진해 온다. 감정이 없는 죽은 병사 같다.
브래들리: 쳇…….
다시 방아쇠를 당긴다. 아직 전진이 멈추지 않았다. 한 방 더. 두 발, 세 발 계속 총을 쏘면서 끈질긴 견고함에 소름이 끼쳤다.
브래들리: (이런게 서쪽 나라를 서성거리고 있었다니……. 살아있는 것이 아니야. 인형이나 도구라면,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든거지? 마법관의 젊은 마법사들은 쉽게 죽어버리겠어.)
슬슬 저 녀석의 섬광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신경을 집중시키면서 마력을 담아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다.
브래들리: (다음의 한 방으로 끝내주마.)
브래들리: '아도노포텐슴!'
마력을 두른 탄환이 돌면서 녀석의 갈비뼈 안쪽으로 파고든다. 녀석은 겨우 움직임을 멈췄다. 삐걱삐걱거리며 눈부신 푸른 빛에 휩싸여 간다. 급격히 부풀어 올랐다고 생각한 순간, 녀석은 산산이 부서졌다.
브래들리: 하아……. 수고나 들이게 하고.
잔해를 확인하려고 발걸음을 돌리려고 할 때 이 부근에서 공간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브래들리: (미스라인가? 아니……. ……네로?)
희미하게 네로의 기척을 느꼈다. 하지만 네로치고는 약하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덧없는 기척이다.
브래들리: (잠복해있는 건가? 혹시 죽어가고 있나? 설마, 그 녀석이…….)
웃어넘길 수 없었다. 싫은 예감이 든다. 초조함을 느끼고 빗자루에 뛰어올랐다. 하얀 미궁 같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설원을 미덥지 못한 기척을 향해 달려간다.
5화 그 생명의 소재는
네로: ……! '아도노디스 옴니스'
곱슬머리의 여성: ……추위가 누그러졌다……. 고마워…….
마른 노인: 덕분에 살았네……. 미안하군……. 우리는 결계를 칠 수가 없어서…….
네로: 됐어……. …….
곱슬머리의 여성: 어, 어디 가!?
네로: ……당신들은, 여기에 있어……. 나는 가야 해…….
곱슬머리의 여성: 무리야. 그런 몸으로……!
네로: ……지금 불을 켜놓을게……. ……결계가, 사라지면……. 아침을 기다리고, 도망쳐.
네로: 헉……. 하아…….
네로: (앞이……. 보이지 않아…….)
네로: '아도노디스…….' '옴니스' …….
네로: (……날 힘도, 남아있지 않아……. 무리하면 죽을까? 이거……. ……그렇다고 해도, 순서가 다르잖아……. 나 같은 것보다, 선생이나 시노가……. 살아남아야 하잖아.)
네로: ……윽, 하……. ……! ……으, 우윽…….
네로: (……저기, 브래드……. 너,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돌이 되어있으면 어떻게 할 거야……. 너에게 닿지 않는 장소에서 돌이 되어버리면 조의를 받을 수 없어……. 너를 위해 돌이 되어, 너에게 먹히는 것이 최고의 명예라고 생각했어. 다른 녀석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와서지만.)
네로: (내가 배신했잖아. 이 새하얀 대지도, 너도……. 힘들어서, 너무 힘들어서, 버려버렸어…….)
네로: ……'아도노디스…… 옴니스'
레녹스: 하아……. 헉……!
레녹스: (시노들은 어디있지? 공간의 왜곡이란……. 서두르지 않으면 파우스트 님의 목숨이 위험해. 피가로 님은 어디에…….)
레녹스: (……! 저건, 파우스트 님의 마도구의 거울……! 이것이 공간의 왜곡……. 여기서 시노들은 탈출한 건가.)
파우스트: ……윽……. 부탁해……. 시노들을…….
레녹스: 마음, 받았습니다.
레녹스: (혼잣말인가……. 대답은 들리지 않겠지. ……마법이 풀려서, 다리가…….)
레녹스: (심한 화상이다……. 역시 숨기고 계셨어. 이 분은 결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생각이 없어. ……절대로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든 도와주지 않으면. 그것 때문에 계속 찾았던 거야. 구국의 영웅이 아니어도 좋아. 인간이나 알렉 님을 미워한 채로라도……. 이번에야말로,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레녹스: '포세타오 메유바'
레녹스: ……! 여기는……. 북쪽의 나라……?
레녹스: 하아……. 헉……. 체온을 빼앗긴다……. 파우스트 님…….
레녹스: ……마법사들의 기척……. 피가로 님의 기척이, 희미하게…….
미틸: 생각보다 빨리 동쪽의 탑까지 왔네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서쪽 나라에 도착하면 어디로 향하나요?
루틸: 그렇네……. 중앙 나라의 마법사는 풍요의 거리로 갈 예정이었어. 마법관에 밤까지 돌아오지 않았으니 여관에 묵고 있는 걸지도 몰라. 봐, 전에 우리도 묵었던 적이 있잖아. 콕로빈 씨가 주선해 주신…….
미틸: 기억하고 있어요! 리케도 몇 번 묵었다고 하더라고요. 오늘 밤도 거기에 있을지도…….
루틸: 그렇다면 거기를 목표로 해보자!
미틸: 네!
루틸: 서쪽 나라에 도착했어! 서둘러서 오즈 님을 찾자!
미틸: 네!
루틸: 미틸, 형의 빗자루로 와! 속도를 낼게!
미틸: 에!? 지금이요!?
루틸: 응! 옆까지 갈게!
미틸: 하지만 피가로 선생님이 날아갈 때 빗자루를 옮기면 위험하다고…….
루틸: 괜찮아! 피가로 선생님도 가끔 뛰어오시는 걸!
미틸: 그…… 그렇죠! 알겠어요! 해볼게요!
루틸: 이리 와!
미틸: 하나, 둘, 셋! ……됐다!
루틸: 해냈네! 꽉 잡고 있어!
미틸: 네! 알겠……. ……으, 우와아아아아……! 형님, 너무 빨라요……!
브래들리: 하아…….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사나운 한밤중의 설원을 바라본다. 그리운 느낌이었다. 그 시절에는 많은 하수인이 있었고,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네로가 있었다.
네로는 별난 녀석이었다. 건방지고, 넉살 좋고, 배짱이 두둑한데도 겁 많은 소심한 짓을 했다. 마음 속 깊이 경멸에 찬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에게 심취해 신봉하고 있었다. 어떤 네로도 재미있고 아늑했다. 에바의 말이 맞아. 네로는 잃어버린 가족에 가까웠다. 지긋지긋한 얼굴에 어쩔 줄 모르는 바보를 보는 눈빛으로 이것저것 함부로 말하는게 좋았다.
나는 땅바닥에서 뛰어오른 남자다. 구덩이 바닥의 경치도 알아. 꼴사납게 기어들어간 일도 있었다. 힘을 키울 때마다 눈에 띄어져 많은 사람들이 나를 두려워했다. 그게 기분이 좋았다. 내 머리를 치고 욕하는 녀석들은 모두 사라졌다. 네로 정도다. 나보다 먼저 죽지 않고, 나에게 죽지 않고, 옆에 계속 서있던 것은. 웃으면서 두령의 책임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네로가 있으면 어떻게든 된다. 뒤는 그 녀석에게 맡기고, 나는 어디든 달려갈 수 있어. 왜 이렇게 꼬인걸까. 같이 지낸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나. 나를 배신하고 내 재물을 훔쳐간 거라면 좋아. 하지만 그 녀석은 나를 배신하고, 전부 내팽개쳤다. 마치 가치 없는 것처럼.
브래들리: …….
반쯤 눈에 파붇힐 뻔한 네로를 발견했다. 바보 같이 얇은 옷으로 누워있다. 어두워서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창백한 피부색을 하고 있었다. 목덜미에 닿아 맥을 잰다. 몸은 꽁꽁 얼었고 심장소리도 약했다. 선혈에 젖은 옷이 얼어서 붙어 있다. 솔직히 화가 났다. 이 녀석을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 건 나뿐이잖아. 네로의 가슴에 손을 얹고 낯선 타자에 대한 치유 마법을 부린다. 네로가 고개를 젖혔다.
네로: …….
브래들리: 네로. 정신이 들었나.
내 목소리가 닿았는지 모르겠다. 네로는 눈을 감은 채 입술을 움직였다. 가냘픈 목소리로 힘없이 고한다.
네로: ……동쪽의…… 녀석들을……. 도와줘…….
브래들리: 동쪽 녀석들이 있나? 알았어. 너는 누구에게 당했지?
네로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동료의 위기를 알리고 역할을 다했다는 듯 축 늘어져 눕는다. 그 순간부터 생명의 힘 같은 것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브래들리: 네로. 어이, 네로…….
네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쿵하고 심장이 울렸다. 무의식적으로 초조하게 호흡이 빨라지면서 네로의 가슴팍에 손을 얹는다. 손바닥이 희미하게 빛나고, 그 빛이 네로의 몸에 침투해간다. 하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네로의 쇠약은 심했다. 이러다가 죽는다. 옛날처럼 마력을 쏟으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거부당한 것처럼 힘이 전달되지 않아 반응이 없었다.
브래들리: 네로.
이름을 불렀다. 눈보라 소리가 심해서 시야가 막힌다. 네로의 반응은 없었다.
브래들리: 네로.
다시 한 번 호소하자 희미하게 반응이 나왔다. 눈꺼풀이 떨렸다. 동료를 잃는 것은 익숙했다. 네로의 죽음도, 자신의 죽음도 각오하고 있었다. 네로가 눈꺼풀을 열었다. 안도하며 다시 한 번 마력을 쏟아 붓는다. 하지만 또 다시 실패했다. 옛날 같으면 실수할 리가 없었다. 이 녀석이 나를 믿고 살려고 하지 않는 이상.
브래들리: …….
나는 기세 좋게 네로를 노려보았다. 매도할 생각이었지만 네로의 눈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금빛 눈동자는 공허했다. 눈꺼풀만 벌리고 있을 뿐, 네로에게 의식은 없다. 살 의미가 없다. 그렇게 보였다.
생각해보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네로는 힘들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눈을 하고, 자신도 타인도 세계도 믿지 않았다. 도둑질에 재능이 넘치는데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에는 서툴렀다. 누구보다 나를 신봉하고 있던 주제에, 나를 배신하고 감옥에 넣었다. 나는 네로의 뺨을 때렸다. 의식을 되찾게 하려고 소리를 질렀다.
브래들리: 네로! 마력을 줄게! 네가 받아!
브래들리: ……일어나! 네가 안내하지 않으면 저주상 녀석들도 도와줄 수 없잖아!
네로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멱살을 잡았다. 목구멍 깊숙하게 숨이 떨렸다. 허망하게 가루눈을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를 쏘아 죽일 생각으로 노려본다.
브래들리: ……네 녀석, 뭘 멋대로 하는 거야.
브래들리: 편하게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이 배신자가……! 너 때문에 몇 명이나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너를 죽이는 건 나야! 그 전에 허락없이 죽지 말라고! 네 녀석의 목숨은 내 거다! 알겠냐고! 네로……!
몰아치는 거센 바람이 잠시 멈췄다. 공허하게 열려있던 눈동자가 천천히, 어색하게 옮겨진다. 나의 얼굴을 보고 이름을 부른다.
네로: ……브래…….
브래들리: 마력을 쏟을 테니 받아들여. 저항하지 마.
네로는 몇 번인가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가슴에 손바닥을 놓고 마력을 직접 쏟아붓는다. 손바닥의 희미한 빛이 천천히 네로의 몸에 침투해가는 반응이 있었다. 졸린 듯 눈을 가늘게 내리깔면서 네로가 몸을 젖힌다. 중간에 팔을 잡혔다. 팔을 잡는 손에는 약간의 힘이 있었다.
네로: ……이제 됐어…….
브래들리: 움직이지 마. 죽기 직전이었다고.
네로: 부탁해. 파우스트를……. ……시노들은……?
브래들리: 나한테 맡겨. 장소는…….
물을 것도 없었다. 희미하게 동쪽 녀석들의 기척을 느꼈다. 미스라의 기척도 가깝다. 네로의 팔을 메고 일으켜 세운다. 아픔에 얼굴을 찌푸리면서 네로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나를 보았다.
네로: ……브래드……. ……아까…….
브래들리: 나중에 얘기해.
나는 네로를 데리고 장소를 옮겼다.
6화 꿈같은 기적
피가로: ……헉……. ……'폿…… 시데오…….'
피가로: ……. ……하…….
손발을 덮친 격렬한 떨림도 이윽고 멈췄다. 천천히 감각이 사라져간다. 몰아치는 눈에 반신이 덮여도 통증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이 세상을 떠난 건가. 잃어버린 고향의 백성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내 이름을 부르짖으며 기도했을까. 절망과 공포를 눈앞에 두고, 지켜질 것이라 믿고.
매서운 눈보라 소리에 섞여 어딘가 멀리서 사람의 소리가 난다. 환청인가. 아니, 사람의 목소리다. 쓰러질 듯하면서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얀 눈이 휘몰아치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본다. 커다란 새와 같은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레녹스: ……피가로 님……. 피가로 님……!
레녹스다. 그것은 빗자루를 탄 레녹스였다. 놀랍게도 팔에는 파우스트를 안고 있었다. 조금 전 환영처럼 보았던 지하수로에 엎드려 있는 파우스트 그 자체였다. 나는 만날 수 없었지만, 그들은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구할 수 있었다. 안도와 피로가 완만히 덮친다. 하지만 파우스트를 본 순간 핏기가 가셨다. 전신에 중상을 입고 있었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생명에 지장이 있다. 하지만, 어떻게…….
레녹스는 내 눈앞에 의식이 없는 파우스트를 내밀었다. 똑바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레녹스: 피가로 님. 파우스트 님을 부탁합니다. 저는 동쪽의 마법사들을 찾아오겠습니다.
피가로: 아…….
레녹스: 지금은 의식이 없지만 등과 목과 어깨, 오른쪽 허벅지에 심한 상처가 있습니다. 등에 난 상처가 가장 심해서 처치했지만 출혈이 멈추지 않습니다. 제발, 부탁드려요.
레녹스는 고개를 숙이고 파우스트를 나에게 맡기려고 했다. 내 손을 보고 의아한 듯이 눈썹을 찡그린다. 마법으로 체온을 지킬 수 없었던 나의 손끝은 얼어서 적자색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어둠 속이라 확실하게 보여지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만, 위화감을 깨닫고 무언가 말을 건네려고 한다.
레녹스: 피가로 님…….
그때, 돌풍이 불었다. 레녹스가 비틀거린다. 파우스트를 떨어뜨릴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양팔로 지탱하려고 했지만 뒤엉켜버려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 위에 주저앉았다.
피가로: ……윽!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는지 파우스트가 의식을 되찾았다.
파우스트: ……윽, 우윽…….
레녹스: 파우스트 님!
파우스트: ……괜찮아……. 시노……. 시노들을…….
레녹스: 알겠습니다. 피가로 님, 부탁드립니다.
피가로: …….
얼어붙은 목으로 외친 목소리를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레녹스의 등이 멀어지고 새하얀 눈과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기다려줘. 마법을 쓸 수 없어. 그렇게 외치지 못한 것은 파우스트를 절망시키고 싶지 않아서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살고자 하는 의욕을 잃어버린다. 어떻게 눈치채지 못하게 최선의 응급처치를 할 수 있을까. 나는 파우스트를 조심스럽게 보았다.
그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핏기를 잃고 창백한 얼굴에 파우스트는 안도를 하고 있었다. 내가 있으면 반드시 살 수 있다고 믿고 있어. 예전에 나를 따르는 제자였을 때처럼. 눈 밑으로 사라져간, 잃어버린 고향의 백성들처럼. 아아, 나는 계속…… 그 눈빛에 보답하고 싶었어.
피가로: ……괜찮아. 괜찮아……. 반드시 도와줄게.
뜨거운 충동이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른다. 모든 것을 잃은 눈사태의 날에도 같은 말을 전하고 싶었다. 괜찮아. 내가 있어. 내가 여기에 있어. 차가운 뺨을 쓰다듬고 주문처럼 반복했다. 파우스트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피가로: ……하…….
뜨거운 눈꺼풀이 얼어서 아프다. 나는 파우스트를 옆으로 눕혔다. 등의 열상이 깊다. 세개의 날카로운 선이 달리고 있었다. 설원에 붉은 마법진을 그린다. 얼어붙은 맑은 공기의 북쪽 나라의 대기를 노려보았다. 참혹하고 냉철한 북쪽 나라의 정령들에게 나의 기척을 떠올리게 한다.
피가로: 경박한 것들……. 나의 이름을 떠올리고 뉘우치는 것이 좋다.
얼어 붉어진 손끝을 마법진과 파우스트의 위에 얹는다.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운다.
피가로: '폿시데오'
눈보라의 소리만 울려퍼지고 있었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꿈같은 기적을 일으키고 싶었다. 명성이나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명예나 존경따위는 필요없다. 설 자리가 없어도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다. 그저, 그들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나를 믿는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며 보고 싶어하는 기적을 보여주고 싶었다.
조용히 눈을 떴다. 눈보라를 거슬러 마법진 위에 작은 바람의 고리가 생겨나고 있었다. 바람의 고리는 점점 더 크게 퍼져 왕관과 같은 형태로 우리를 감싼다. 파우스트의 등의 끔찍한 상처가 금세 막힌다. 풍압은 증가하고 바람의 고리는 죽음의 호수 정도로 커져간다. 나의 손끝에 조종당하고 북쪽의 정령들이 환희하고 있다. 혀를 차면서 나는 주위를 째려봤다.
피가로: 다시는 명령을 거역하지 마라.
두둥실 가루눈이 춤을 춘다. 그것은 파문처럼 퍼져 멀리 있는 나무를 베어 쓰러뜨렸다. 눈보라가 치고 땅울림이 울려퍼진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마력이 돌아왔다. 파우스트의 치유에 전념하였다. 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누군가를 대신해 공격을 받은 것 같았다.
잃지 않아서 다행이다. 신뢰를 잃지 않아서 다행이다. 마법관으로 돌아가면 이야기를 하자.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미틸과 미래의 이야기를 하자. 아이작은 죽이자. 처치를 한 파우스트를 안고 나는 하늘로 날아올라 레녹스의 행방을 찾는다. 북쪽 나라의 공기는 맑고 깨끗해서, 순종적으로 돌아서지 않고 모든 것을 내게 전해주었다.
에바: '아우라레기우스'
아이작: '아니멈 벡사토!'
아이작: ……윽, 크아아악……!
에바: 흥……. 벌레 같은 녀석!
아이작: 큭……. 커헉……! ……젠장……! 죽지 않는 노처녀 같은 놈이……!
에바: 죽는 것은 너다. ……소피, 용서해줘……. 너를 의심한 것을……. 지금 이 녀석을 넘길게. 저승에서 마음껏 부수면 돼. '아우레기우…….'
아이작: 기다려……!
에바: 목숨을 구걸하다니. 최후의 긍지마저 잃은거냐.
아이작: ……커헉……! 거 …… 거래다. 그 여자……. 이 파란 돌의 소유자였던 놈의 마지막 말을 알고 싶지 않나?
에바: …….
아이작: 그 여자의 최후는 나만 알고 있다. 나밖에……. 큭……. 나만이 알려줄 수 있지.
에바: ……대신 목숨은 살려달라고?
아이작: ……나는 병이 있어. 곧 죽는다.
에바: 알까보냐. 내가 죽일건데.
아이작: …….
에바: ……말해.
아이작: ……그녀는……. 에바……. 쿨럭…….
에바: ……내 이름을? 뭐라고? 그 아이가 뭐라고 했어.
아이작: 에바…….
에바: …….
아이작: '아니멈 벡사토!'
에바: ……! 아아아악……!
아이작: 걸렸어! 걸렸다고……!
에바: 아아아……! 아……!
아이작: 그런 건 잊어버렸어! 그대로 돌이 되어라!
에바: ……아아아……!
에바: ……소피…….
아이작: 아하하! 꼴 좋다! 돌이 되었구나! 대마녀 에바를 돌로 만들었다! 고급 마나석이 이렇게……. 역시 지혜는 최고야! 다음은 돌아가서 피가로를……. …….
아이작: ……그만두자. 그 녀석은 똑똑해서 무서워. 없으면 외롭지만.
7화 같은 올바름 속에서
브래들리: ……에바?
네로: ……왜 그래……?
브래들리: ……아니야. 설마.
브래들리: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루틸: 하아……. 오즈 님들을 금방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미틸: 자는 중에 깨워서 죄송해요.
리케: 아니에요. 동쪽 마법사의 중대사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암……. 죄송해요, 하품이…….
루틸: 아서 님과 카인 씨는요?
오즈: 아서는 중앙의 나라로 돌아갔다.
미틸: 카인 씨는요?
리케: 마법 과학 병단 본부에 갔어요. 필요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이야기를 하고 온대요.
루틸: 그러면 친목을 다지기 위해 술집같은 곳에 가있는 건가요?
리케: 아침에 돌아온다고 했어요. 저번에 네로가 말했던 것처럼.
오즈: ……아직 날은 밝지 않았다.
리케: 확실히. 지금이라면 아직 밤이죠.
오즈: 피가로가 이 단추를 나에게?
루틸: 네. 오즈 님이라면 행방을 알 수 있다고…….
오즈: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리케: 알고 있어요. 두 번이나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미틸: 날이 밝으면 오즈 님의 마법으로 비오는 거리에 가주실 수 있나요? 비오는 거리의 여관에서 사라졌거든요. 동쪽의 마법사들도, 피가로 선생님들도…….
오즈: 문제 없다.
미틸: 감사합니다!
리케: 아……. 낮에 갔던 건물, 아직 불이 켜져있어요.
미틸: 어디인가요?
리케: 저기, 저쪽 건물이요.
미틸: 정말이다……. 저것이 마법 과학 병단 본부……?
리케: 네.
미틸: 서쪽 나라는 마법 과학 덕분에 점점 발번하고 군인들고 강해지고 있다고 했어요. 히스클리프 씨가.
루틸: 히스는 동쪽 나라의 대귀족의 아들이니까. 무인 집안이라고 했지. 무슨 일이 있을 때는 동쪽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지휘를 한대.
리케: 아무 일도 없어도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재앙' 과 싸우고 있는데. 사람들끼리는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루틸: 그렇지……. ……어라?
오즈: 무슨 일이지.
루틸: 큰 그림자가 발밑에서 움직여서…….
미틸: 형님, 저거예요! 호화로운 마차가 하늘을 날고 있어요!
루틸: 정말이다……. 대단해…….
리케: 아……!
미틸: 무슨 일인가요?
리케: 방금 마차 창문으로 보였던거, 무르 아니었나요?
미틸: 무르 씨? 그러면 마차를 띄우고 있는 것은 서쪽의 마법사 분들인가요?
오즈: 틀려. 저것은 무르와 같지만 무르가 아니다.
리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오즈: ……무르지만 무르 자신은…….
루틸: 아……! 마차에 공주님이 타고 있어요.
리케: 공주님, 보고 싶어요. 하늘을 날아서 보고 와도 될까요?
미틸: 그, 그만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루틸: 공주님이 이런 한밤중에.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오즈: …….
무르: 정말이지, 너에게는 질렸어. 아직 시제품이라고 했는데.
노바: 알티마를 위해서는 더 많은 마나석이 필요하다.
릴리아나: 노바. 역시 그분을 모시고 와. 중앙 나라와 협상을 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그분이 서쪽 나라에 있는 동안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질: 중앙의 나라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불씨가 될 수도 있어요.
릴리아나: 상관없어. ……노바.
노바: 알겠다.
무르: 그렇다면 나도 그들을 초대하러 가지.
릴리아나: 무르.
무르: 네가 원하는 것은 현자님과 현자의 마법사잖아? 데리고 와줄게. 성대한 대관식이 될 거야. 자, 가자. 네가 좋아하는 끈이야. 그래그래. 이리 와.
릴리아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병기 개발이 끝나면 바로 왕궁의 연못에 가라앉혀주지.
질: 조심해 주세요. 박사입니다. 듣고 있을지도.
릴리아나: 흥……. 고양이가 없으면 이동도 할 수 없는 남자, 이슬만큼도 무섭지 않아.
릴리아나: ……아리아……. 나쁘게 생각하지 마. 이건 속죄니까.
카인: (현자님은 무사할까……. 새가 되어버린 자와 서쪽의 코르테제 령으로 향했는데…….)
서쪽 지방의 부인: 후후……. 중앙 나라의 분은 성실하고 지루한 분만 있는 줄 알았는데……. 카인 님은 말도 잘하고 자극적이셔서, 아주 멋져…….
카인: 하하, 고마워.
서쪽 지방의 부인: 한 잔 더 어떠신가요?
카인: 받을게.
정의는 많이 있다. 나는 국가와 주군을 지키는 것을 제일 우선시하는 정의라고 결정했다. 그렇다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라를 파는 척하는 것도 정의가 될 것이다. 엄마가 자식을 지키는 것을 정의라고 하고, 거짓말을 하게 하는 것에는 눈을 감는 것처럼.
어렸을 때 엄마의 품에 안겨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건강한 아이였지만, 그날 밤은 꾸중을 들은 것도 아니고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엄마는 살며시 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 녀석! 그만둬! 잘 다녀와! 조심해! 어머! 대단하잖아! 언제나 밝은 엄마의 목소리가 그날 밤은 작고, 상냥하고, 촉촉했다.
카인의 엄마: 괜찮아……. 착하지…….
어린 시절의 카인: ……착하지 않아. 친구에게 거짓말을 했어.
카인의 엄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잖아. 마법사를 본 적이 있냐고 물어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 뿐이지.
어린 시절의 카인: 거짓말이나 마찬가지야. 모두 말했는데……. 마법사가 보고 싶다고.
카인의 엄마: 너는 뭐라고 말했니?
어린 시절의 카인: ……나도 그렇게 말했어……. 내가 마법사인데……. 있잖아. 나, 거짓말을 했어. 거짓말은 하면 안되는 거잖아? 아빠도 그렇게 얘기했지?
카인의 엄마: 그렇네.
어린 시절의 카인: 검 선생님도 그러셨어. 친구도 거짓말쟁이는 싫대. 그런데…….
카인의 엄마: 싫었지만 엄마의 말을 지켜줬지? 마법사라는 걸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
어린 시절의 카인: ……응…….
카인의 엄마: 고마워, 카인. 엄마를 안심 시켜줘서.
엄마는 슬픈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 같으면 감사의 말을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인데, 왠지 슬픔은 깊어져갔다. 엄마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친구들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 무엇보다 나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생물이 되어버리는 것이 무서웠다.
그날 밤, 나는 분명 처음으로 옳음에 대해 망설이고 있었다. 어릴 적의 올바름은 하나였고 그것만 지키면 자신은 괜찮다고 믿었다. 나쁜 짓은 하지 않아.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아. 꿈을 포기하지 않고 전력으로 뒤쫓는다.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만난 친구를 소중히 한다. 악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면 그런 일을 쉽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몰랐다. 꿈을 꾸는 것이나 부모를 공경하는 것. 친구를 소중히하는 것이 서로 부딪칠 수도 있다는 것을. 같은 올바름 속에서.
카인의 엄마: 카인, 제발. 왕도에 가지 말아줘. 영광의 거리의 기사로 충분하잖아. 모두 예뻐해주고 영주님도 잘해주셔.
카인: 그렇기 때문에 가는 거잖아. 모두 덕분에 모처럼 잡은 기회야.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올게. 이 날을 계속 꿈꾸고 있었어! 괜찮아! 자랑스러운 아들이지?
카인의 엄마: 너는 세상을 몰라……. 아직 너무 어리잖아.
카인: 걱정하지 말라니까.
카인의 엄마: 왕도의 기사라니, 분명 소문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야. 이 거리에 있는 편이…….
카인: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어렸을 때부터 계속 내 꿈을 응원해 줬잖아? 언제나처럼 웃으면서 배웅해줘. 걱정할 필요 없어. 괜찮으니까.
카인의 엄마: …….
카인: 왕도에서 출세해서, 뭔가 굉장한……. 으음, 잘 모르겠지만 고급품을 보낼게! 기대해줘!
카인의 엄마: ……마음대로 하렴.
카인: ……다녀올게. 엄마!
엇갈린 것도 싸움도 있었다. 모르는 것도. 내 말에 아무도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는 것도, 누군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것도 있었다. 장난삼아 누구를 화나게 하거나 누군가의 농담에 잘 웃지도 못하고. 그래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사랑받고 지켜지고 있었다. 품위있고 완벽한 방식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나의 세계는 나를 사랑해주고 있었다. 태어난 거리에 지켜지고 있었다.
카인의 친구: 카인, 건강하게 지내야 해! 마음껏 이름을 올리고 와!
카인의 친구: 우리 중에서 제일 출세한 우두머리! 힘내, 카인!
카인의 친구: 나도 부모님을 설득해서 왕도로 갈게! 먼저 가서 기다려줘!
영광의 거리 주민: 다녀와! 몸조심하고 무공을 세워!
영광의 거리 주민: 도시 사람은 차가우니까 무슨 말을 들어도 신경쓰지 마! 싫어지면 돌아와!
영광의 거리 주민: 카인, 잘 다녀와. 멋진 사람을 많이 만나도 우리를 잊으면 안돼 …….
카인: 잊지 않아! 그러면 다녀올게! 모두들, 고마워!
정의는 하나 뿐이라고 생각했다. 모두 같은 규칙을 지키고 있으면 아무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고. 그것은 어린애 같은 환상이다. 정의는 많이 있다. 수많은 정의의 우선순위도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마다 다르기는 커녕 기분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정의의 우선순위는 계속 바뀐다. 개인의 자유인가. 약자의 구제인가. 전통에 대한 경의인가. 평등의 정신인가. 법률인가. 자유인가. 권리인가. 정의를 지키기 위한 수단도 달라진다. 평화인가. 심판인가. 관용인가. 본보기인가.
그래도 나는 내가 상상하는 좋은 사람으로 있고 싶었다. 잘해주고 싶었고, 돕고 싶었다. 이해하고 싶었고, 친구가 되고 싶었다. 대가 따위는 필요 없다. 누구에게 강요된 것도 아니다.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사랑받고 지켜져왔듯이 사람을 사랑하고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오웬: 바보 같아. 예쁜 말만 늘어놓고 말이야, 위선자 기사님.
오웬에게 말하면 분명 이런 식으로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거짓말도 허세도 아닌, 내가 봐온 세계는 아름다웠다.
그 녀석이 봐온 세계는…… 아름답지 않았던 걸까.
8화 믿는다는 것
오웬: 거의 다 왔어.
아서: 그런 것 같네. 멀리서도 풍요의 거리의 불빛이 보여. 그야말로 밤의 성이네.
오웬: 왜 갈아입었어?
아서: 내 신분을 모르는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
오웬: 왕자님인데? 왕자님은 인간 중에서도 비교적 좋은 부류지?
아서: 비교적 좋은 걸까?
오웬: 북쪽에서는 강함이 말을 하지만 중앙에서는 신분이 말을 하잖아. 평민보다는 귀족. 귀족보다는 왕족. 왕은 오즈나 미스라처럼 으스대지. 그런데 왜 신분을 숨기는 거야?
아서: 그렇게 뽐낼 수 없어. 오즈 님이라 미스라도 으스대지는 않잖아?
오웬: 으스대잖아.
아서: 오웬도 으스대고 있어?
오웬: 으스대네.
아서: 언제?
오웬: 하? 항상 그렇잖아. 지금도인데?
아서: 그렇구나!
오웬: 맞아.
아서: 오웬. 조금 전의 이야기 말인데…….
오웬: 평범하게 대화 진행하지 마! 으스대도 되는 거야? 왕자님 주제에.
아서: 눈치 못 챌 정도니 괜찮아. 나는 신분적으로 으스대는 느낌이니까 피차일반이야.
오웬: 뭔가 짜증나네…….
아서: 오웬. 조금 전의 이야기말인데, 조금 더 자세히 말해주지 않을래? 카인은 왜 명예를 버리려고 했지?
오웬: 서쪽 나라의 군인들에게 신용을 받기 위해서지.
아서: 신용을 받기 위해……? 명예를 유지하는 것이 신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오웬: 흥……. 카인과 같은 말을 하네. 너도 어리석구나. 내가 알려준 거야. 카인 같은 남자는 신용받지 못하니까. 믿을 수 있는 것은 걸쭉하게 못생겨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해서, 바로 배신하는 분별없는 패거리들이야. 자신과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일이든 한다. 그런 것들이 더 믿을 만해.
아서: 어째서?
오웬: 당연하잖아. 규칙이 알기 쉬우니까. 규칙이라고 해도 법률과는 달라.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은 암묵적인 구조. 사람의 본질 말이야.
아서: 사람의 본질…….
오웬: 맞아. 자시보다 행복해 보이는 상대는 시기하고 질투하고 손해를 입히고 싶어하지. 사람들 앞에서는 이룰 수 없는 욕망도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완수한다. 그런 인간의 본질이야. 다들 추악한 본성을 감추고 싶어 해. 그렇기 때문에 추악한 본성을 털어놓으면 안심하고 동료가 되는 거야. 그게 신용이고.
아서: …….
오웬: ……하지만, 기사님의 룰은 아무도 몰라. 그래서 믿을 수 없어. 아무도 그 녀석에게 마음을 보이지 않아. 하하…… 바보 같아.
아서: ……그래서 카인은 명예를 버리려고 하는 건가? 너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서?
오웬: 그래. 낙담했어?
아서: 아니……. 걱정하고 있어. 카인답지 않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웬: ……무슨 뜻이야?
아서: 평소의 카인이라면, 너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오웬: 하? 왜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거야.
아서: 카인을 믿기 때문이야. 이게 신용인 것 같아, 오웬. 카인은 믿음의 의미를 틀리지 않아.
오웬: …….
아서: 너도 사실은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오웬: 누구를? 기사님을? 설마. 아서. 기사님을 부추긴 건 나야. 나는 계속 기다렸어. 그 녀석의 눈을 빼앗은 날부터 그 녀석이 본색을 드러내기를 기다렸어. 약하고 어리석고 비겁한…….
아서: 하지만 기뻐하지 않아.
오웬: 하?
아서: 카인이 타락하려고 하고 있는데 기뻐하지 않잖아.
오웬: 기뻐하고 있어. 그래서 너를 데리고 나온 거야. 더 최악의 사태를 만들기 위해. 도박이나 색욕에 빠진 모습을 기사님은 너에게 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아할 테니까.
아서: …….
오웬: 분명 엄청 흐트러질 거야. 벌써부터 기대되는 걸.
아서: ……너는 청개구리구나.
오웬: 떨어뜨려 죽여버린다, 왕자님.
아서: 나는 조금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어. 너는 심술을 좋아하는 마법사고, 카인의 타락을 기대하고 있다……. 카인이 조금이라도 기사답지 않은 짓을 하려고 하면 손가락질하고 웃어주려고 하지. 그러기 위해서 그를 따라다니고.
오웬: 하하……. 맞는 말이야. 착한 척하는 기사님이 자신의 본성을 보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 모습을 보고 웃어주는 거야. 뭐야. 역시 이상적인 기사님은 없잖아. 세상은 구역질나는 것들 뿐. 내가 너무 좋아하는, 역겹고 최악의 거짓말과 악의로 넘칠 뿐. 꼴 좋다. 나는 속지 않았어.
아서: ……사실은…… 믿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오웬: …….
아서: 그래서, 나에게…….
오웬: 하하……. 바보 같아.
아서: 오웬.
오웬: 시끄럽네. 혀를 잘라버릴 거야.
아서: 나도 마찬가지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 믿고 싶어서…….
오웬: ……뭐야?
아서: ……오웬. 너는 오래 사는 북쪽의 마법사지.
오웬: 그래.
아서: ……오즈 님은……. 오즈 님은 어째서 마왕이라고 불리는 거지? 강해서? 아니면……. 소문대로 예전에 이 세계를 유린했었던 건가? 너는, 그 모습을 본 적 있어……?
오웬: ……피가로나 쌍둥이는 뭐라고 했어?
아서: ……진실을 들은 적은 없어. 그저, 오즈 님의 불명예스러운 소문에 내가 분개할 때마다…… 그렇네, 라고 위로해 주셨지. 나는 내 멋대로 그것을 불명예스러운 소문의 부정으로 여기고 있었어. 오즈 님도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
오웬: 후후……. 아아, 그렇구나.
아서: 오웬은 알고 있지? 가르쳐주지 않을래?
오웬: 글쎄, 나야 모르지. 나중에 뭔가 생각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몰라.
아서: 어째서……. 아까워하지 말고 알려줘.
오웬: 모른다니까.
아서: 오웬. 제발.
오웬: 오즈는 무서운 마왕이었어. 거대한 재앙보다도 잔인하게 세상을 부쉈지.
아서: …….
오웬: 내 말을 믿어?
아서: ……거짓말이었어?
오웬: 어느 쪽이 좋아? 왕자님이 좋아하는 쪽을 선택해. 좋아하는 쪽을 선택해서 좋아하는 세계에서 살아. 한쪽에는 뚜껑을 덮고 보지 못한 채로.
아서: ……그렇게 되면 좋겠네. 꼴 좋다. 나는 속지 않았어. 오즈 님을 믿고 있어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어.
오웬: 흥……. 내려갈 거야. 떠들지 말고 살살 따라와. 카인을 보여줄게.
아서: 살짝 보는 거야? 방해를 하는게 아니라?
오웬: 맞아. 너도 최악의 기분을 느꼈으면 하니까.
서쪽 나라의 장교: 아하하! 재미있는 남자군, 카인. 장군님이 여기 계셨다면 소개해 드렸을텐데. 아쉬워.
카인: 바넷 장군이라. 마법 과학 병단을 도맡아 하고 있다고 했지. 니콜라스도 신세를 졌을 거야.
서쪽 나라의 장교: 아아. 원래라면 오늘 중으로 돌아오실 예정이었는데 연장되어서…….
서쪽 나라의 장교: 에? 돌아오셨다고……? 풍요의 거리로 돌아오시는 중이라고 하는군.
카인: 그거 고맙네. 지금 당장 만날 수 있을까?
서쪽 나라의 장교: 장군 각하다. 그런 홀가분하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야. 하지만…… 사교적이고 소탈한 편이니 이 장교 클럽에 들르신다면 소개할 수는 있겠지.
카인: 정말로?
서쪽 나라의 장교: 아아. 하지만 오늘 밤은 늦었으니까.
카인: 늦게까지 일하는 날에는 술이 더 땡기는 법이지. 장군께서 좋아하는 것은? 춤은 좋아하시나? 춤출 수 있는데.
서쪽 나라의 장교: 아하하, 춤이라도 춰. 장군은 분명히 소설을 좋아하셨지.
카인: 기우군. 나도 좋아해.
서쪽 나라의 장교: 정말로?
카인: 아아. 눈앞에 있으면 큰 소리로 낭독하고 싶어져.
서쪽 나라의 여성: 어머, 들어보고 싶은 걸. 아슬아슬한 대사도 많이 있어.
카인: 전혀 괜찮아. 장군의 귀에 들어가는 거라면 흥미를 가져주실까?
서쪽 나라의 장교: 뭐, 피곤하지 않으셨다면……. 분명히 이걸 좋아하셨지. 젊은 메이드가 주인공인…….
카인: 아아, 빌려줘. 그러면 여기서 낭독하도록 할게.
서쪽 나라의 장교: 오오! 재미있는 녀석이군!
서쪽 나라의 여성: 카인 님, 귀여워.
카인: 시작하지. 그날 밤, 나는 첫 체험에 가슴이 뛰어…….
아서: 실례하지.
카인: ……!?
카인: (아서 님……! 어째서 이런 곳에!?)
서쪽 나라의 장교: 곤란해, 너. 아이가 올 만한 곳이 아니라고.
오웬: 어른이면 괜찮잖아.
카인: (오웬……! 네가 데리고 온 건가! 이곳은 아서 님에게 있어서 적지나 다름없어. 아무리 나를 괴롭히고 싶어도, 해도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이 있잖아. 이번만큼은 용서할 수 없어.)
오웬: …….
9화 라스티카의 비밀
장교: 이렇게 늦은 밤에 귀환하시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질: 예정보다 신속하게 릴리아나 님의 본가에 인사가 끝났다. 그 뿐이야.
장교: 다행입니다. 이 다음에는 귀가하시겠습니까?
질: 그럴 생각입니다.
장교: 실례하겠습니다. 각하, 보고가…….
질: 뭐지. ……중앙 나라의 아서 전하를 많이 닮은 인물이 있다……?
질: 호오, 그거 재밌군. 장교 클럽에 가볼까.
라스티카: 켈빈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
클로에: 응…….
라스티카: 만약 만나지 못한 채 졸려진다면 이 근처에서 침대를 만들어 잘까. 꽃과 녹색의 좋은 향기가 나고, 아침 이슬이 방울이 맺혀 얼굴에 떨어져서 잠에서 깨는 것도 멋지지 않니?
클로에: 그렇네……. 전에도 있었지, 그런 거. 어디서 노숙하다가 나뭇잎에서 떨어진 물로 와아! 하고 일어나서. 그때도 라스티카는 멋지다고 했어.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나도 라스티카처럼 어느 때라도 멋진 것을 찾을 수 있게 되고 싶어.
라스티카: 클로에는 멋진 것을 찾는 게 특기야. 네가 만드는 옷에는 네가 발견한 멋진 것들이 깃들어 있잖아.
클로에: 응……. 고마워…….
클로에: 라스티카, 나……. 기분이 뜨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네가 너무 좋아.
라스티카: 나도 정말 좋아해.
클로에: 헤헤……. 현자님들, 괜찮을까? 코르테제 성에는 이제 공주님이 없는거지.
라스티카: 그렇네.
클로에: 공주님, 어떻게 된 걸까. 그레고리 말대로 다른 사람일까? 다른 사람이었다고 해도 누가 변한 걸까?
라스티카: ……누가……. ……!
클로에: 라스티카?
라스티카: 클로에, 뒤로 물러나 있어.
클로에: 으, 응…….
노바: …….
라스티카: ……너는…….
노바: 라스티카 페르치?
라스티카: 네.
노바: 비극의 귀공자인가.
라스티카: …….
클로에: 라스티카……!
클로에: 라스티카……!? 어디로 간 거야, 라스티카!? 지금은 누구!? 그 녀석이 라스티카를 숨긴 거야!? 라스티카를 돌려줘……! 라스티카……!
클로에: ……어째서…….
릴리아나: ……나는 틀리지 않았어. 그 분을 지키기 위해서…….
노바: 릴리아나.
릴리아나: ……!
노바: 원하는 대로 데리고 왔다.
릴리아나: ……라스티카 님.
라스티카: ……여기는……?
릴리아나: ……노바. 너는 물러가줘.
노바: 그렇게 하지. 관심도 없으니.
릴리아나: 빨리 가.
노바: 릴리아나. 기억해주길 바라나?
릴리아나: ……아니.
노바: …….
라스티카: 아……. 가버렸다. 여기는 대체 어디죠?
릴리아나: ……아…….
라스티카: 무슨 일이신가요, 릴리아나 공주.
릴리아나: ……라스티카 님…….
라스티카: 네.
릴리아나: 자……. ……서쪽 나라의 공주 아리아를, 기억하고 계시나요?
라스티카: 아리아……. ……아리아……. …….
라스티카: ……여기는 서쪽 나라의 왕궁……. 나의 신부……. 마녀에게…… 작은 새가 되어…….
라스티카: ……내가……. ……내가…… 여기서……. 아리아, 내가…….
라스티카: ……내가…….
릴리아나: 라스티카 님…….
라스티카: ……어쨌더라…….
릴리아나: …….
라스티카: ……기억이 나지 않아…….
릴리아나: 그걸로 됐습니다.
라스티카: …….
릴리아나: 당신의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라스티카 님…….
클로에: 라스티카! 라스티카……!
클로에: ……!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져……. 라스티카!?
켈빈: 와앗……!
클로에: 와아아……! 아……. 미, 미안해! 놀라게 해서…….
켈빈: ……!
클로에: 잠시만! 가지 말아줘! 알려줘! 라스티카에 대해서……. 라스티카의 신부에 대해서!
켈빈: …….
클로에: 라스티카는 왜 신부를 찾고 있는 거야? 신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건 사실이야!? 라스티카는 어째서, 전부 잊어버리는 거야……?
켈빈: ……그건…….
클로에: …….
켈빈: ……라스티카 님은……. 라스티카 님은 나도 잊어버렸어.
클로에: ……라스티카의 친구였어?
켈빈: ……너는? 너는 누구야? 라스티카 님의 몸종? 함께 여행을 하고 있나?
클로에: 나는…… 나는 라스티카의 제자야. 라스티카가 주워줘서 함께 여행을 하면서 라스티카의 신부를 찾고 있어. 지금은 같이 현자의 마법사가 되었고, 앞으로도 함께 있고 싶어. 그러니까…… 알고 싶어.
켈빈: 그런가……. 라스티카 님의 제자구나.
클로에: 응……. 너는?
켈빈: 나는…… 음악을 배우고 있었어. 알려주는 조건으로 신부 찾기를 도와줬어.
클로에: 너도……?
켈빈: 나도가 아니야. 나만이 도와줬어.
클로에: …….
켈빈: 아니야. 그…… 경쟁할 생각은 아니었어. 라스티카 님은 반복하고 있을 뿐이니까. 옛날의 일을.
클로에: ……에……?
켈빈: 그래서 나도 잊어버렸어. 그래도 좋아. 그런 끔찍한 일, 기억하고 있으면 라스티카 님이 망가지게 되고 말아.
클로에: 무슨 뜻이야……?
켈빈: 알고 싶어?
클로에: 응.
켈빈: 정말로 알고 싶어?
클로에: …….
켈빈: 알아도 도와줄 수 없어. 과거니까. 마법사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지만 과거는 되돌릴 수 없어.
클로에: …….
켈빈: 나는 계속 힘들었어. 혼자서 안고 있는 것이 괴로워숴,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살해 당하는게 두려워서 노래로 속인 거야. 진짜 같은, 노래 같은 시늉을 하면서…….
클로에: ……나는 라스티카의 비밀을 떠벌리고 다니거나 하지 않아. 살해 당한다는게 무슨 뜻이야? 혼자 안거나 그러지는 않아. 왜냐하면 …… 라스티카가 있는 걸. 라스티카는 너에게 자신의 과거를 물어봐도 된다고 나에게 말해줬어.
켈빈: 그래……. 그렇다면 알려줄게.
클로에: …….
켈빈: 라스티카의 신부는 서쪽 나라의 공주 아리아 님. 400년 전에 라스티카가 죽였어.
10화 차가운 눈동자의 안내인
레녹스: 피가로 님.
시노: 파우스트……! 피가로! 파우스트는!?
피가로: 무사해.
시노: 하아……. ……윽, 다행이다…….
피가로: 너희들도 만신창이네……. 히스, 보여줘.
히스클리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중부터 기억나지 않아서 ……. 시노는 알아? 노바는 어디로 갔어?
피가로: 노바……? 미스라. 노바와 만났어?
미스라: 저는 안 만났어요. 제가 만난 건 뼈 인형 같은 녀석 뿐이고요.
히스클리프: 아……. 네로……! 네로가 브래들리와 함께 있어. 그 밖에도 누군가…….
시노: 네로……! 지하수로에서 만난 녀석이다. 같이 빗자루를 타고 있어. 피가로, 네로도 봐줘! 중상을 입고 있었어 …….
네로: ……히스, 시노……! 무사해? 선생은……!?
레녹스: 무사하셔.
네로: 다행이다……!
브래들리: 위험해. 떨어지잖아! 죽어가는 주제에 소리지르지 마!
네로: ……미안…….
피가로: 바빠지겠네. 미스라, 공간의 문으로 모두를 마법관으로…….
무르: 그럴 필요 없어.
피가로: ……이건…….
브래들리: 무르……?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서쪽의 마법사 무르였다. 하지만 곧 본인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발밑을 쳐다보면 유연하고 짧은 털의 검은 고양이가 있다. 곰은 고양이의 목에는 보라색 보석이 장식된 리본이 감겨 있었다. 아마도 이 무르는 실체화된 영혼의 무르의 조각일 것이다. 영혼의 조각이 실체화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상상보다 예전의 무르와 훨씬 흡사했다. 적수가 없고 오만하며, 도전적인 말투로 자세를 잡는다.
하지만 눈앞의 무르는 어딘가 예전의 무르와 인상이 달랐다. 냉혈하고 무자비한 녹색 눈동자……. 무르는 단순하게 싫은 녀석이었지만 냉혹함이나 사악함은 없었다. 무르가 띄운 냉소에 할 말을 잃었다.
무르: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희 세계의 구세주, 현자의 마법사 여러분. 당신들을 서쪽 나라의 왕궁으로 초대하겠습니다. 분명, 새로운 거주지를 마음에 들어하실 거예요.
레녹스: 새로운 거주지……?
피가로: 미안하지만 거절할게. 보다시피 부상자들이 많아. 마법관으로 돌아가 쉬어야 해.
무르: 걱정하지 마세요. 마법관이라면 서쪽 나라의 왕궁에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피가로: 뭐라고?
무르는 입을 열었다. 차가운 눈동자에는 한 조각의 감정조차 보이지 않는다.
무르: 어서오세요, 서쪽 나라의 마법관에. 이분들이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렇게 무르는 목 만으로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의 등 뒤에 뼈의 표본 같은 것이 몇 구나 출현했다. 10구 정도는 될까. 섬뜩한 존재였다. 생기나 마력은 느끼지 않지만, 대량의 마나석을 압축한 듯한 기척이 있었다. 시노가 얼굴색을 바꿨다. 격앙되어 무르를 향한다.
시노: 네가 데리고 온 건가……! 그 녀석들을……!
레녹스: 그만둬, 시노……!
시노: 무슨 생각이야!? 그것들 때문에 모두…….
시노가 말을 멈췄다. 레노에게 막아져서가 아니다. 시노 앞에 미스라가 나섰다. 나른한 녹색 눈동자가 날카로움을 더해 무르를 쳐다본다.
미스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설마, 저를 위협하려는 것은 아니겠죠.
수로 둘러싸는 듯한 방식을 미스라는 불쾌해했다. 무르는 매섭게 눈썹을 치켜올린다. 미스라의 긴 손끝 위로 그의 마도구인 해골이 출현한다. 그 순간, 나와 브래들리가 동시에 제압했다.
피가로: 그만둬, 미스라. 다친 사람이 있어.
브래들리: 그 녀석들과 싸워도 너는 마지막에 서있겠지. 하지만, 그 사이에 이쪽이 몇 명이나 돌이 될지도 몰라.
미스라: …….
미스라는 말없이 무르를 노려보았다. 버릇없는 머리를 흔들며 무르는 고개를 기울였다.
무르: 역시. 현명한 판단이다.
파우스트와 네로가 중상이다. 히스클리프와 레녹스도 깊은 상처를 입었다.
피가로: 알았어. 서쪽의 왕궁으로 향하지.
시노: 피가로……!
피가로: 단, 청결하고 안전하게 치료할 수 있는 장소를 확보해줘.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승낙할 수 없어.
무르: 좋습니다. 그러면 안내해 드리죠.
무르는 반박하지 않고 공손히 절을 했다. 거대한 뼈 표본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들이 갈비뼈를 드러내자 창백한 빛이 모여들었다. 갑자기 공간에 둥근 구멍이 뚫린다. 구멍 너머에는 엄청난 속도로 경치가 이동하고 있었다.
피가로: 공간 이동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는 건가…….
무르는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무르: 누가 엘리베이터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새삼스럽게 이 남자의 존재가 두려워진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늦지만 오랜 역사의 어느 타이밍에 무르를 죽였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무르의 영혼의 조각은 샤일록이 수집해 무르의 본체에 모으고 있었다. '거대한 재앙' 의 영향으로 실체화된 무르의 영혼 조각은 제각기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영혼의 조각은 무슨 연구에 임하고 있던 걸까. 좋지 않은 예감에 눈을 찡그린다. 그러자 브래들리가 어깨를 건드렸다. 몸을 내밀어 귓가에 속삭인다.
브래들리: 어이. 이동한 곳에서 놈들에게 둘러싸이면 부상자와 아이를 데리고 도망쳐.
피가로: 너는?
브래들리: 흥. 녀석들을 개밥으로 만들어줘야지. 개는 새의 뼈를 좋아하잖아.
피가로: 어라. 새야, 저거……?
브래들리: 알았지. 그러니 부탁한다.
다정하게 등을 두드리고 브래들리는 떠났다. 부탁할게. 이런 말을 그가 나에게 할 줄은 몰랐다. 의식이 몽롱한 네로를 쳐다본다. 도망친 전 부관. 빈사의 그를 지키고 싶다면 입장은 같다.
미스라: 대화는 끝났나요? 이제 슬슬 해줄게요.
피가로: 진정해. 그건 나중에 하자.
미스라: 하?
브래들리: 초대를 받아주지. 서쪽 나라의 왕궁으로.
공간의 구멍이 펼쳐져 호사스러운 성을 비춘다. 서쪽 나라의 왕궁이다. 우리는 공간의 구멍을 통해 서쪽 나라의 왕궁으로 향했다.
클로에: ……라스티카가 신부를 죽여……?
켈빈: 맞아.
클로에: 그…… 그렇게나 찾고 있던 신부를……? 거짓말이야. 믿을 수 없어……. 그만해! 라스티카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켈빈: 이게 진실이야.
클로에: …….
켈빈: 신부를 죽인 라스티카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슬퍼하고 짐승처럼 울부짖었어. 그걸 본 철학자가 조언을 했지. 괴로운 기억 때문에 살아갈 수 없다면 잊어버리라고. 망각은 구원이니까. 그래서 나도 잊혀졌어.
클로에: ……그런…….
켈빈: 너도 잊혀질 거야. 라스티카가 산다는 것은 잊어간다는 것이니까.
클로에: ……어째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거야? 라스티카는 상냥한 사람이야. 신부를 자기 손으로 죽이다니……. ……그런 일…….
켈빈: ……쉬잇……. 목소리를 낮춰. 어디서 듣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클로에: 누가…….
켈빈: ……마녀.
클로에: 마녀……?
켈빈: 이 나라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숨는. 서쪽 나라에 숨고 있었지만…… 지금은 서쪽 나라를 숨기고 있는 마녀야.
클로에: ……서쪽 나라를 숨겨…….
켈빈: 맞아. 바느질을 하듯 교묘하게 진실을 숨겨버렸어. 누군가가 관심을 가지기 전에…… 피가 흐르기 전에 생긴 딱지처럼 말이야. 그 마녀는 마왕 오즈와는 달라. 불꽃도 번개도 피도 사용하지 않아. 무관심과 거짓말과 소통, 소문으로 진실을 묻는 거야. 누구나 흥미를 잃고 있을 때 지루한 사건의 얼굴로 진실을 깨달은 자는 가차없이 죽이는거지.
클로에: …….
켈빈: 부귀영화를 자랑하던 페르치 가문이 몰락한 것도 그 마녀가 저주해서 죽인 거야. 공주 아리아를 저주로 작은 새로 만든 것도 그 마녀의 짓이야. 진실을 알리려다가 나도 살해당할 뻔했어. 그래서 여기까지 도망쳐왔어. 지금은 비극의 귀공자의 이야기를 아는 것은, 발푸르기스의 축제에 모이는 얼마 안되는 마법사들 뿐…….
클로에: 그 마녀는 누구……? 아직 살아있어……?
켈빈: ……아아. 서쪽 왕궁에 있어.
켈빈: 잊혀진 공주 자라. 마녀로 태어난 탓에 숨겨져 자란, 아리아의 쌍둥이 언니.
릴리아나: ……물어볼 수 없었어……. 나를…….
???: 자라를 기억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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